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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백일장]파뿌리 배우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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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랫파이
추천 : 2
조회수 : 424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8/13 00:3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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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활동 하면서 알아낸 사실인데, 독서는 치매를 예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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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피스 생활을 한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살아온 인생의 아름다운 정리를 도와준다는 사명으로 철없이 지원했던 젊었을 적의 내가 20년 후 병원의 한 축을 담당하는 어엿한 팀장이 된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놀랄까. 그동안 참 많은 분들이 여기에서 자신들의 끝을 매듭지었다. 좋으신 분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었지만, 이렇게 혼자 있을 때면 이유없이 나의 기억을 비집고 나오는 두 분이 계시다. 이건 그 분들의 이야기이다.

 

, 안 먹어 이 여편네야! 벚꽃이나 봤으면 이제 갈 채비를 해야지 왜 마냥 죽치고 앉았어!”

아니, 여기까지 와서 왜 이렇게 분위기를 깨고 그러우? 봄꽃이 좋다며 나보고 가자고 한 사람이 누군데 자꾸 보채구 그래요?!”

 

내가 처음 본 그 부부의 모습은 대강 이러했다. 수북이 쌓여진 일기들과 병원 밥을 사이에 두고 마치 벚꽃나무 아래에 있는 것 마냥 행세하며, 또 그곳에서 벚꽃놀이를 하며 사이좋게 논다면 모를까 티격태격 싸우기까지 하는 부부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선생님 저게 대체.......?”

? 우리도 친구나 부부끼리 여행 가다보면 자주 싸우곤 하잖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표정을 짓는 담당 선생님의 얼굴을 보며 나는 이 인간이 나를 놀려먹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선생님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저 할머니, 알츠하이머야. 쉽게 말해 치매지. 그런데 다른 치매 환자들과는 조금 달라. 저 할머니는 과거 속의 기억을 지금 일어나는 현실로 인식하고 계셔. 유아퇴행의 일종이지만 글쎄, 그 퇴행의 정도가 들쑥날쑥하다고나 할까? 어떤 때는 아기 때로 갈 때도 있고, 어느 때는 애 둘을 낳아 키우는 30대 아줌마, 어떤 때는 꽃 같은 낭랑 18세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지. 의학적으로 굉장히 희귀한 케이스야.”

그럼, 저기 할아버지는 왜 할머니와 같이 맞장구를 치는거죠?”

그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야. 할머니는 자신이 기억한 과거와 현재가 다르면 정신이 무너져서 발작을 일으키셔. 그래서 간호하시는 남편 분이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서 최대한 아내의 기억 속 과거의 자신을 연기하고 계시지. 다행히 두 분이 소꿉친구였고, 할아버지가 젊었을 적부터 일기를 쭉 써오셔서 재현은 충실하게 되긴 돼.”

 

나는 멍하니 두 분을 바라보았다. 이제 할아버지는 어디서 팥빙수를 구해 오셔서 아내 분과 먹기 시작했다.

여편네 자꾸 팥빙수 팥빙수라고 노래를 불러 쌌으니 팔빙수 장수가 얼씨구나 하고 얼음가루 바리바리 싸들고 왔잖어! 팥빙수 가꼬 왔응게 얼른 먹기나 혀!”

어이구 참 내, 저으기 큰길에 빙수 가게는 어찌 알아보고 갔다왔수? 암튼 고맙구랴.”

어때, 최 간호사? 저 분들 보다보면 심심하진 않을 거야.”

