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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백일장] 걱정, 망설임, 찰나
게시물ID : readers_147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그냥아저씨
추천 : 4
조회수 : 291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4/08/12 23: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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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 읽고 두 권 읽고 자꾸만 읽고 싶네.

좋은 책을 추천하는 곳, 좋은 책을 추천 받는 곳 그곳은 책 게시판!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우리함께 좋은 책을 책 게시판에서 공유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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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입니다. 3기 정도 진행 됐구요..."

 

의사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세 번째 듣는 말이기 때문에 이젠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반 년 전부터 간헐적으로 소화가 안 되거나 혹은 속 쓰림 증상이 잦아졌다. 십 수 년도 더 된 고3시절, 수능을 준비하면서 신경성 위염이 생겼고 그 후로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종종 있던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그랬듯 갤포스로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35.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다. 27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2년마다 또는 1년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6개월마다 회사를 갈아치웠다. 아니 갈아치운 것은 내가 아니고 회사였다. 그러다 현재 다니는 회사에 계약직으로 입사했고, 이곳에서도 버려지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판단에 주말도 반납하고 업무에 매달렸다. 그리고 4개월 전 정규직이 됐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급여 명세서의 앞자리가 바뀌었고 정규직끼리 진행하는 회식에도 당당히 참석할 수 있게 됐다. 즐겨찾기 해 놓은 구직 사이트를 즐겨찾기에서 제거했다. 무엇보다 구직 스트레스, 면접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기뻤다. 그러나 그 외에 것은 그대로였다. 야근은 계속 됐고, 업무 스트레스는 조금 더 늘어났다. 그래도 이제 자리를 잡았구나 하는 생각에 잊고 살았던 취미와 연애를 생각하게 됐다.

 

정규직이 되고 3개월 차가 됐을 때 회사에서 진행하는 종합검진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 동안은 취업용 검진으로 보건소에서 보건증을 받기 위한 수준의 검사를 몇 번 받아 봤지만 종합검진은 처음이다. 검진을 받기로 한 전 날 밤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소풍가기 전날처럼 들 떠 있었다. 정규직이 된 후 달라진 월급 명세서보다 회사의 복지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든든한 지원군이 옆에 있다는 생각을 받았다.

 

그런데 암이라니 눈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산 정상이라 생각했는데 구름이 걷히고 더 높은 봉우리가 날 조롱하듯 내려 보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암을 발견했다고 했을 땐 믿지 않았다. 오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다른 병원에서 다시 검진을 받았다. 두 번째로 암을 발견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눈물이 나왔다. 강변에 앉아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억울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 검진까지 진행하고 나서야 난 암을 인정했다.

 

통장의 잔고를 확인했다. 비정규직으로 일할 당시에는 돈을 모으기 힘들었다. 처음 취업한 곳에서는 세금 다 떼면 103만원 정도의 급여가 월급으로 들어왔고 월세와 고시원비, 교통비를 제외하고 운이 좋으면 겨우 10여 만원 정도 저금을 할 수 있을 정도였고, 회사를 옮기면서 조금씩 급여가 올랐지만,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월세와 식비에 지출되는 비용도 함께 올랐기에 저금을 하기 힘들었다.

 

서울 생활 처음에는 월세를 낼 때마다 난 왜 시골에서 태어났을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살았다면 최소한 월세는 내지 않고 그 돈을 모아서 몫 돈을 모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라고 생각했다. 같은 비정규직이지만 서울에 집이 있는 친구들은 그래도 나보다 여유 있어 보여 부러워하기도 했다.

 

몇 년간의 서울 생활을 하면서 왜 난 시골에서 태어 났을까하는 생각에서 왜 서울만 발전 했을까? 지방 여러 곳들이 함께 발전했다면 일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사람도 적었을 텐데 서울에 사람이 밀집되지 않으니 교통난도 주택난도 지금보다 훨씬 적었을 것인데 내게 힘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서울을 폭발시켜 분산시키고 싶었다.

 

통장의 모든 잔고를 확인하니 약 2,000만원, 지금 사는 방 보증금이 500만원이니 2,500만원이 내 전 재산이다. 몇 년 전 대학 동기가 보험을 한다면서 종합보험이라고 월 15만원 정도의 종합보험에 가입하라고 할 때 가입했어야 했나 아니면 채널 돌리다 나오는 암 보험에라도 가입했어야 했나 암 평균 치료비가 2,000만원 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3기면 수술해도 살 확률이 반반이라던데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본 글들과 광고에서 모델이 떠들던 소리가 계속 맴 돈다.

