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생각없이 일기쓰듯 쓴 글인데 많이들 봐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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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2004년 겨울
- 이화원, 목욕탕 -
그 해 중국의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제법 왔다.
다음 날 아침 눈은 조금 쌓여 있었지만 많이 춥지는 않았다.
늦은 아침 장선생에게 전화가 왔다.
어제 술을 너무 마셔 금방 일어났는데 별 일 없으면 이화원에 가자고 했다.
우리내외, 장선생 내외, 트래블러 내외 이렇게 6명이서 이화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이화원 역시 교재에 자주 등장하는 명소다.
큰 호수 옆에는 언덕같은 나즈마한 언덕(?) 같은곳이 있는데 눈이 쌓여있는 모습이 제법 보기 좋았다.
이화원 호수를 만들기 위해 파낸 흙을 쌓은것이라는게 장선생의 설명이었다.
나는 도시괴담쯤으로 치부하고 그닥 맛없는 커피만 홀짝였다.
이화원의 물은 한쪽 끝에서부터 수로처럼 어딘가로 이어져 있었는데 그게 꽤나 길게 이어져 있었다.
장선생은 우다코로 가는 길에 있는 하천을 보면서 저게 이화원에서 나오는 물이라고 말했다.
지식을 전해주는 장선생이 고마웠고, 그 긴 도시의 하천을 보고있자니 서태후의 스케일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우다코에 있는 라면과 삼겹살 구이를 파는 식당에 갔다.
가격은 꽤 비싼편이었지만 이정도 음식이라면 여기도 살만하다고 느꼈다.
(그 때는 아직 중국음식에 적응이 잘 안됐거든요)
밥을 먹고 피씨방에 가서 처음보는 '윈도우2000'이 깔린 컴퓨터로 스타를 몇판하고
우다코역 교차로 지하에 있는 목욕탕으로 갔다.
우리는 모처럼 외국에서 말끔하게 목욕재개를 했고 상쾌한 마음으로 목욕탕을 나서는 길이었다.
아마 후불이었건 것 같다. 금액이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는데 요금이 둘이합해서 130원인가 정도였다.
계산원은 "이바이 싼" 이라 말하고 장선생은 "yi"를 2로 듣고 300원을 주고 70원을 거슬러 받았나보다.
나오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돈을 잘못준것 같다며 돌아갔다.
아직 중국어가 서툴던 장선생을 대신해 내가 어찌어찌 설명을 했다.
당연 계산원은 200원을 받았다고 말했고, 장선생은 300원을 줬다고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계산원은 굉장히 불쾌한 표정으로 포스기(돈통) 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말만 빠르게 계속 했다.
서로에게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CCTV 얘기를 하는 장선생에게 여기는 외국이라 우리가 약자이고 본인의 실수도 어느정도 있으니
이쯤에서 돌아가는게 낫겠다는 의견을 모아 거기서 빠져나왔다.
목욕탕에서 나온 우리는 윗층에 있는 당구장에 갔다. 그 건물은 마치 만능엔터테이너 같았다.
4구를 쳤다. 초구에 우라마시를 치는 장선생에게 거칠게 항의를 했지만 지역에 따른 룰의 차이를 인정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의 장선생의 표정은 한결 나아보여 마음이 편해졌다.
그 후 장선생은 1과2, yi 와 er은 결코 헷갈리지 않을 사람이 되었다.
6개월 후의 장선생은 마치 현지인 수준의 말솜씨와 외모를 갖추게 되는데...
- 2층 버스 -
북경의 버스는 특이했다. 2층버스가 많았으며, 일반 버스를 2대 붙여놓은 버스가 주류였다.
도로를 달리는 2량짜리 기차를 생각하면 된다.
버스를 타면 승무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돈을 주고 표를 사면 티켓에다 동그라미를 쳐서 줬다.
어릴때 버스타면 "오라이" 외치던 이모역할이랑 비슷했다. 아마 기사분의 아내로 추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북경의 버스는 늘 사람이 많았다. 오전 11시 정도면 사람이 없을법도 한데 늘 사람이 많았다.
