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10월 28일을 목전에둔, 1992년 9월 11일. 부산에 거주하는 32세 여자가 경상남도 마산의 고압선 철탑에 나일론 끈으로 목을 매 죽은 시체로 발견됬다. 자살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유서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인즉, "10월 28일 휴거를 앞두고 세상이 싫다"라는 글을 남겼고, 남편에게는 "666 바코드가 시행되면, 다른 가족들이 신의 뜻에 따를 수 있도록 해달라" 라는 당부를 남겼다. 이는 휴거 소동과 관련된 최초의 자살사건이었기 때문에, 경찰당국이 전격 개입하는 상징적인 빌미가 되었다.
결국 1992년 9월 24일, 경찰은 다미선교회의 우두머리이자, 이 모든 소동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이장림을 체포하게 된다. 경찰은 애초에 사기 혐의로 이장림을 가두려고 했다. 그러나 사기가 입증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체포 과정에서 이장림이 보유하고 있는 수만달러어치의 미국돈이 발견되면서, 일단 외환관리 관계 법령 위반으로 감옥에 가둘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체포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찰은 이장림이 수십억원치의 재산을 다미선교회 운영과정에서 쌓아두었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알렸고, 그 재산 중에 휴거 이후 1993년이 되어서야 현금화 할 수 있는 채권이 있다는 점을 널리 홍보했다. 휴거 소동의 근원지였던 이장림을 돈을 울궈먹기 위해 신봉자들을 속인 사기꾼으로 보이게 하려고 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이장림은 스스로도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과, 최근 회의감을 느껴왔다는 사실을 토로하게 된다. 그래서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장림은 1992년 10월 28일에 임박해서는 신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표했는데, 휴거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해서 난동을 부리지 말고 차분히 생활에 정진하는 삶을 살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경찰 활동 이후의 이러한 움직임은 휴거 소동이 겉잡을 수 없는 공황상태로 확대되는 것을 막았고, 나아가, 휴거 소동 이후에도 신봉자들이 난동을 부리지 않게 하는데도 일조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장림의 이러한 행동은 소동을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1992년 10월에 들어서면서, 상당수 신봉자들이 편지를 남겼다. 내용은 대체로 1992년 10월 28일 후에, 자신이 순간이동해서 사라지고 나면, 재산을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지 정해두고, 남은 사람들에게 666 바코드를 받지 말고 항거하라고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편지가 발견되면서, 경찰은 이것이 "세상을 하직하려는 사람들이 남기는 편지" 이므로, 일종의 유서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근거로,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움직이는 수순과 같이, 모든 신봉자와 관련 종교단체에 대해서 1992년 10월 28일 휴거 소동에 경찰이 대거 개입하기로 결심한다.
시시각각, 문제의 1992년 10월 28일이 다가오는 가운데, 부산 경찰은 홍보전단을 뿌리는 종교 선전 행위만한다하더라도, 그 내용이 휴거 소동에 관한 것이면, 공포심과 불쾌감을 조장하는 풍기문란 행위로 보고 경범죄로 입건하는 강경책을 쓰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역시나 최후의 기승이 있는지라, 신비롭고 무서운 사건들에 대한 유인물과 유언비어는 마지막으로 난무했다. 중고등학생들이 휴거를 믿어 어차피 지상을 떠나니 부질없다고 생각해서 중간고사에 백지를 낸 경우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돌았고(알타비전이야기),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재고관리나 고객관리를 위해 사용하는 바코드를 괜히 꺼림칙하게 여기는 일도 생겼다. 그러다보니, 기독교의 심판의 날을 믿는 사람들은 직접 휴거 소동에 가담하지 않더라도, "혹시 그 성경책에 나오는 일이 1992년 10월 28일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혹시나 하는 관심을 갖는 사람은 굉장히 광범위하게 많아졌다.
이 무렵, 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주영 사퇴설이 잠시 나돈 적이 있었다. 여기에 대해 정주영 후보측은 "정주영이 사퇴할 가능성은 휴거가 일어날 가능성과 같다"라는 흥미진진한 답을 내어 놓기도 했다. 워낙에 요란하게 유인물 살포가 심했던 터라, 민심마저 꽤 흉흉해져가는 듯한 묘한 분위기가 살짝 감도는 가운데, 1992년 10월 28일이 마침내 찾아오게 된다.
