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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망언
"한국과 일본의 기술격차가 50년이다."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인간 같지 않은 JAHAN당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건 뭔가, 싶다가 작정하고 세 시간 만에 자유게시판에 세 편의 글을 썼습니다. 반응이 무척 뜨거웠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딴지에서 받은 추천수를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급기야 딴지 죽돌 편집장의 납치 이야기를 듣고, 이왕 납치당할 거 제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나 하고 납치당하자 생각으로 글을 새로 써봤습니다.
저쪽 사람들의 말이 언제나 그렇듯 허접한 이론과 선동일 뿐이니, 누군가 나서서 현실을 이야기하면 기술격차의 ㄱ도 꺼내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많은 분들이 좋은 이야기를 해줬지만, 저도 나서서 숟가락을 올려봤습니다. 나름 업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의무감 같은 걸 느꼈거든요(현재 스타트업을 운영하고 있고, 원래는 국내 토종 IT기업에서 사업기획과 제조업 기술연구소 개발기획/기술기획 일을 했었습니다).
자, 그럼. 그간 제가 보고 겪고 느낀 사례를 중심으로 한/일간의 기술격차와 그 미래에 대한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어떤 기술의 격차가 50년인가?
JAHAN당의 모 의원이 그런 소리를 했죠. 한/일간의 기술격차가 50년이라.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같이 실무에서 뛰어본 사람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이렇게 물어봐야 합니다.
"그 기술이 어떤 기술을 말하는 거냐? 선행 기술이냐? 후행 기술이냐? 요소 기술이냐? 통합 기술이냐? 아니면 응용 기술이냐? 순수 기술이냐? 아니면 양산 기술이냐?"
그렇게 되물어보면, 어떤 표정일지 참 상상이 안 되긴 합니다.
'기술'이란 명칭은 논의하는 필드와 적용하는 산업군에 따라 정말 다양하게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50년 격차라는 기술은 대체 어떤 기술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정의되어야 합니다. 만약, 저 말이 그냥 뇌피셜로 나온 거라면, 여태까지 기술을 개볼해온 국내 엔지니어들을 욕되기 하려고 만든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사실 그들의 무식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니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연구소에서 몇 년 굴러먹은 저 같은 사람도 무척 화가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더라구요.
할 수 있다면 모 의원을 불러다 앉혀놓고 수없이 많은 종류의 기술 하나하나 끄집어서 알려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여기선 기술을 대표적인 카테고리로 나눠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양산 기술이라는 게 있거든요
연구소엔 개발 Process란 것이 있습니다. 이 개발 Process란 기업이 제품을 개발할 때, 비용을 절감하고 효율적으로 개발하기 위한 일종의 연구소 내부 규칙 같은 겁니다. 일반 직원들은 사규를 지켜야 하지만, 연구원들은 사규와 함께 바로 이 개발 Process를 지켜야 하죠. 특히, 제조업의 개발 Process는 순간의 잘못으로 엄청난 비용이 동반되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개발 Process의 제일 앞 단에 있는 것이 바로 BMT(Bench Marking Test) 입니다. 물론, 제일 맨 앞은 제품에 대한 Concept이나 포지셔닝 뭐 그런 것이 필요하겠지만, 신규 제품을 개발한다고 하면, 세상에 없던 제품이 아닌 이상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바로 BMT입니다. 경영전략에 나오는 환경분석과 유사한 업무입니다.
BMT 이론 같은 건 JAHAN당 모 의원이 이해하긴 어렵기도 하고 장황하기도 하니,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딴지그룹이 신제품 세탁기를 개발한다는 상황입니다. 딴지연구소 연구원들은 우선 시장에 출시된 세탁기를 구입합니다. 삼성이나 LG나 뭐 유명한 제품들을 몽땅 삽니다. 그리고 여러 업체의 세탁기를 조심스럽게 분해합니다. 그냥 막 잡아 뜯는 게 아니라 분해 과정을 하나하나 기록하며 분해합니다. 왜냐면 나중에 다시 조립을 해야 하거든요.
조심스레 나사를 돌려 빼고, 결합된 부품들을 하나 하나 분리해내면서 결합 원리나 부품의 수준, 조립의 수준, 몰드의 수준 등 정말 부분들을 꼼꼼히 기록합니다. 대충 감을 잡으셨겠지만, 이런 분석을 하다 보면 기업 간의 수준이 드러나게 됩니다. 더구나, 분석을 하는 연구원들이 소위 해당 기술 전문가쯤 되면, 대번에 기술 수준에 대해서 평가가 가능하죠. 그래서 이 제품들에 적용된 기술을 5~10개 정도의 카테고리로 묶어 메이커별로 평가를 하게 됩니다. 그럼, 대략적으로 시장에서 가장 우수한 기술 평가를 받는 업체가 있고, 가격대비 성능비가 우수한 업체가 나오기도 하고, 가장 낮은 기술을 보유한 업체도 나타나게 되죠.