버스비는 1원이었고, 어느정도의 거리가 넘어가면 2원을 받았다. 거리 측정을 하는 기준은 알 수 없었고, 우리는 그냥 달라는대로 줬다.
2층 버스는 가격이 1원 더 비쌌다. 어느날 룸메가 기분 좀 내보자며 일부러 더 기다려 2층 버스를 탔다.
2층에 올라가기는 굉장히 불편했으며 좌석의 승차감은 완전 엉망이었다.
얼마 후 엉덩이의 불편함을 호소하는 내게 버스타면서 무슨 승차감을 찾냐며 면박을 주던 룸메도 곧 불편함을 호소했다.
우리는 그냥 1층으로 내려왔다. 돈 더 주고 더 불편함을 샀다며 우리는 사서 고생했다고 웃었다.
그리고 다시는 2층버스를 타지 않았다.
- 우다코 -
일명 오도구. 북경에 있던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은 가본 곳이다.
그리 길지 않는 도로에는 한국어로 된 간판들이 제법 많았다.
어언대학교, 삼림대학이 좁은 도로를 마주보고 있었고 근처에는 청화대와 북경대도 있다.
대학교 특성상 유학생들이 상당수 있다. 특히 어언대학교는 언어를 배우러 오는 학생들이 많았기에 우리같은 외국인이 많았다.
우리는 익숙한 곳을 찾다보니 자주 우다코를 찾게 되었고, 금세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을 구별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곳은 마치 작은 한국 같았다. PC방, 당구장, 사우나, 한국마트, 노래방, 삼겹살 집 등 우리가 원하는게 다 있었다.
마트에서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사서 뽀글이를 해먹는 날은 너무 좋았다.
담배도 있었는데 매일 쭝난하이에 찌들어 있다가 타임을 피는 날은 너무 좋았다.
한번은 분명 '듀티프리'라고 써있는 에쎄를 샀는데 맛이 이상한 경우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독한 중국담배에 비하면 좋았다.
어언대 앞에는 사설 환전소가 있었다. 하루는 지나가다 돈이 좀 급해 300원 정도만 좀 바꿀까싶어 들렀다.
은행보다 환율이 쌌다. 옆에 있던 일행이 말렸다.
안그래도 위조지폐가 많아서 택시나 마트등에서도 100원짜리는 항상 위조임을 확인하는 나라에서, 게다가 은행도 아닌데 뭘 믿고 노점에서 환전하냐고 했다. 그의 조언에 감사했다.
많은 유학생들이 거기서 공부를 하고, 필요한 물품을 사고, 식사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유흥도 즐겼다.
북경의 이방인 한국인 유학생들의 마음의 고향, 우다코
- 장관의 딸 -
아랍인 여학생이 있었다. 중동지역인데 피부색이 흰색에 가까웠다.
글을 쓰는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꼬불꼬불 그림을 그린다. 신기했다.
룸메의 말로는 중동국가 모부처 장관의 딸이라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맥도날드를 좋아해서 가끔 같이 갔다. 한국에서 선생님 하시다가 잠시 휴직을 하시고 공부하러 중국에 오신 누님이 계셨는데 그 누님과 참 친하게 지냈다.
하루는 어디 다녀오는데 그 여학생이 고급 세단에서 내리는 걸 봤다.
늘 같이 버스만 타고다니다가 그런 모습을 보니 낯설었다.
듣기로는 여학생 아버지가 공무로 중국을 방문했는데 내가 있던 대학 총장과 만남이 있던 날이라고 했다.
자기는 내가 있던 학교에 있었고 남동생은 다른 학교에 있다고 했다.
주말이면 어학원 앞에 대기하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갔다가 일요일에 왔다.
다른건 차치하고 아랍어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아무리 봐도 그림인데 그거 보고 막 웃는다.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그녀를 파샤오지에라고 불렀다.
그리고 2005년 여름, 그녀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가끔 국제뉴스에 내전과 난민문제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그녀가 생각이 난다.
- 자금성 -
고궁이라 부르는 곳. 천안문광장에 있는 모택동 사진 밑의 문으로 들어가면 나왔다.
입구에 매표소가 있다. 요금은 꽤나 다양하게 차등화가 되어있었다.