1992년 10월 27일은 양자역학의 이해하기 어려운 면을 신비주의로 포장하는데 가장 자주 들먹이게 되는 인물인, 미국의 데이비드 봄이 사망한 날이었다. 한편으로, 한국에서는 휴거 소동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충청북도 제천의 한 종교 집단에서는 출입구에 "우리 먼저 갑니다. 장렬히 순교하세요. 천국에서 만납시다" 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집단으로 출가 생활을 하고 있던 전라남도 완주의 산골에서는 신봉자들이 간편한 옷차림외에 모든 소지품을 불태우며 지상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로 결심하는 행사를 치렀다. 다미선교회 본부는 휴거 순간에 흥분한 신자들의 난동으로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거울 등의 깨지기 쉬운 물건을 치우고, 의자와 책상을 치우는가하면, 소화기를 배치하기도 했다. 한편 다미선교회 본부는 26일, 신봉자 1천5백명에게 10월 28일 당일, 경찰과 구경꾼들의 혼란을 통제하기 위해 출입증을 발급했다. 그래서 신봉자들은 삼삼오오 이 출입증을 목에 걸고 다미선교회 본부에 나타났는데, 기자나 구경꾼들은 이 출입증을 일컬어 천국행 티켓이라고 불렀다.
1992년 10월 27일 24시. 대부분의 유인물에 "10월 28일 자정"이라고 되어 있기에, 이것을 1992년 10월 28일 0시라고 착각한 구경꾼들이 다미선교회 본부에 몰려들었다. 이 때 무려 1백여명의 사람들이 몰렸고, 이 중 상당수는 신봉자로 세상사를 등진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었다. 이 중에 가장 이목을 끌었던 사람은 서울 마포구의 39세 허모씨였다. 이 사람은 25년 지기인 자기 친구가 친구의 아내와 함께 휴거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 친구가 10월 26일 저녁에 문득 자신을 찾아와, 집문서와 7백만원이 든 통장을 자기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여동생 결혼자금을 주라고 했다고 합니다. 허모씨는 휴거가 일어나지 않으면 친구에게 집문서와 7백만원이 든 통장을 돌려주려고 왔다고 했는데, 그 의리가 인구에 회자되었다.
다미선교회측은 이러한 구경꾼, 반대자 들의 소동을 우려하여, 자진해서 경찰에 병력배치를 요청했고, 실제로 당일에는 경찰 4개 중대, 구급차 3대, 소방차 3대, 조명차 2대가 배치되기도 했다. 이처럼 1992년 10월 28일 각종 종교단체에 배치된 경찰병력은 전국적으로 1만 5천명에 이르렀고, 당일에 한해 철야 비상경계에 돌입했다. 또 상당수 단체들은 휴거가 되고나면, 자신의 재산은 모두 교회에 주어서 휴거 이후의 재앙을 헤쳐나가며 버틸 자금으로 쓴다는 계약을 맺기도 했고, 단체에 따라서는, 재산과 남은 가족 관리를 주변 사람들에게 당부하라고 지시하여, 형이나 동생, 친한 친구들에게 가족과 재산을 당부하는 휴거를 기대하는 신봉자들도 많았다.
1992년 10월 28일 당일. 다미선교회는 출입구에 꽃으로 된 3미터 크기의 커다란 아치를 만들어 장식하고, 주차장에 구경꾼들과 사람이 너무 많아 건물안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중계용 대형 텔레비전을 설치했다. 밤이 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1992년 10월 28일 휴거에 대한 신봉자들이 종교 단체에 모여 들었고, 특히, 경기도 의정부, 전라북도 완주 등지의 종교단체에는 모든 신봉자들이 모두 경건해 보이는 하얀색 옷을 입고 모였다. 다미선교회 본부에도 "천국행 티켓"이라는 별명의 출입증을 저마다 목에 걸고 신봉자들이 집결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이들은 스스로 "지상에서의 마지막 예배" 라고 주장하는 휴거를 기다리는 종교 행사를 시작했다. 구경꾼과 경찰은 물론이요, 국내 TV방송사, 나아가 CNN과 아사히TV등의 외국TV 방송사들까지 모여들어, 굉장한 관심꺼리가 되었다. 당시 경찰은 전국적으로 1백 55개 교회 8천 2백명의 신봉자들을 파악한 규모로 사건을 집계했다.
