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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포로>에 대한 일본과 한국역사속 사용언어 고찰(1)
경주김씨 백촌공파 김동암 할아버지 daum cafe.
목포 북교 초등학교 동문회 게시판.
2019. 7.27
그동안 일본과 북한의 여러 외교 난제 속에서 납치 문제가 아직도 큰문제로 남아있고 당시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사과 까지 하였다.과연 한민족(북한)이 일본에게 사과할 정도로 잘못이 있었고 세계에 망신을 당할정도 였는가를 한국.일본 역사책에서 찾아보았다.또한 개인적으로 죄송한 것은 한국 최초 전문학교 전산 전공자로서 (명전4회) 인문학까지 하여서 많은 인문학 교수와 학생들에게 밥줄을 버리게 하지 않는가 항상 마음이 쓰이지만 현대는 제4차 산업혁명에 적응이 필요한 시기, 각자 자신들의 노력을 부탁드리고 싶다.
(본론)
삼국사기<왜구 침입>
卷第三 新羅本紀 第三 > 나물(奈勿) 이사금(尼師今) > 三十八年夏五月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자 독산에서 대승을 거두다(0393년 05월 (음))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자 독산에서 대승을 거두다 ( 393년 05월(음) )
38년(393) 여름 5월에 왜인(倭人)註 035이 와서 금성(金城)註 036을 포위하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이내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註 037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그들을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卷第三 新羅本紀 第三 > 실성(實聖) 이사금(尼師今) > 四年夏四月 왜병이 퇴각하는 것을 매복하여 물리치다(0405년 04월 (음))왜병이 퇴각하는 것을 매복하여 물리치다 ( 405년 04월(음) )4년(405) 여름 4월에 왜병(倭兵)이 와서 명활성(明活城)註 064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獨山)註 065의 남쪽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두 번 싸워 그들을 격파하여 3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卷第三 新羅本紀 第三 > 눌지(訥祗) 마립간(麻立干) > 二十八年夏四月 왜병을 쫓다가 위기에 빠지다(0444년 04월 (음))
28년(444) 여름 4월에 왜병(倭兵)이 금성(金城)註 114을 10일 동안 포위하다 식량이 다 떨어지자 돌아갔다. 왕이 군사를 내어 그들은 추격하려고 하니 좌우에서 말하였다.“병가(兵家)의 말에 ‘궁지에 몰린 도적은 쫓지 말라.’고 하였으니註 115 왕께서는 그 일을 그만두십시오.” [그러나 왕은] 듣지 않고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독산(獨山)註 116 동쪽까지 추격해 싸우다가 적에게 패하여 장수와 사졸 가운데 죽은 사람이 반이 넘었다. 왕이 허겁지겁 말을 버리고 산에 올라가니 적이 몇 겹으로 에워쌌는데, 홀연히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지척에 있는 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적들이
“귀신[음(陰)]이 도와주는구나!”라고 말하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일본서기 <신라 침략>
日本書紀 > 권 22 豐御食炊屋姬天皇 推古天皇 > 11년 가을 7월(0603년 07월 03일(음)) > 新羅 공격을 위한 出征
가을 7월 辛丑 초하루 癸卯 當摩皇子가 難波로부터 배를 출발하였다.
日本書紀 > 권 22 豐御食炊屋姬天皇 推古天皇 > 11년 가을 7월(0603년 07월 06일(음)) > 當摩皇子 妻의 죽음으로 新羅 공격 실패.丙午 當摩皇子가 播磨에 도착하였다. 그 때 같이 간 妻 舍人姬王이 赤石에서 죽었다. 이에 赤石의 檜笠 산등성이 위에 장사지내고 當摩皇子가 돌아왔다. 마침내 (신라를) 정벌하지 못하였다.
고려사 <납치>.
고려사 > 卷三十五 > 世家 卷第三十五 > 忠肅王 10年 > 6월 > 왜적이 추자도를 침략하여 백성들을 납치해 가다고려사
> 1323년 6월 28일(음) 무자(戊子) /1323년 7월 31일(양)
고려사 > 卷一百三十五 > 列傳 卷第四十八 > 禑王 9年 > 10월 > 도체찰사 최공철의 아들이 왜적에게 납치당하다
1383년 10월 미상(음)
고려사 > 권43 > 세가 권제43 > 공민왕(恭愍王) 20년 > 3월 > 왜적이 해주를 침략하다/왜구가 해주(海州)에 침략하여 관청에 불내고, 〈해주〉 목사(牧使)의 처와 딸을 납치하여 돌아갔다.
1371년 3월 20일(양)
고려사 > 권43 > 세가 권제43 > 공민왕(恭愍王) 21년 > 6월 > 왜적이 안변 등지를 침략하다/신축 왜구가 동계(東界)의 안변(安邊) 등지를 노략질하여 부녀를 납치하고 곡식[倉米] 10,000여 섬을 빼앗으니, 존무사(存撫使) 이자송(李子松)의 관직을 파면하고 귀향형에 처했다[放歸田里].
