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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꾼
가끔씩 너희들은 말해
‘말세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런 짓을...’
하지만 그런 말을 들릴 때마다 나는 흐뭇해지고 말아. 그건 내가 맡은 바 소임을 아주 잘 해내고 있다는 증명이자 우리의 세상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야.
내가 누구냐고? 그래, 숨길 필요 없겠지.
난...
악마야.
그리고 오늘 난 왜 세상이 너희들이 원하는 바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점점 더 더럽고 추악해지는 지.
그 이유를 알려주려 해.
자 저기 저 여자를 봐.
30대 중반에 검은 옷을 입은 여자 말이야.
맞아, 상복을 입은 바로 그 여자야.
그녀는 오늘 사랑하던 딸을 잃었어.
고작 7살 밖에 안 된 꽃 같은 아이를 말이야.
어찌나 슬펐던지 밤새 울며 기도를 드렸다지?
“신이시여 제발... 저 아이를 구해주옵소서. 굳이 저 아이를 데려가시겠다면 차라리 못난 저를 벌하시고 부디 저 아이만은... 죄 없는 저 어린 생명만은 구원해주옵소서.”
꽤 간절했던 모양이야. 그 바쁘신 천사 나으리들이 행차 하실 만큼
뭐 그럴 만도 하지.
아이는 그녀 삶의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말야. 기도에 부응해 납셨다는 그 천사 나부랭이들이 그 여자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슬퍼하지 마세요 어머니, 비록 조금 일찍 떠나지만, 아이는 천국의 꽃이 될 겁니다. 운명의 뜻에 따라 반드시 어머니와 다시 만나 못 다한 모녀의 정을 나눌 것입니다.”
'풋'
아! 미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네.
'꽃?' '모녀의 정?' 난 왜 이런 얘기만 들으면 닭살이 돋고 간지러운 지 모르겠어.
암튼 걔들은 항상 그런 식이야. 그래서 늘 그 모양 그 꼴이기도 하고.
철저하고 세심하며 지독할정도로 끈질긴 우리의 설계와는 완전히 정 반대랄까?
천사가 자릴 비우자 난 조용히 울고 있는 그녀에게로 다가갔어.
그리곤 달콤하게 속삭였지.
“만약 아이를 살릴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린 이걸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고 불러. 너도 알겠지만 그 효과는... 음... 최고야! 완전 짜릿하지!
물론 그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나를 우러러보더라고. 어쩌면 나를 천사라고 착각했을지도 몰라.
그러자 이 모습을 본 진짜 천사가 부리나케 달려와 말하더군.
“이봐요 악마님, 아이를 잃은 분에게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쓸 데 없는 짓일랑 마세요. 그녀는 독실한 크리스찬입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기는 일 따윈 절대 하지 않을 겁니다.”
누가 뭐래?
천사 아니랄까봐 오지랖은 젠장...
이래서 난 걔들이 싫다니까?
그렇게 피폐하고 상처만 남은 영혼은 말이지
우리도 별.로.야.
가치도 없고, 효율도 낮고, 한 마디로 영양가가 없다니까?
그래서 뭐 어떡해. 그냥 비웃어줬지.
그러자 그 천사나부랭이가 말하더군.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 하는 말입니다. 아시잖아요. 설사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영혼을 팔더라도 그 목적이 숭고한 희생과 사랑으로 이어질 경우 어떠한 결과로 이어지는 지를요.”
순간 화가 나더라. 왜 안 그렇겠어. 말만 천사지, 내가 먹다 흘린 지옥 짬밥만 모아도 그 속에 파묻혀 허우적 대다 죽을 천 년 미만의 하찮은 신참 천사 주제에 뭐? 규정이 어떻고 저떻고...
알아! 나도 안다고, 악마질 원 데이, 투 데이 한 게 아니라고!
해서 용암처럼 끓어 오르는 화를 억지로 누르며 말했지.