선생님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나는 할머니의 호스피스를 맡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워낙에 할머니를 잘 돌봐주셨던 것도 있었지만, 처음엔 굉장히 무뚝뚝하셔서 나에겐 필요한 물품들을 부탁하는 것 외엔 따로 날 호출하거나 하는 법이 없으셨다. 물론 그 후에도 두 분의 연극은 끝나지 않았다. 임신 중에 할아버지가 딸기를 안 사줬다고 삐진다던가, 도박과 보증으로 가진 돈을 몽땅 날려서 주저앉고 엉엉 우는 할머니에게 남자는 써야 할 때 써야한다며 폭언을 퍼붓는 할아버지라던가, 책 속에 다방 명함과 비상금이 들어있는 봉투를 들켜 두 시간동안 이건 내가 가질것이라느니 서방이 돈 쓰는게 뭐가 어떻다고 그러냐느니 하면서 병원이 떠나가라 싸운다던가, 남편의 와이셔츠에 립스틱 자국이 묻어서 또 한바탕 싸운다던가(립스틱 자국은 내가 묻혀 주었다. 비상금 사건 이후 할머니가 자꾸 할아버지를 의심하기 시작해서 할아버지가 , 그게 그 때였구나.......’라고 한탄한 뒤 나에게 부탁했다. 할아버지는 끝내 그 때 진짜 립스틱 자국은 어떻게 난 건지 말씀해주지 않았다) 하는, 어째 잘 넘어가는 기억들보다 할아버지 때문에 싸운 기억들이 더 많았었던 것 같다.

 

거기다가 할아버지 자신의 과거 치부들을 미화 없이 낱낱이 까발리는 수준급(?) 연기와, 막장드라마라면 모를까 이 연극은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터에 주위에서도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해 어느새 병원 내 할아버지의 타이틀은 젊었을 적 아내 가슴에 못질한 못된 남편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니깐, 방 간호사. 얼마나 할머니가 소싯적 가슴속에 한이 쌓였으면 치매 끼를 구실로 저렇게 괴롭힐 수 있냐고.”

내 말이. 남자들은 젊었을 적에 아내에게 잘 해줘야 돼, 그래야 늙어서 뼛국이나 얻어먹지. 선생님도 마찬가지에요. 만날 회식자리 룸싸롱 좋다고 가지 말고 집에도 들르고 그러시라고요.”

여자 간호사들은 할아버지가 수다의 주제로 오르면 너나할 것 없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고, 남자 선생님들은 할아버지를 보고 나서는 퇴근할 때 괜히 꽃다발을 하나씩 품에 안고 집 초인종을 누르곤 했다.

 

당시 내가 할아버지를 보는 시각도 그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모르는 척 해주었지만 때때로 나도 곁눈질로 두 분의 드라마를 감상하는 시청자가 되어 할아버지가 못되게 굴면 정말로 할아버지에게 짜증이 치솟았고, 가끔가다 당하는 모습을 보면 속이 다 후련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게다가 할아버지가 워낙 무뚝뚝하셔서 말도 없으신 까닭에 나와 할아버지의 관계는 호스피스와 간병인의 사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서먹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당직 근무일이 되어 늦게까지 병원에 남아있게 되었다. 내일 할 일들도 계획하고 차트까지 말끔히 정리하자 시간은 벌써 자정을 가리키려 하고 있었다. 졸음을 쫒으려 1층 로비로 간 나는 그곳에서 역시 캔 커피를 뽑아 먹으려는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 안녕하세요

으응? , 우리 임자 담당하는 처자구만. 커피 하나 자실라오?”

 

나는 할아버지가 뽑아준 커피를 잡고 망연자실 어색하게 앉아있었고, 그 맞은편에서 천천히 커피를 드시던 할아버지는 맨 먼저 말을 꺼내셨다.

우리 부부 담당이어서 많이 힘드시지요?”

, 아니에요. 할아버지께서 워낙 할머니를 잘 돌봐주셔서 오히려 제가 하는 일이 없는걸요, 하하하...”

물론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았다.

 

허허, 저는 다만 늙은이가 자기 안사람에게 나쁜 짓거리들만 골라 한 인생을 보여주기만 해서 부끄러울 뿐이라오.”

... , 그건......”

