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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서 운명으로
게시물ID : phil_169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amel010
추천 : 0
조회수 : 1011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9/05/06 23:36:32
자유를 얻는길은 사실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자유가 허망하고 불가 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길 일수 있습니다.
보통으로 자유라고 하면 어떤 주체가 하고자하는것을 거침없이 할수 있는 것 입니다.
다시말해 내가 자유롭다는 것은 내가 하려는것을 맘대로 하는 것이며 
대게 반대로 말하자면 외부의 영향으로 자신이 움직이는것을 말할수 있고 대표적으로 숙명이나 운명이 예.
그런데 불교에서는 자신을 분별하는것이 자유롭지 못한거라는 식의 말이 있슴.
그말은 즉 연기된 연결된 모습에서 자신을 분별하면 자신의 의지가 분별되고,
그러면 외부에 의해 이어져 같이 움직이는 자신의 현재 모습은 언제나 자유롭지 못한 것이 되기 떄문에 자유를 영영 얻을수 없슴을 말함,
우리가 모두 자신 이외의 것으로 부터 연장된 상황에 놓여 있는 이상, 연기적인 이상
자신의 의지를 구분하고 그것으로 부터 비롯된 행위만 자유롭다고 여긴다면 자유는 아예 없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운명이 자유로운 것 입니다.
운명이 자유롭다고 느낄때 우리의 의지는 자유를 느끼기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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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삭제]奇香
2019-05-07 06:13:50추천 0
댓글 0개 ▲
2019-05-07 06:17:28추천 0
불교적 자유론에 대하여 일단 두가지만 비판하고 싶습니다.

부분을 전체의 일부로만 보고 부분의 의미를 무시하는 점과,
모든 실재적 부자유를 의식의 전환으로 해소하려는 점 입니다.

첫번째, 연기법에 의해 모든 것은 의존의 연쇄이므로 어떤 개체든지 의존의 연쇄상황에서 독립될 수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일종의 제논의 역설과 비슷한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아킬레스와 거북이 우화에서 무엇에 이르러면 과정의 무한한 연쇄에 의해 결코 무엇에 이를 수 없다는 역설인데, 이것은 시공간을 동시에 염두하지 않고 공간만 무한 분할함에 의해 생기는 착각으로서 일종의 논리적비약이라고 하겠습니다.
백색에 음영을 점증하면 종국적으로 흑색이 되는데, 중간단계의 독립성을 무시한다든지  백색은 흑색이다라는 논리적비약이 사용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두번째,  필요불가결한 실재적 문제점은 의식의 전환으로 해소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원래 실재에서 비롯되는 문제점은 실재에서 해소하고  관념에서 비롯되는 문제점은 관념에서 해소해야 하나, 실재에서 비롯되는 문제점중 일부는 관념으로 치환하여 해소가능한데,  그런 치환 가능한 문제점에 실재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필수불가결한 요건은 제외된다는 것 입니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는 덜 맛있는 것 혹은 굶주림이 강제되는 상황을 연상하면 오히려 감사할 수 있기에 실재의 부자유를 관념의 전환으로 해소할 수 있지만, 아사 직전의  문제는 관념의 문제로 해소할 수 없고 오로지 영양분 공급으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인과, 실재와 관념, 관계에서 비롯되는 부자유가 있는데, 불교식 자유론은 관념의 자유만 중시하여  인류에게 나머지 부자유를 잔존시켜 지속적으로  인류를 고통에 방치케 하는 역설적 경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댓글 10개 ▲
2019-05-07 06:31:39추천 0
어제의 부자유가 오늘의 부자유가 되지 않기위해, 인과를 개척하고 실재적 성장과 관념적 성숙 그리고 당위의 개선을  지향하는 여정이 인간의 길이라고 봅니다.
종교의 문제는 어제의 고통이 그대로 오늘의 유산이 되는 것이기에, 종교는 무서운 것 이라고 봅니다.
2019-05-07 10:23:04추천 0
관념을 성숙하게 하려고 뭐가 맞고 옳은가를 더 생각하면 우리는 외부와 연결되있다는것은 자명 하죠.
연기 되었다는것을 연결 되있다 정도로만 인식해도 무리 없슴니다. 우리는 모두 단독적이지 않은것을 우선 말하구요.
그래서 나혼자 할수 있는한 자유롭게 해보자고 하면 이게 자유 한도 구역이 한없이 쪼그라듭니다.
그래도 발악을 해서 자유를 쟁취하기위해 노력하는것은 좋은데..
실상은... 우리가 자유롭다고 느낄때. 운명같은 외부의 영향으로 움직이는 자신을 자유롭게 느낄 때! 라는 말 입니다.
우리가 혼자 자유로움을 쟁취한게 아니라 외부에 연기되어 움직이는 자신에 대한 편한 마음이 자유롭다는 마음을 일으킴.
그래서 제말은 우리는 자아로 독립적인 자유는 불가하고 필연적으로 외부와의 화해 운명과의 화해를 통해야만 자유롭다..
2019-05-07 10:26:31추천 0
불교가 관념적인가 어떤가는 모르겠는데
연기법 같은것은 그냥 앞뒤 따져서 말이 됩니다.
논리적으로 맞는것 같으니까 말 한것입니다.
2019-05-07 10:57:06추천 0
인간에겐 몇가지 특이점이 있는데, 첫째는 자기자신을 의식하며 자신이 세계의 유일자로서 주체성을 갖는 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부분적으로 인과를 개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특성에 의하여 인간은 인과의 연쇄에 의한 존재이지만 인과의 연쇄에 독립하여 존재하며, 외부와 연계된 존재이지만 외부와 교류하면서 분리된 단독자로서 존재는 것이고, 둘째 특성에 의하여 인간은 운명순응자가 아니고 운명개척자가  된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한계상황(선택적요소와 비선택적 요소의 작용, 능력과 인식의 불완전성)이기에  한계적 자유에서도 안정해야 되는데, 다행히도 부분적이고 한계적인 자유라도 자유롭기에는 충분하다는 것 입니다(갈증날 때 수백톤의 물이  필요한 것은 아니고 한 잔의  물이면 충분한 것과 같다고 할까요).
2019-05-07 11:20:07추천 0
인간이 인과의 연쇄에 의해 존재하는데 왜 독립적으로 존재 한가요?
그저 보통 독집적이라고 느끼는 것이죠.
생각이란게 원래 자기혼자밖에 주체로 인식 못하는것이니까요.
암튼 그렇게 연쇄에 묶여 있으면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 하시면 되는것이죠.
여기서 문제가 드러납니다. 독립적인 내가 인과연쇄에 묶여 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어찌됬든 인과의 연쇄와 무난한 관계설정을 하는것이 방법 이겠죠.
그냥 인과 연쇄 무시하고 싶어도 안되기 때문 입니다. 혼자 노오력 해봐야 안되고 그게 혼자 하는것도 아니지만요.
오직 자기 혼자만의 주체에 갇칠때는 어떤 노력을 해도 외부와의 화해는 일어나지 않음.
자기라는 주체를 넘어설때만이 외부와의 화해가 일어나고 자유라면 자유인 상태에 가까워집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원래 부터 가진 도덕적인 패턴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단독적인 인간이 외부와의 대립을 벗어나려고 할때 생기는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봅니다.
왜 모두들 자기를 극복하려고 할까요?
2019-05-07 11:29:13추천 0
그래서 요점은
인간은 자유를 위해 자기를 극복해야 하고 외부와의 화해를 통해야만 한다.
그때 우리는 운명을 다시 보게 되고 운명에 대해 자유로울때 비로소 자유라고 부르게 됨.