 

회사는 어떻게 하지? 정규직 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병가는 허락해 줄까? 산재는 혹시 되나? 한번 물어 보기라도 할까? 아니야 위암은 산재가 안 된다는 말을 TV에서 들은 적이 있어 괜히 물었다가 찍히기라도 하면 어쩌지, 병가를 하고 너무 오래 쉬면 회사에서 다시 받아 줄까? 있는 돈 모두 쓰면 치료는 할 수 있을까? 집에는 얘기해야 하나? 아들새끼 살리겠다고 집 팔고 그러면 우리 부모님 노후는 어떻게 하지? 그래 치료했다고 치자 재발도 잘 한다던데 다시 재발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무섭다. 바로 병원에 입원해 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싶지만 치료비 걱정에 그러지도 못한다. 회사에 말하기도 무섭다. 계약직으로 2년여 정도 일 했지만 계약직을 마치면서 계약종료로 퇴사 처리 후 다시 정규직으로 재입사 했기에 서류상 난 이제 4개월 정도 일했는데 퇴사를 하게 되더라도 6개월이 안 되는 관계로 실업급여 수급도 불가능하고 병가를 한다고 하더라도 수입이 전혀 없는 상태에 모아놓은 돈도 없는데 치료 받다가 돈을 다 써버리면 어쩌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 답은 나왔다. 돈이다. 답이 돈이라서 문제다.

 

엄마..”

아들, 밥은 먹었어?”

, 엄마는 먹었어?”

일은 안 힘들고? 엄마는 아까 물 말아서 먹었어.”

“....”

언제 집에 올 거야? 우리 아들 얼굴 보고 싶네. 올 때 전화해라. 우리 아들 좋아하는 강된장하고 호박잎 해 놓을게

, 갈 때 전화할게. 끊을게. 아빠는?”

니 아빠, 또 술 마시러 갔다. 그 놈의 술..”

 

말이 나오지 않는다. 엄마한테 암에 걸렸다고 말이 나오지 않는다. 눈에 보인다. 초등학교 때 언덕에서 굴러서 머리를 다쳤을 때도 기절했던 엄마다. 내가 암에 걸렸다고 하면 분명 기절하신다. 차라리 아빠가 전화를 받았더라면 얘기를 했을 텐데, 엄마가 전화를 받아서 얘기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다. 위로 받고 싶다. 답답해 미치겠다. 휴대폰의 전화번호부 목록을 살펴보았다. 왜 이리 친구가 없을까? 아니 미안해서 전화 걸 친구가 없다.

 

! 니가 무슨 일로 전화를....”,

 

수화기 건너편으로 들리는 목소리에서 난 빈정거림을 느꼈다. 아니 친구는 의도가 없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연락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 내가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잘 지내냐? 제수씨하고 애는 잘 지내고?”

, 애한테 마누라 뺏겼어~ 그래 넌 잘 지내?”

난 뭐 그냥 그래, 언제 한번 봐야지..?”

그래! 근데 그 언제가 언제야?”

내일이라도 시간 되면 보자.”

 

약속 장소에 30분 먼저 도착했다.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친구의 모습이 보인다. 손을 흔들었다. 멀리 보이는 곳에서 손을 흔든다. 한명이 아니다. 세 명이다. 간만에 내 얼굴 본다고 다른 친구들도 호출해서 같이 온 모양이다. 오랜만에 동서남북파 4명이 모였다.

 

대학시절 같았다. 그 시절엔 다들 졸업하면 좋은 회사에 취업해 돈도 많이 벌고 잘 살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한 놈은 대학원으로 도망을 갔고 다른 한 놈은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고 학원가로 도망쳤다. 나와 다른 한 놈은 취업을 했지만 둘 다 비정규직으로 취업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다. 친구는 아직 나에 대해 전혀 모른다. 술을 마시면 안 될 것 같지만 술을 마시진 않고서는 얘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소주 서너 병을 비우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 곧 죽을 것 같다.”,

 

취기가 올라서였을까 너무 극단적인 표현을 한 것 같다.

대뜸 친구 녀석들이 미친 새끼라면서 이구동성으로 내 말에 대답을 했다.

 

위암이래. 의사가 3기라고 하는데, 인터넷하고 TV 보니 수술하면 반반이란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속이 후련한 느낌이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라도 말을 하니 속이 시원하다. 내가 울자 친구들은 그제야 친구들은 상황을 파악했다. 친구 한 놈이 내 앞에 술잔을 뺏었다.

 

미친 새끼 암 걸렸다는 놈이 술은 왜 처 마셔!” / “검사는 제대로 받아 봤어?” / “보험은 들어 놨냐?” / “부모님껜 알렸어?” / “언제부터 그랬는데?” / “, 미친 새끼 진짜...” / “몇 기라고?” / “간만에 보자고 해서 결혼하나 했더니 이게 뭔 소리야.”