의외의 직설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맞습니다, 그동안 간호사님이 보신 것들은 모두 진실이오. 집사람이 가진 나에 대한 기억들이 그런 것들뿐인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아직까진 집사람이 다른 치매 증세는 보이진 않고 오로지 유아...퇴행인가? 그것만 반복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집사람이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시대의 인생을 같이 살아주는 것 밖에는 없지요. 사실 처음엔 이런 생각으로 했지만, 하다 보니 내 자신이 임자에게 너무나도 못 해준 것들 밖에 생각나지 뭡니까. , 이럴 땐 이렇게 해줬어야 했는데, 저렇게 하니까 아내가 힘들었던 건데.......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제가 젊었을 적과는 다르게 따뜻이 대해준다면 대번에 집사람이 쓰러질 텐데... 젊었을 적 흉내 낼 땐 할멈에게 폭언을 하면서 속으로는 얼마나 죄스럽고 후회를 하는지 모른다오. ,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행복한 추억들을 많이 가질 걸....... 부끄럽지만 지금 실컷 할 수 있도록 젊었을 땐 사랑한다는 말도 좀 더 자주 할 걸.......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마음이란.........”

 

할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으셨던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어깨를 들썩거리셨다. 캔 커피를 꽉 쥔 손에 물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집사람이 처음 치매 판정을 받던 날, 나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다오. 아니지, 정확히 말해 하늘이 나에게 천벌을 내린 줄 알았지. 그동안....... 몹쓸 나 하나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말년까지 이런 꼴로 가다니....... 우리 지, 집사람이 너무나도 불쌍....하지 않소? ......, 나는 너무 괴로웠습니다. 천벌을 내리려면 차라리 잘못이 있는 나에게 내릴 것이지 왜 우리 불쌍한 아내에게....... 그렇게 고생한 사람에게....... 미안하오, 늙은이의 몹쓸 추태를 이해.......해주구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보. 이젠 이 포니 그만 팔아 치웁시다. 아니, 지금 신문에선 마이카 시대다 뭐다 하는데 이참에 그렌쟈로 바꾸자고요. 이게 뭐에요, 좁아갔고 우리가족 다 들어가면 찢어지것구만.”

이 여편네가 그렌쟈 한 대가 얼만지 알기나 해? 거 쓸데없는 소리 하지나 말고 좀만 더 낑겨 앉아봐, 충분히 우리 가족 다 앉을 수 있응게.”

아니, 애들이 커 가는데 아직도 쬐끄만 차로 덜덜거릴 거유? 아님 그렌쟈는 아직꺼정 스틱밖에 없다 하는디, 당신 혹시 스틱 못 모는 거 아녀요?”

이 여편네가 뭐가 어쩌고 저째!”

다음 날, 병원 침대를 포니삼아 평소와 변함없이 투닥투닥 거리는 두 분을 봤지만, 왠지 모르게 그전과는 다른 기분을 느꼈다. 뭔가, 더욱 정겨운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다른 동료들은 이렇게 말하는 날 보고 무슨 소리냐며 반문했지만, 어쨌든 그때부터 난 두 사람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기 시작했다.

 

그 후엔 할아버지도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시기 시작했고, 가끔이지만 나에게 배역을 맡겨주실 때도 있었다(주로 후배 회사원 A, 다방 마담 B, 같은 배역 이였지만...) 나와 친해지고 말도 많이 하시기 시작해서 그런지 다른 동료들도 하나 둘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나의 필사적인 할아버지의 변호에 힘입어 며칠 뒤엔 자연히 할아버지에 대한 뒷담화도 사라졌다.

 

사건은 그 때 터졌다. 저녁의 일과를 모두 마친 후 홀가분한 기분으로 복도에 나선 나는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찢어지는 괴성에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할머니가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한 채 믿기지 않는 속도로 병원 복도를 이리저리 들쑤시고 있었다.

 

최 간호사! 잡아! 발작이야!”

담당 선생님의 고함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온 몸을 날려 할머니의 허리를 그러안고 그대로 땅바닥에 넘어졌다. 할머니는 넘어지면서도 필사적으로 나에게서 벗어나고자 이리저리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내 눈엔 황급히 뛰어오는 선생님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어디 계시죠! 설마 연기와 기억이 맞지 않은 거예요?!”