“알거든요. 계약의 엄중함은 천사의 축복만큼이나 무겁지만, 오직 단 하나 숭고한 희생과 사랑은 그걸 뛰어 넘지요.”
그러니 웃더군, 그 천사 나부랭이 말이야. 내가 제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고 생각했나봐. 순진한 놈, 그리곤 역시나 쓸데없는 일장 연설을 늘어 놓기 시작하더군.
“아신다니 기쁨니다. 혹 당신과의 계약으로 아이를 구하더라도, 그녀의 영혼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아이가 살아났지만 그 원인이 그녀의 숭고한 희생과 사랑이라면 이는 모든 계약을 뛰어 넘는 초월적인 힘을 지니기에 당신과의 계약은 자동으로 파기되고 그녀의 영혼은 구원받게 됩니다.”
아 지겨워, 참고로 이거 완전 천사 새끼들의 종특이야.
꼭 무슨 꼰대처럼 설교를 못해 죽은 귀신이 붙은 것 같다니까.
“눼에 눼에... 알겠으니까 이제 좀 꺼지시죠? 저는요 성질이 더러워서. 댁에 천사님들만 보면 구역질이 나온다구요!”
그렇게 말하고 미친듯이 헛구역질을 해대자, 천사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돌아가더라.
하긴 뭐 더럽고 아니꼬와도 지들이 어쩌겠어.
착한 척 해야지.
물론 마지막까지 한 마디 남기긴 했어.
"잊지마세요. 숭고한 희생과 진실된 사랑은 신조차 어쩔 수 없는 불가침의 존재임을요!"
그래... 걔들은 늘상 그런 식이야.
앞에선 알량한 위로를 건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지만
막상 일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나 물어보면 한심하기 그지 없지.
걔들은 타고난 방관자야.
모든 것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지.
'신의 뜻입니다.'
늘상 그 거지 같은 핑계를 대며 말이야.
하지만 앞서 말했듯 우린 달라.
화끈하고 신속하지.
우리의 모토는 언제나 고객 만족(?)에 있으니까.
나는 곧장 달려가 아이의 어머니를 만났어.
그리곤 내가 가진 권능의 일부를 아이의 어머니에게 주었어.
아무런 대가 없이, 어떠한 계약도 맺지 않고 말이야.
오죽했으면 그 믿기지 않는 광경에 천사조차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였다니까.
그러자 그녀가 말했어.
“감사합니다. 정말 이 버튼만 누르면 되나요? 그럼 과거로 돌아가 불쌍하게 죽은 제 딸을 구할 수 있는 건가요?”
나는 '덩실덩실' 어깨춤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대답했어.
“물론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운명이란 시계 바늘과 같아서 언제나 정해진 곳만을 돌고자 합니다. 숱한 고난이 다가올 겁니다. 쉽사리 성공하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으세요. 끝까지. 당신의 믿음과 헌신만이 죄 없이 죽어간 딸을 다시 살려 낼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 여자 얼굴을 봤어야 했는데...
그건 말이지 흡사 그녀가 평생을 숭배하고 흠모해온 신을 영접한 듯한 표정이었어.
펑펑 울며,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전했지.
아 참! 이쯤 되면, 엉뚱한 생각을 하는 녀석들도 있을 거야.
예를 들면 그런 거...
‘아! 이 자식 악마였지? 숱한 고난? 운명이란 시계바늘과 같아 언제나 정해진 곳을 돌아?’
‘이건 분명히 순진한 그녀를 꼬드겨 끝없는 고통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겠다는 수작이야!’
‘그녀는 필시 수없이 많은 시간을 돌고 돌지만 끝끝내 딸을 구하지 못 할 거야. 너희들이 방해할 테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못 할거야. 당연하지 목숨보다 소중한 딸이니까. 어쩌면 영원히 딸을 잃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살며 끝없이 괴로워해야 할 지도 몰라.’