 

친구 놈들이 제각각 한마디씩 말하느라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간의 이야기를 했다. 내가 왜 치료를 망설이는지, 무엇을 걱정하는지 그냥 있는 그대로 털어 놨다. 주먹이 날아와서 내 볼에 정확히 꽂혔다.

 

으이고, 이 병신 새끼야. 살겠다는 생각을 해야지, 아픈 새끼가 돈 걱정을 해.”

어쩔 수 없잖아. 돈이 있어야 치료 받잖아. 그래 치료 받았다 치자. 그 다음엔 어쩔 건데 치료비로 얼마 없는 돈 다 날리고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저 새끼 말하는 것 봐! 막말로 니 치료도 안 해 보고 죽으면 니 부모님이나 우리가 받을 상처 생각 안 해 봤어?”

정규직 될 가능성이 10%도 안 되는데 거기에 매달려 만날 야근하고 친구도 제대로 안 만났던 새끼가... 반반이라며 반반이면 50%인데, 그렇게 확률 높은 것엔 왜 안 매달려 이 병신새끼야...”

 

그랬다. 회사에서 비정규직 10명을 뽑으면 2년 안에 정규직이 되는 녀석은 늘 1명 미만 이였다. 많이 봐야 10% 정도만 정규직이 되었고, 나머지는 조금 규모가 작은 회사의 정규직이나 다른 회사 비정규직으로 회사를 옮기곤 했다. 10% 안 되는 확률을 위해서 난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했다. 그런데 50% 정도나 되는 확률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도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모아 놓은 돈을 다 쓰고 완치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 때문이다. 이 돈이 없으면 난 다시 빛이 없는 고시원에서 다시 시작해야하고 치료하느라 회사를 오래 쉬게 되면 다시 취업 전선에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살고자 하는 마음을 잊었다. 그 만큼 고시원 생활과 바로 앞도 보이지 않는 취업시장이 너무 두려웠던 것일까?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집에 전화를 했다. 무뚝뚝한 음성이다. 아빠다. 와락 눈물이 나왔고, 난 아빠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놨다.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저 내일, 니 엄마하고 올라갈게이 한마디 뿐이셨다.

 

눈을 뜨기도 전에 부모님이 오셨다. 엄마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눈물이 나왔지만 겨우 참았다. 부모님과 함께 병원을 찾았고 치료하기로 결정했다. 아빠가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손은 꺼칠했지만 따뜻했다. 오늘 바로 입원하라는 것을 사정을 하고 내일로 미뤘다. 부모님은 고향으로 내려가신다고 하셨다. 엄마만 간단한 짐을 가지고 다시 올라오기로 하셨다.

 

난 회사로 향했다. 치료기간이 얼마가 걸릴지 몰라서 사직서를 내기 위해서였다. 사직은 거부됐다. 장기 병가를 허락해 주었다. 다행이다. 완치되면 돌아갈 곳이 생긴 것이다. 오랫동안 함께 일한 과장님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너무 혹사 시켜 병을 키운 것 아닌지 그래서 미안하다고 한다. 빨리 낫고 다시 회사로 돌아오라고, 그땐 야근 안 시키겠다면서 어깨에 올린 손으로 내 손을 꼭 쥐면서 말씀하셨다. 눈물이 핑 돌았다. 고마웠다.

 

이 병만 완치하면 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혼자 겁에 질려서 돈 걱정, 재발 걱정으로 스스로 불안감만 키웠었는데, 그것이 한 번에 다 날아갔다. 꼭 완치해서 다시 시작하리라 그래서 집도 전세로 옮기고 진급도 하고 취미 생활도 즐기고 여자 친구도 만들어서 결혼도 하리라 생각했다.

 

그때였다. 내 앞으로 큰 트럭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늦었다. 몸이 공중으로 뜨는 것을 느꼈다. 난 회사에 돌아갈 수도 없게 됐고, 취미도 여자 친구도 만들 수 없게 됐다. 병을 발견했을 때 바로 치료에 들어갔다면 오늘 교통사고가 나지 않았겠지, 병신같이 이런 저런 걱정으로 시간만 보내다 겨우 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는데, 이제 암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는데 하필 왜 이때 트럭은 날 향해 돌진한 것인지.

 

어쩌면 난 그저 그렇게 살다가 그저 그렇게 죽을 운명을 타고 났나 보다. 공중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시간이 한 없이 길게 느껴진다. 그리고 또 너무 짧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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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월호를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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