아니야! 할아버지가 잠깐 나가신 사이에 갑자기 저런 거야! 악화 증상일지도 모르니까 꽉 붙잡아!”

이 말을 남긴 채 의사 선생님은 진정제가 담긴 주사를 만들기 시작했고,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할머니를 붙잡을 수 밖에 없었다. 처음 발작환자를 본 것도 있었지만, 그때 할머니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 어떻게든 날 할퀴고 깨물어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모습이 정말이지 한 마리의 야수 같아서였다. 이 한바탕 소란에 주위 사람들이 웅성웅성 몰려들었고, 자리를 비운 할아버지도 급하게 뛰어 오셨다.

 

,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선생님!”

발작입니다. 다치실 수도 있으니까 뒤로 물러나 주세요!”

 

그 때였다. 할아버지를 본 할머니가 다시 한번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가며 할아버지를 불렀다.

! 아아!!! 아아아아악!!!!! 현수 오라버니!!!! 살려주어!!!!! 빨치산이 날 끌고 가!!!!!! 살려줘!!!!! 오빠!!!!!! 꺄아아아아악!!!!!”

이 예상치 못한 말에 나와 선생님, 할아버지는 멍하니 1초가량 서있었다.

 

선생님, 간호사님, 정말로 미안합니다.”

? 라는 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내 몸은 이미 붕 떠서 땅바닥에 털썩 내팽개쳐졌다. 도저히 노인의 힘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얼굴을 찡그린 채 뒷목과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난 나와 선생님이 무슨 짓이냐고 미처 항의하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전에 없던 괴성을 지르며 엄지와 검지로 총 모양을 만들어 들이댄 채 우리 둘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꼼짝 마! 이 씨부럴 빨갱이 새끼덜! 움직이면 아주 그냥 너덜이랑 나랑 다 뒤지는 거여! 이 씨벌, 벗겨먹을 년이 없어서 우리 지화를 벗겨먹으려 들어!”

선생님과 나 모두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동안 할아버지는 필사적으로 눈짓, 손짓, 발짓 다 동원해가며 우리에게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인지시켜 주었다.

 

요컨대 할머니의 정신은 12살 한국전쟁 때로 돌아갔고, 북한군에게 잡혀 끌려갈 상황에 당시 15세였던 할아버지에게 구출을 받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이 급박한 전쟁 영화에 선생님과 나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은 크게 반으로 나뉘어 북한군과 국군이란 배역이 정해진 듯 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가락으로 따발총을 만든 뒤 두두두두두두두두...’소리를 입으로 내면서 서로를 향해 총질을 하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들도, 간호사들도, 환자들도, 간병인들도 모두 입으로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소리를 내면서 태극기 휘날리며를 찍었고, 개중에 리얼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고맙게도 쓰러져 죽는 역할을 마다않고 해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전장의 한복판에 있는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할아버지를 꼭 그러안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어윽, 어엉 엉, , 오라버니야, , 너무 무섭다. 처음엔 황군이 우리 어머니랑 언니를 끌고가더니, 엉 어엉, 끄어엉, 해방이 되니까 빨치산이 우리 아버지 죽이고 나도 끌고 가려고 한다. 끄윽, , 오빠야, 나 너무 무섭다. 너무 무섭다.”

괜찮다. 괜찮다. 오라버니가 여기 있다. 느이 아버지가 나한테 널 맡기고 가셨다. 참말이다. 이제는 오라버니가 옆에 있어줄게, 계속 여기 있어줄게. 울지 마라. 우리 이쁜 지화는 웃는 게 더 예쁘다. 울지 마라.”

마치 아기를 달래듯 펑펑 우는 할머니를 달래며 할아버지는 조근조근 할머니의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입으로 내는 총성이 빗발치는 순간에,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꼭 안아주고 있었다.

 

절대로 잊지 못 할 것 같은 그 순간, 선생님이 내게 다가와 한마디 하셨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최 간호사, 자네 이미 많이 맞았지 않은가, 이제 그만 쓰러지게.”