너 지금 웃었지?
내가 이 정도도 모를 줄 알았냐며 나를 비웃지 않았냔 말이야.
그렇다면 넌 나를 너무 우습게 본 거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멍청이 같은 생각을 한 거지.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할게...
그래!
‘그녀는 딸을 구해.’
혹 신이 나타나 훼방을 놓더라도 이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야 말 거야.
왜... 좀 놀랐어?
설마 아직도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맞아. 죽은 이를 되살리고, 시간을 뒤바꾸는 일. 그건 비록 신이 정해둔 운명의 선로를 이탈하는 일이지만, 천사의 마지막 말 처럼. 신의 율법이란게 원래 그래. 의외로 융통성이 있다니까. 숭고한 희생과 진실된 사랑, 그 앞에선 그 분도 종종 눈을 감지. 게다가 누차 말했지만 그녀와 나, 우리 둘 사이엔 어떠한 계약관계도 없어. 나는 무상으로 나의 권능을 나누어 주었고. 그녀는 언제고 자신이 원할 때 그 일을 멈출 수 있어. 그녀가 멈추지 않는다면 그땐 천사가 가만있지 않겠지. 나타나 그녀를 설득할 거야. 처음 나타났을 때 처럼... 운명이 어쩌고 저쩌고, 얼토당토 않은 위로를 건네며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그녀에게 딸을 돌려주려는 내 의도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말이야.
자... 그리고 바로 지금이야.
저길 봐.
아이가 보이지?
아이를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그녀도 보여?
자 어때. 맞지?
찰나의 순간이지만 길고긴 시간의 반복속에 그녀는 결국 아이를 구하고야 말았어.
숱한 고난과 역경의 시련을 뚫어야 했지만 진실된 사랑과 숭고한 희생의 힘으로 시간이란 이름의 틈바구니를 당당히 빠져 나왔다 이 말이야.
어때? 이제 만족해?
네가 바라던 해피엔딩이잖아.
그녀는 영혼을 빼앗기지 않았고, 심지어 죽은 딸도 되찾았어.
이런 걸 윈-윈이라고 하나?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누차 말하지만 나는 그녀가 천국에 가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어.
하하하, 그녀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 나도 정말 기분 좋네.
어? 근데 이게 뭐냐고? 악마라면서 정말 그래도 되는 거냐고?
넌 잘 몰랐겠지만, 사실 우린... 원래 이래.
독사보다 악랄하지만 필요에 따라 우린 가장 훌륭한 인간보다 더 헌신적으로 선행을 베풀지.
지금도 봐, 그녀가 이 기쁨을 누구에게 돌리는 지.
누구에게 감사 기도를 드리는 지 말이야.
어라 이게 누구시더라?
그녀가 울부짖을 때 뒷짐지고 외면하던 바로 그들이잖아.
허허! 정작 딸을 되돌려주기 위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뛴게 누군데 말이야.
생각해봐 네가 우리 입장이라면 정말 황당한 일 아냐?
그지만, 뭐 상관없어.
아니, 상관 안 해
그녀의 알량한 기도 따위... 맹세코 한 번도 바란 적이 없으니까.
내 스타일 알겠지만, 그런 거 해봐야 난 간지럽고 거북스럽기만 해.
자 그럼 이만 가볼게...
어딜 가냐고? 왜 그렇게 서두르냐고?
미안하지만 이제부턴 좀 바빠질 거라 한가하게 이런저런 설명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뭣 때문에 그렇게 바쁘냐고? 그거나 좀 말해주고 가라고?
하하핫... 그러고 보니 제일 중요한 얘길 안 했구나.
인간에겐 긴 시간이지만 20년, 아니 30년 이란 아주 짧은 계절이 지나면, 수확의 순간이 찾아와
저길 봐, 씁쓸한 표정으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 한 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천사의 저 비참한 몰골을...