이날 가장 먼저 기이한 소식을 전한 곳은 경기도 수원의 한 조직이었다. 이곳에는 약 2백명 가량의 신봉자들이 모여서 행사를 치르고 있었는데, 8시에 한 사람이 "평택에서 예수님이 공중재림했다는 전화를 받았다"는 말을 했다. 9시경, 목사는 신도들에게, "평택에서 예수가 꽃으로 장식된 마차를 타고 공중에서 재림했으며, 공중들림이 일어났다"라고 말하게 된다. 이에 신봉자들은 열광하여 환호했고,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신봉자들은 서로 감격에 차 악수하면서,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인사를 나누었다. 이내, "하나님 아버지 어서 오세요"라고 부르짖으며 온몸을 흔들며 격렬히 찬송가를 불렀다.
후에, 경찰에서 조사에 본 결과, 이날 같은 평택에는 아무 일도 없었고, 행사 시작시간이 늦어져서 신봉자 세 사람이 모여 있었을 뿐, 예배가 시작조차되지 않은 헛소동이었다고 합니다.
서울 마포구의 다미선교회 본부에서는 9시 부터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었다. 이장림이 구속된 상태였으므로, 미국 담당인 장만호 목사가 행사를 이끌었고, 운집한 신봉자들은 미국, 일본, 캐나다에서 온 사람들 5백명을 포함해 1천 5백여명정도였다고 한다. 건물을 20, 30대 청년 신봉자 50여명이 둘러치고 경비하여, 7백명 이상의 구경꾼과 취재진들을 막아선 상태로 행사는 시작되었다. 청년신도들은 출입증을 일일히 확인하여 신봉자들만 건물로 올라올 수 있게 했다.
예배가 막 시작되던 무렵, 건물 불빛 속에서 나방 한마리가 날아올랐다. 그러자, 한 신봉자가 "나방이 휴거되고 있다" 고 외쳤고, 주위의 신봉자들은 감격하여 나방을 보며 "할렐루야"를 외쳤다고 한다.
곧이어 10시 5분쯤 예배 광경을 야외 TV로 지켜보던 구경꾼들 중에서 고교 2년생 이모군이 소리지르며 나와서 "형이 휴거에 미쳐있다. 말도 안되는 소리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며 울분을 토로했다. 그리고 난동을 부리며 야외 TV를 공격, TV를 떨어뜨려 부수어 버렸다. 이모군은 곧 경찰에 연행되었고, TV가 부서져 TV중계가 불가능해진 다미선교회측은 야외 스피커로 "지상에서의 마지막 예배"를 중계했다. 잠시후, CCTV화면에 붉은 조명등이 한 번 잡혔는데, 이것을 누가 보고 "성경에서 말하는 불기둥이다!" 라고 소리쳐서, 사방에서 함성이 일고 술렁이는 사건도 있었다.
신봉자들은 바닥에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열심히 기도했고, 출가하여 속세를 떠나 살면서 휴거를 기다리고 흰옷을 입고 모였던 사람들도 일어나서 노래와 기도문구를 부르짖으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서울 마포구 다미선교회 본부에서는, 11시 20분 경이 되자, 애인을 돌려달라고 주장하는 정모씨가 주변에서 관심을 가져 주지 않자, 옷을 벗고 나체로 시위하면서 인근 도로 30미터를 행진하기도 했다. 중요한 사건은 아니지만, 해괴한 모습을 더하며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드는데는 일조했다.
마침내 자정을 10분 앞둔 11시 50분. 다미선교회 본부의 신봉자들은 모두 일어나 울부짖고 온몸을 흔들며 가장 열정적인 기도에 돌입했다. 한편, 부산의 한 조직에서는 "신봉자들의 3분의 1이상이 휴거 직전에 들리는 신비로운 '나팔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을 들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2년 10월 28일 자정이 찾아왔다.
"대한민국의 전지역에는 이 때,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한국표준시로 자정이 지나자, 언론의 보도에서 흔히 쓰는 표현대로, 신봉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곧 이어, 신봉자들은 하나둘 주저 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몇몇 신도들은 "믿음이 부족한 저희들을 용서하소서"라고 울부짖었다. 한 여학생은 끝없이 흐르는 눈물을 계속 닦으며 뚫어지도록 시계를 바라 보았는데, 자정을 한참 넘어선 시각을 가리키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는 묘사도 보도되었다.
신도들이 통곡하며 실망하는 가운데, 다미선교회 본부의 예배를 집전하던 장만호 목사는 "모두가 앉아서 주님을 찬양하자" "휴거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오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도 다 주님의 은총이었다" 라며 사태를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장만호 목사는 동요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각자 귀가하여 가정과 직장에 충실하면서 착하고 올바른 신자의 모습으로 살자고 설교했다.
이러한 비교적 차분하고 온건한 수습 태도 때문에 1992년 10월 28일은 큰 불상사 없이 마무리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