1372년 7월 26일(양)
고려사 > 권126 > 열전 권제39 > 간신(姦臣) > 왕안덕 > 왕안덕이 왜구 격퇴에 공을 세우다
-이하중략-찬성사(贊成事) 양백연(楊伯淵)과 평리(評理) 변안열·임견미를 보내어 전투를 돕게 하였는데 마침 최인철(崔仁哲)이 개경으로 돌아와 거짓말하기를, “신이 왕안덕·홍인계·인해를 독려해 직산현(稷山縣)에서 왜적을 쳐서 50여 명의 목을 베자 적이 궤멸하여 달아났습니다.”라고 하였다. 우왕이 이를 믿고 최인철에게 궁중의 말과 백금(白金)을 하사하고 왕안덕 등에게는 말·옷·술을 내렸으며 양백연 등은 도로 불러들였다. 왜적이 홍주(洪州)를 도륙하고 불을 질렀으며, 목사(牧使) 지득청(池得淸)의 처를 죽이고 판관(判官)의 처자를 납치하였다. 왕안덕은 왜적과 노현(蘆峴)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다음 날 적이 또한 온수현(溫水縣)에 침략해 이산(伊山)의 군영을 불태우니, 인해 등이 신교(薪橋)에서 싸웠는데 밤에 적이 사방을 포위하니 사졸이 놀라 궤멸하여 전사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이하 생략-
고려사 > 卷三十五 > 世家 卷第三十五 > 忠肅王 10年 > 6월 > 왜적이 추자도를 침략하여 백성들을 납치해 가다.
1323년 6월 28일(음) 무자(戊子) ,1323년 7월 31일(양).
조선왕조실록<포로.납치>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1월 28일 신사 3번째기사 1397년 명 홍무(洪武) 30년 투항해온 왜적이 울주 지사 이은을 납치해간 일 때문에 삼남 절제사들을 죄하다.도당(都堂)과 각사(各司) 및 기로(耆老)에게 명하여 최운해(崔雲海)·이귀철(李龜鐵)·김빈길(金贇吉)·김영렬(金英烈) 등의 죄를 의논하게 하였다. 당초에 항복을 청해 온 왜적이 경상도 울주포(蔚州浦)에 와서, 왜적의 괴수인 나가온(羅可溫)이 그의 아들 도시로(都時老)와 반당(伴黨) 곤시라(昆時羅)를 볼모로 삼아 계림 부윤(鷄林府尹) 유양(柳亮)에게 보낸 것을, 유양이 질병으로 나가 보지 않았더니, 왜적이 스스로 의혹한 나머지 지울주사(知蔚州事) 이은(李殷)을 납치하여 도망갔었다. -이하생략-
명종실록 20권, 명종 11년 4월 27일 을묘 2번째기사 1556년 명 가정(嘉靖) 35년 간원이 유민들을 복호시킬 것을 아뢰다
간원이 아뢰기를,"지난번 국가가 불행하여 왜구의 침범을 당하였고 그 때문에 수백 년 동안 편안히 생업을 영위해 온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고향을 떠나 오랑캐들 틈에 섞여 있으면서 살아 돌아갈 길이 없어 통곡하면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니, 너무나 애처롭습니다. 위에서 간식(旰食) 하시면서 걱정하시는 것도 이 때문인 것입니다.-중략-또 신들이 듣기에는, 나주(羅州)에 사는 백성이 지난해에 피납되어 왜인들에게 부림을 당하여 왜인과 함께 섬에서 땔감을 채취하기도 하였는데, 왜인이 먼저 뭍에 내려간 틈을 이용하여 5인이 함께 모의, 배를 저어 본토로 도망하여 와서 그중 1인을 보내어 친척들에게 도망온 연유를 말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피납된 사람들이 매우 많아 밤낮으로 돌아갈 날을 생각하면서 왜노들에게 「우리 나라를 침범하려 하면서 맥추(麥秋)를 기다릴 필요가 뭐 있는가?」 라고 하였는데, 이는 거짓 왜노들의 향도(嚮導)가 되어 본국으로 돌아오려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하생략-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1월 29일 癸巳 3번째기사 1638년 명 숭정(崇禎) 11년 무안의 이흔복이 왜국에 잡혀갔다 서생포로 도망쳐 돌아오다.무안(務安) 사람 이흔복(李欣福)이 정유년 왜변 때 왜국으로 잡혀가 노담주(路淡州)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때 서생포(西生浦)로 도망쳐 돌아왔다. 그의 아비가 마침 살아 있어 비국이 원적(原籍)에 돌려보내고 식량을 약간 지급해 주기를 청하자, 허락하였다. 그 뒤에 차왜(差倭) 평성연(平成連)이 와서 말하기를 "뒷날 관백이 일본에서 조선으로 표류해 간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조사하고 힐문할 단서가 있을까 염려되니, 몇 자의 글을 얻어 뒷날 증빙할 자료로 삼기를 원한다." 하였다. 이에 비국이 서계(書契)를 만들어 보내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1).