외국인은 내국인보다 저렴했다. 훨씬.
우리는 외모가 중국인과 비슷해 중국인으로 오해를 받아 할인을 못 받을까 걱정을 했다.
한 누나가 좋은 제안을 했다. 매표소 직원이 뭐라뭐라하면 모른다는 척을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팅부동~~" 하면 중국 사람처럼 보일수도 있으니 "뿌팅동~~" 하면 십중팔구 외국인으로 본다는 실로 대단한 논리였다.
우리는 그 누나의 혜안에 감탄을 했고 연습까지 해서 매표소로 갔다.
나는 연습한대로 연신 "뿌팅동~"을 외쳐댔으나 매표소 직원은 그렇게는 외국인 할인 적용이 안된다고 했다.
그걸 또 알아듣고 반응을 했으니 매표소직원의 눈에는 내가 얼마나 하찮게 보였을지 짐작도 안간다.
갑자기 그 누나는 뒤에서 지켜보다가 여권사본을 내밀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여권 사본을 내밀었다. 외국인 할인을 받았다.
오~~역시 누나 쵝오!!를 외치며 우리는 자금성안으로 입장했다.
자금성은 실로 대단했다. 서울에 있는 경복궁등을 가보진 못했지만 티비에서 보던 우리나라의 궁궐과는 크기가 달랐다.
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건물이 있고 정면에는 더 큰 건물과 게이트가 있었다.
큰 게이트를 지나 다음 광장으로 건너가면 아까와 같은 광장이 또 나오고를 계속 반복했다.
그리고 건물들은 비슷하면하면서도 미묘하게 다 달랐다.
마치 BMW가 앞모습은 다 비슷한 듯 하지만 1,2,3,4,5,6,7 시리즈가 미묘하게 달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것 처럼 자금성도 그랬다.
추운 겨울이고 해가 빨리 떨어지는 시즌이라 사람들이 많이는 없었다. 간간히 태극권을 하는 사람도 보였다.
그렇게 자금성의 끝 문을 나서니 동네뒷산정도되는 언덕이 있었다.
거기가 무슨 공원이었는데 올라가서 보니 자금성이 한 눈에 들어왔다.
거짓말 좀 보태면 우리동네 정도의 크기였다. 저길 가로질러 왔다는 사실에 나 자신이 뿌듯해질 지경이었다.
대륙의 스케일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나는 그 날 이후 학벌에 대한 색안경을 벗었다.
- 귀국 -
중국생활도 4주가 지나면서 정말 따분했다.
룸메는 다른 통쉐들과 밖에 다니는걸 좋아했고 일요일은 교회를 갔으니 무료했다.
누가 뭐라하는 사람이 없고 꼭 해야 할 일이 없었기에 너무 나태해지는 것도 싫었다.
노는것도 옆에서 누가 자꾸 말려줘야 재밌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평생 쉴 것을 6주만에 다 쉰 나는 기분좋게 돌아왔다.
그러나 마지막 2주의 무료함때문에 다시 가고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한국에서 개강을 준비하면서 남은 방학을 보냈다.
2004년의 중국의 겨울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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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진짜 시간이 많이 걸리네요
아직 쓸 거 더 있는데 힘들어요 ㅠㅠ;;
워낙 오래된 일이라 기억나는게 많이 없네요
- 2005년의 봄학기 -
개강을 하면서 본의 아니게 단과대학 학생회 간부를 맡게 되었다.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 월중 달력판은 한달 내내 스케쥴이 차 있었다.
강의, 시험, 실습, 단대 행사, 과행사, 농활, 조모임, 학원등 기억은 잘 안나는데 심지어 주말까지 스케쥴이 있었다.
평생 쉴 것을 지난 겨울방학 때 너무 쉬어서 그런지 모든 일이 동시에 몰려오는 듯 했다.
행사를 하며 타 단대와 안면을 트고 지내니 학생식당에라도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인사를 해왔다.
그리고 인사를 했다. 나는 고마웠지만 너무 힘들었다.
기말고사가 다가올 즈음 너무 쉬고 싶어 다시 학원 원장님께 그 때 어학원 문의를 드렸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후 나는 또다시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위해 공항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