내안에 갇혀서 자유를 갈망해봐야 갈증만 더해질뿐임.
망각과 망상 안에서 자유롭다고 느낄순 있겠죠.
세상에 나 이외에 것이 다 동떨어진 상관없는 것이라는 망상을 할수가 있다면요.
2019-05-07 12:49:58추천 0
저와 비슷하게 생각하면서 표현방법이 좀 다르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군요.

일단 저의 관점에서, 인간을 자기안에 갇힌 존재로 볼 요소가 있었는지요?
제가 인간을 독립자라고 표현한 것은, 물질적ㆍ인과적으로는 외부와 연계선상에 있지만 의식적으로는 자기자신을 의식하기에, 유일자의 자격으로 독립자라고 한 것 입니다. 독립자라해서 외부와 단절된 것은 아니고 외부와 교류하면서 주체성을 갖고 존재한다는 것 이지요.
외부와 교류하는 방법으로 한계적이지만 인과를 개척하고, 시행착오적 경험(의지와 행위 및 피드백을 통한 성과의 축적이 있는  경험)을  통하여 성장ㆍ성숙하고, 관계에서 당위성을 지향(인식 ㆍ개선)하는 것이 인간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님의 글중에도 이런 내용이 있는데 저와 표현방법이 좀 다른 것 같군요.

그런데 외부와의 화해를 통해 자기를 극복하고 운명을 다시 볼 때  운명에서 자유롭다고 하셨는데, 외부와의 화해가 어떤 것인지 또 운명을 어떻게 보면 운명에서 자유로운지 그 과정의 내용이 좀 미흡한 것 같습니다.
2019-05-07 15:29:44추천 0
저와 생각이 비슷하지 않다고 생각 합니다.
저는 자기극복에 초점이 맞춰 말하려는 것이고.
자기수련 내가 노력해보자 같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극복은 일면 자기 포기죠.
인간이 자기안에 갇힌 존재라는건 기본적인 인식이라 봐야 할듯 합니다. 생각이 자기 인식과 의식이 원래 그러니까요.
운명을 어떨게 봐야 하는가는 운명이 자유의 반대가 아닌 나도 자유로울수 있는 무엇임을 찾는 것이겠죠.
자기극복에 모습이 운명극복에 모습 이겠지요. 그것이 화해의 모습이고 다 같은 말을 한것이구요.
그래서 운명에 대해 자유롭다면 그 화해의 과정을 지나면서 개인의 의식은 자유롭다고 느낄것이란 말입니다.
이때 우리는 운명을 자유를 위해 극복해야할 무엇이 아닌 수용해야할 무엇으로 보겠죠.
말했듯이 저는 오히려 극복의 대상을  자신의 의지로 놓은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게 단순한 문제가 된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느쪽 길에 자유가 있느냐를 말해본것 입니다.
자기 극복과 운명에 대한 수용적 자세? 에 대해 살펴야 하며 그쪽이라는 주장 입니다.
2019-05-08 00:29:25추천 0
능력만을 자유의 조건으로 보는 것,
연기법에 의해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운명성,
운명에 순응하면 비로소 자유로울 것이라는
자유에 이르는 전제와 과정은 확실히 저와 다른 관점이네요.

실례했습니다.

다만 덧붙이자면  운명순응은 모르겠고, 운명애를 가질 수는 있는데 그것은 '나의 운명'이기에 운명애를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2019-05-21 17:38:22추천 0
놀랍습니다.이러한 지적 논쟁이 저를 감동시킵니다.앞으로 이런 논쟁을 자주 보고 느껴서 저도 지적 발전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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