아마도 이 영화가 꽤 마음에 드셨던 것 같다.

 

그 사건 이후, 할머니의 병세는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여전히 온전한 정신은 찾지 못하시지만,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부부싸움 같은 거친 기억들보단 서로의 소년소녀 시절 같은 풋풋한 때로 많이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셨다.

흐음, 아마도 할아버지와의 관계가 상당히 발전됨에 따라 정서적으로도 많이 안정이 되셔서 그런 거겠지. 확실히 괄목할만한 수치임엔 틀림없어

어디서 맞고 오셨는지 시퍼렇게 부은 멍을 왼쪽 눈에 매달고 나타난 선생님은 나의 질문을 약간 경계하면서 답해주셨다.

 

아니 왠 빵이여?”

아이, 뭐것어, 우리 오라방 생일인게 그르제. 밤도 늦었는디 집 가다 뚝빵에 빠지기 전에 빨리 앞장서서 가 얼렁

그렇게 햇살이 쨍쨍 비치는 여름 밤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청춘의 풋가슴을 안고 단 둘이 뚝방길을 걸어갔다. 물론 현실에선 앞뜰에 나온 두 사람 뒤에서 나와 선생님도 동행했지만.

...그 저거 달이 참으로 이쁘다야

할아버지가 쑥스러운 듯 손가락으로 태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르게, 뚝빵엔 안 빠지것어.”

할머니는 여전히 신나게 걸으면서 답했다

 

.... 지화도 저 달마냥 아주 이쁘고 막 그러네

얼굴이 빨개진 할아버지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리셨다.

그래, 마침내 이 때가 왔다. 나와 선생님은 마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아이들마냥 완전 신난 얼굴로 그 상황을 지켜봤다.

? 진짜? 오라방은 지화가 그렇게 이쁜가?”

.......... 괜찮다면 색시로도 삼고 싶구만

왔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

히히, 지화는 그렇게 말해주는 오빠를 참말로 좋아하는 거 있지

떴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라고 생각한 순간

지화는 오라방도 좋고, 오라방 아줌마도 아저씨도 좋고, 오라방 동생도 좋고 선생님도 좋고 정우도 좋고 다 좋은게!”

.......이해하자, 저 때는 순수의 시대였으니.

근데 정우는 누구여?”

우리 반 짝꿍.”

만나지 말어.”

?”

그놈 아주 성깔이 못된 놈이여.”

정우 보지도 않았음서, 그리고 짝꿍이라니께! 짝꿍은 옆자리에 앉는거 몰러?”

 

어느 날에는 할아버지께서 전축과 LP판을 집에서 가지고 오셨다.

여보, 이거 봐봐. 쩌그 쎄씨봉이란 데서 LP판 하나 구했으! 당신이 좋아하는 이브 짜리몽땅인가 뭔가 하는 가수 있잖여, 그 사람이 부른 거라더만.”

참말이어요? 워메, 그 귀한 걸 어찌 구했디야?”

저 그 뭐시냐 가나다라 뭐시기함서 노래부르는 요상한 젊은이한테 이불몽땅 얘길 하더만 단번에 하나 주데.”

오메, 그 청년 나중에 크게 되것구마. 아 여보 뭐혀요, 얼른 틀지 않구서.”

아이 알았어, 거참 보채기는.”

 

오래된 LP판에 바늘이 얹혀지자 신기하게도 그곳에서 음악이 잔잔히 퍼졌다.

오오, 이브 몽탕의 Les Feuilles Mortes이군.”

내 옆에 있던 선생님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이 노래를 아세요?”

그렇게 의외라고 쳐다보지 말게, 나도 꽤 분위기 있는 남자라고. 아마도 자네한텐 The Falling leaves로 잘 알고 있을 노래겠구만.”

모르겠는데요.”

“......”

 

그러거나 말거나 두 노부부는 음악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여보 이런 노래는 춤을 춰야 혀요. 왈츠로다가!”

? 당신 왈츠가 뭔진 알어?”