그래... 감히 끼어들 수 없었겠지.
명색이 천사가 되가지고, 아이를 살리겠다는 엄마의 헌신적인 사랑을 훼방 놓을 수야 있나.
눈물겨운 희생으로 말미암아 되살아난 아이를 해쳐서야.
천사 체면이 영 말이 아니지.
하지만 말야.
나라면...
당장 저 아이의 목을 비틀어 버렸을 거야.
장차 저 아이가 해낼 일들을 아니까.
모두 보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되고 그들은 안 돼.
천사란 작자들은 애초에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어.
놀랍도록 숭고하고 착하고 공정하며 세상을 아름답게만 바라보지.
멍청할 정도로 말이야.
이런, 쓸 데 없는 말이 길었지?
다시 설명할 게...
네가 봤다시피 그녀는 결국 딸을 구해냈어.
시간을 돌고 돌아, 억겁의 시간을 떠돌며 헌신적인 사랑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증명해 냈지
정확히
665번의 실패를 딛고 말이야.
어떤 영화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더라.
그것과 같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아이의 미래는 17만 9천 6백 6십 6개의 미래 중 가장 참혹해.
최상급의 파멸을 가져다 줄 경우의 수지.
알다시피 아이들은 예민해.
특히 저 나이대의 아이들은 더...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아냐.
어떻게 구해지는가.
어떤 경험과 어떤 기억을 가지고 살아 가는가
작은 차이에도 아이의 인생은 무수히 많은 변곡점을 남기며 변하지
조금 감이 와?
왜 그것이 운명이었는지.
왜 저 아이가 그토록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었는지.
왜 기도에 부응해 찾아온 천사가 그녀의 간절한 바람에도 고작 '알량한 위로'만을 남긴 채 황급히 떠나야 했는지.
맞아 아이는 살해됐어.
그것도 처참한 성적 폭력과 더불어 말이야.
비록 나의 권능과 눈물겨운 모정의 힘이 더해져 위기를 극복하고 엄마의 품으로 되돌아 왔지만
이미 아이의 기억 속엔 지울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이 남아버렸지.
다 내 작품이야.
하얀 종이처럼 순수한 아이의 머릿속에 끔찍한 파멸의 시한폭탄 하나를 심어 버린 거지.
지금도 봐, 아이의 달라진 눈빛을...
증오와 분노 그리고 세상에 대한 혐오가 느껴지지 않아?
내가 심은 저 악몽의 씨앗은 머지않아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거야.
그리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세상 곳곳에 스스로에게 내재된 증오와 분노의 씨앗을 심기 시작할테지.
그래 맞아.
곧 전쟁과 눈물겨운 학살의 시대가 열릴거야.
저 작은 아이의 회생으로 인해.
숭고한 희생, 진실된 사랑,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비는 몽매한 모정에 의해
하지만 그건 우리에게 수확과 축제의 장에 다름 없어.
추수감사절이 찾아온다고!
나와 내 친구들은 두둑한 보너스를 받게 될 거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혼과 미움, 시기, 증오...
모두 너희로 인해 우리를 살찌우는 것들이지.
그러니 즐겨...
이건 신조차 허락한 '운명' 이니까.
665번의 방해 뒤, 숭고한 희생과 진실된 사랑의 힘으로 되살아난 666,
그러니까 저 짐승의 아이가 기필코 그리 만들 테니.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 추신 -
이제 알겠지. 신과 선함 그리고 천사가 존재함에도 오늘날의 세상이 왜 점점 더 더럽고 추악해지는 지를...
- 추신의 추신 -
수 없이 많은 악마들 중에서도 나는 더 없이 특별한 존재야.
모든 전쟁과 학살의 뒤엔 언제나 내가 있었지.
잊지마. '추수꾼' 그게 내 이름이야.
<끝>
출처 | ☆용사☆님의 글에서 모티브를 얻어 끄적거려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