정강 언덕 진주도의 내력 .
9월 11일 .
사관으로부터 동쪽으로 대총산(大援山,오쓰카야마)을 지났는데 산 위에는 왜황의 무덤이 많다고 했다. 또 10여 리쯤 가서 바라보니 , 분칠한 담이 어른어른하였는데 이것이 복견성(代見城, 후시미조)이었다. 성은 곧 풍선수길이 도읍하던 곳이어서 별궁과 별장과 시가지의 번성함이 왜적 풍신수길을 이름이 있을 때보다 덜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멀어서 눈으로 볼수없었다. 왜인이 말하기를 정강 언덕에 진주도라고 칭하는 곳이 있는데, 그것은 임진년 전쟁에 왜인들이 진주 사람을 포로로 잡아 와서 살게 한 곳으로 지금도 그 마을에는 다른 인종이 없습니다.하였다. 당시를 생각하니 털끝이 쭈뺏 솟았다.
(해설.강혜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기간동안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붙잡혀 갔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전란이 끝나고 돌아온 사람은 5000명에서 7000명 정도로 파악된다. 잡혀간 사람들은 인신매매를 하는 상인들에게 팔려 다이묘 가문뿐만 아니라 일본 각지에서 여러 가지 노동에 종사하였다. 황신의 《일본왕환일기》에 따르면, 1596년 9월 조선통신사가 강화를 체결하기 위해 오사카에 왔다가 강화가 결렬되어 돌아가려 할 때 조선의 수많은 남녀들이 울음소리로 전송하는 바램 배를 출발시킬 수 없다고 전한다. 그 뒤 조선은 회답겸쇄환사라는 이름으로 몇 차례 조선인 귀환을 추진하였으나, 의외로 조선으로 돌아온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1617년 (광해군 9) 종사관으로 사행한 이경직의 《부상록》을 보면,이 시기에 이르면 이미 일본에 남은 조선인들은 조선통신사의 쇄환 노력을 보고도 그다지 호응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포로 쇄환을 은근히 방해하는 일본인들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들 스스로 조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뜻이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경직의 말에 의하면, 열다섯 살 이후에 포로가 된 자는 본국을 조금알고 언어도 조금 알아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는 듯 하였으나 늘 본국의 살기가 어떤가를 물으며 양다리를 걸치고 거취를 정하지 못하였다한다. 또 열 살 이전에 포로가 된 자들은 언어와 동작이 일본인과 같아서 조금도 고국을 그리는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고국으로 돌아갈까 살피는자들은 대체로 품팔이꾼으로 고생하는 자들이고 생계가 조금이라도 넉넉해 뿌리를 내린자들은 전여 돌아갈뜻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일본의 주인들이 쇄환되면 죽거나 절도로 보내지거나 종으로 삼는다는 말로 포로인을 회유, 공갈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호남 사람들은 특히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유한의 이날일기에서 보는것처럼 일본에 잡혀간포로들은 지역별로 모여 살았던 것 같다 요도에 (정강) 언덕에 진주도라는 이름을 형성한 경상도 진주 사람들의 후예들 중 한 사람도 이날 구경꾼 속에 끼여 고국의 사신 행렬을 구경하.지않았을까! (2)
<결론>
저는 한국사를 전공한적이 없기에 (중.고등학교에서는 국사와 신학교와 대학원에서 교회사 공부) 주제넘는 글이 아닌가 걱정은 되지만 oo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로 학생들을 가르키는 사촌동생 대신에 글을 쓴다고 한다면 (신분이 있으면 정치에 민감한 글을 못씀)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이글은 양국을 싸움 만들려고 쓴 것이 아니고 역사적인 background를 설명한 자료입니다. 역사학을 공부하는 명재는 과거는 현제의 表象이요,미래는 현재의 表象이라고 합니다. 과거를 알면 현제가 보이고 현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는 말입니다.감사합니다.
(참고 도서)
(1) 삼국사기.국사편찬위원회 database / 일본서기(한국에 관한 기록).국사편찬위원회 database/ 고려사 上同/조선왕조실록上同
(2) 조선 선비의 일본 견문록(海遊錄)신유한저,강혜선역,이마고출판사, 2008.2.20., 281쪽-283쪽.
(표)조선통신사, 일본과 通하다. 손승철 著, 동아시아 출판사, 2006년11월30일 초판1쇄, 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