아유 왈츠가 뭐 별거여요? 그냥 남녀가 딱 붙어서 추면 왈츠지!”

 

Oh, je voudrais tant que tu te souviennes

Des jours heureux ou nous etions amis

En ce temps la, la vie etait plus belle

Et le soleil plus brulant qu`aujourd`hui

 

우리 아저씨 너무 잘 추는 것 같은디? 이거 동교동 정 마담 작품 아녀?”

뭔 실없는 소리를 해쌌어, 순전히 나의 재능 이겄지.”

할아버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기억이 돌아올까 봐 미리 왈츠를 배워 두었다만,”

? 당신 뭐라고 했씨요?”

? , 아니여. 아무것도.”

 

Les feuilles mortes se ramassent a la pelle

Tu vois, je n`ai pas oublie

Les feuilles mortes se ramassent a la pelle

Les souvenirs et les regrets aussi

Et le vent du nord les emporte

Dans la nuit froide de l`oubli

Tu vois, je n`ai pas oublie

La chanson que tu me chantais

 

“......임자.”

왜요?”

“.......미안하오, 좀 더 이런 시간을 많이 가졌어야 했는데. 당신과 같이 있었던 시간, 좀 더 있었으면 좋았을걸.

 

C`est une chanson qui nous ressemble

Toi tu m`aimes et je t`aimais

Nous vivions tous les doux ensemble

Toi qui m`aimes, moi qui t`aimes

 

아이, 무슨 걱정이어요, 지금부터 많이많이 가지면 되는 것을.”

? , 그런가, 임자?”

그래요, 이렇게 당신이랑 나랑 단둘이 행복한 순간을 많이 만들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 그렇지...... 당연히.... 당연히 만들어야지....... 임자랑........”

 

Mais la vie separe ceux qui s`aiment

Tous doucement sans faire de bruit

Et la mer efface sur le sable

les pas des amants desunis

 

노래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따뜻이 안아주는 할머니와 조금씩 울고 있었던 할아버지는 계속, 그렇게 서 있었다.

 

그렇게 선생님도 나도 할아버지도 할머니가 언젠가는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할머니의 건강이 실제로 많이 좋아지신데다가 안정된 정서가 계속 유지되다 보니 이제는 제법 최근의 과거도 기억하실 정도였던 터라 우리의 기대는 더욱 높아져만 갔다.

그렇게, 그 날이 다가왔다.

 

간호사 아가씨, 여기가 어디지요?”

과일을 깎아주던 도중, 맛나게 사과를 드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대뜸 나에게 물었다.

“!!!!!”

나는 충격에 빠져 깎던 사과를 떨어뜨렸다. 과거를 사시던 할머니가 현재의 나를 간호사 아가씨라고 불러주었다. 그 말인즉슨, 할머니가 제대로 정상적인 사고회로에 도달했다는 말 이었다!

 

“......알 것 같군요, 여기가 어딘지,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할머니가 대답했다.

...저기 할머니.......? 괜찮으시다면 흥분하지 말아주시고요, 할아버지 불러드릴테니 조금만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

여기는 호스피스 병동이고 당신은 호스피스지요. 내가 여기있는 이유는 아마 내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겠죠?”

, 아니 저.... 그게....... , 그렇습니다.”

나는 당황했지만 곧 차분히 할머니께 답했다. 여기는 호스피스 병원, 모든 환자는 자신의 죽음을 알 권리가 있었고, 그것을 맞을 준비를 도와주는 것이 우리들인 것이다.

 

“......그렇군요. 솔직해 답해줘서 고마워요.” 할머니는 옆에 수북히 쌓여있는 일기를 보았다. “이 일기.... 우리 바깥양반이 매일같이 쓰던 건데.... 아마도 내 증상은 이 일기와 연관이 있는 거겠죠?”

, 네에...... 할머니는 그동안 과거 속에서 사셨습니다. 과거 기억의 편린을 현재로 인식해서 받아들이셨죠. 그 기억과 현재가 맞지 않으면 바로 발작을 하고 증상이 악화되어서 할아버님은 그동안 할머니가 인식한 과거에 맞춰 과거의 할아버지를 연기하면서 사셨습니다.”

호호호호.... 하긴 그 냥반, 탈춤이나 꼭두각시 같은 잡기들은 참 잘했지요. 어릴 적에 말뚝이 가면을 쓰고 시침 뚝 떼면서 탈놀이를 하는데 어찌도 그리 배꼽을 잡았는지...”

,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금방 할아버지를....”

내가 방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 할머니가 멈춰 달라는 손짓을 하셨다.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 고생시킨 우리 아저씨 얼굴을 보는 것도 염치에 안 맞는 행동인 것 같아요. 아가씨, 대신 이 말을 전해 주겠어요?”

그러면서 할머니는 나에게 어떤 한 마디를 말해 주셨다.

 

할아버지이이이이이! 할아버지이이이이이이!”

다음으로 기억나는 것은 마치 미친년처럼 온 병동을 휘저으며 할아버지를 부르는 도중이었다.

아니, 왜 그러오? 무슨 일 있시요?”

할머니를 위해 메로나를 사오던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 나에게 다가왔다.

할머니가! 할머니가!”

나는 이 한 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아이스크림은 땅에 떨어져 녹아 웅덩이가 되었지만, 할아버지에겐 그 긴 시간도 찰나로 느껴졌다.

 

어이고오...... 어이고오......”

상주를 맡고 있는 할아버지의 큰 아들이 곡소리를 하고 있었다. 딸은 음식을 바삐 해가며 들어온 손님들을 맞고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할아버지, 뭐라도 드세요. 이럴 때일수록 할아버지가 기운을 내셔야죠.”

호스피스 병동은 담당하는 환자가 돌아가셨을 때 일부러 비번을 내어 장례식장을 찾아가는 문화가 있었다. 나도 그래서 비번을 얻어 할아버지를 찾아갔지만, 단 이틀 만에 할아버지는 삶의 의욕을 포기하신 듯 너무나도 퀭한 얼굴을 하고 계셨다.

 

“......와줘서 고마우이.”

그날 할아버지가 나에게 해주신 말은 이 한마디뿐이었다.

 

다음 날, 할아버지가 병동으로 찾아오셨다. 용건은 아직 수북이 쌓여있는 할아버지의 일기들을 치우는 일이었다.

할아버지, 제가 같이 도와드릴게요.”

“......매번 고맙구먼...”

그렇게 모든 일기를 차에 싣고 할아버지가 말했다.

간호사님, 괜찮으면 이것도 부탁해도 될까?”

? 뭔데요?”

 

차를 몰고 할아버지와 내가 도착한 곳은 넓게 펼쳐진 모래밭이었다.

이곳이라면 일기들을 태워도 산불이 날 염려가 없지.”

? 일기를 태우시겠다고요?”

깜짝 놀라 묻는 나에게 할아버지는 천천히 대답해주었다.

이정도 살았으면 때때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나 기억도 있는 법이라오. 게다가, 이렇게 태우면 하늘에 있는 할멈에게 갈테니 언젠가 나도 갔을 때 같이 볼 수도 있겠지.”

할아버지.......”

이런 나를 뒤로 한 채, 할아버지는 조용히 품안에서 성냥을 꺼내 책더미에 불을 붙였다.

 

하늘 높이 치솟은 불길은 그 형태를 탈피하여 연기가 되고, 탈피에 필요없는 찌꺼기들은 하얀 재가 되어 눈처럼 모래밭을 살며시 덮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남기신 말이 있어요.”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떨어지는 눈들을 바라보며,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좋았던 기억도, 싫었던 기억도, 당신과 함께 한 인생이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할아버지는 뒤돌아서서 아직도 타고있는 불꽃을 바라봤다.

 

망할 여편네, 망할.......망할 여편네........”

 

잿가루가 눈에 들어갔는지, 할아버지의 눈엔 눈물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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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아직 세월호를 잊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죽음들이 이어지는 시대입니다. 부디 그 아이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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