이 과정을 몇 년 동안 지켜보면서 느낀 부분이 이 기술 카테고리에서 일본업체가 상위에 랭크된 걸 거의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특정 전자 제품의 기술영역에서 일본회사들의 기술력이 그리 높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는 거죠. 그것도 그럴 것이 이미 이 BMT의 과정을 통해 삼성이나 엘지 같은 한국의 대기업들은 일본의 기술력을 지난 10년 동안 BMT를 통해 꾸준히 흡수해왔습니다. 오히려, 몇몇 기술들은 한국의 기술력이 우수하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시장에서 평가를 받고 있는 거죠. 아시다시피, 전 세계 TV 와 백색 가전은 삼성과 LG가 제일 시장 점유율이 높은 상태입니다. 지금이야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삼성과 LG는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 조금씩 시장 점유율을 늘리더니, 북미 유명 호텔에 삼성의 TV가 공급되기 시작하고, 북미에서 LG의 백색가전(에어컨, 냉장고 등)이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단적인 예로, 제품의 조립을 결정하는 '나사의 개수'라는 단편적인 지표를 놓고 이야기해보면(정말 단편적인 지표입니다) 일본 제품의 나사 개수보다 한국 제품의 나사 개수가 적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나사가 적으면 돌리는 시간, 맞추는 시간들이 감소해서 생산성이 증가하거든요. 그리고 나사가 많으면 좀 더 단단하게 체결이 되긴 하지만, 의외로 나사의 불량이 많아서 불량 나사로 인한 시간 낭비도 꽤 됩니다(실제 제품의 조립성을 평가하는 측면에서 나사의 개수는 해당 제품의 생산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이기도 합니다).
조립의 생산성은 소니나 다른 일본 유명기업들이 한국 기업을 앞지르지 못한 상태입니다. 재밌는 건, 한국의 경우 조립이나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 좋은 방법이 있으면 곧바로 제품 개발에 반영을 하는데, 일본은 그러지 못합니다. 몇 년 동안 해당 제품을 계속 BMT를 해보면, 3년 전 조립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반면에, 한국은 혁신적인 조립 방식이 나오면 곧바로 차용을 합니다. 생산에 반영을 하죠. 지금 저는 이걸 아주 간단하고 쉽게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기업의 생산 현장에서 조립방식이나 생산방식을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이폰이 시장에 나와서 그 디자인에 놀랐지만, 실제 산업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부분은 심플한 조립 방식이었습니다. 그 조립 방식을 적용하고자 별도 TF까지 만들 정도니까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Fast Follower에 최적화된 기술 습득방식, 이게 한국기업이 지금까지 취한 기술개발의 방식입니다.
특히나, 이런 Fast Follower들이 절대적으로 집중하는 기술이 바로 양산 기술입니다. 아마도, 이 양산 기술은 우리나라가 전 세계 탑급이 아닐까 합니다. 최근에 중국이 무섭게 따라오고 있지만, 다양한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수행해온 한국의 경우가 좀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2010년 들어 한국 제조업에 불기 시작한 자동화 열풍은 한국의 양산 기술을 더욱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아마도, 정부에서 스마트 팩토리에 대한 기술개발 목표를 잡은 것도 이와 연관이 매우 깊습니다. 전 세계 탑급인 한국의 양산기술과 일본의 양산기술의 차이가 과연 얼마나 클까요?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순수 기술은 일본이 짱이라구요?
흔히,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기업 생존에 매우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하는 업무가 주로 그런 쪽이다 보니, 소위 선진 기술이라고 하는 업체와 기술 미팅이나 기술소개 세미나에 많이 참석을 하곤 했지요. 음, 그런데 이 기술이란 것이 눈에 확연히 보이는 것도 아니고, 원천 기술이란 것과 양산 기술이란 것의 하늘과 땅 차이의 갭으로 인해 번번히 허탕을 치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물론, 그중에 괜찮은 기술도 있어서 기술도입을 논의한 적도 있지만요. 해서 이 관점에서 일본 기술기업 이야기를 하는 게 한일 기술격차를 말하는 데 좋은 사례인 것 같아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많이 사용하는 휴대폰 배터리. 이 휴대폰 배터리는 소위 현대 화학기술의 총아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기술 제품입니다. 물론, 스마트폰의 저전력 설계가 중요한 바탕을 이루고 있지만, 불과 10년 전의 휴대폰 배터리와 지금의 휴대폰 배터리는 엄청난 기술적 비약을 이루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약 10배가량 에너지량이 높아졌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정밀 화학의 한계, 양자물리학의 한계로 인해 이미 그 용량의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배터리 셀을 만드는 회사들은 에너지 밀도를 높이는 새로운 기술을 계속 찾고 있고 그런 기술들이 적용된 제품들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습니다. 제품의 경쟁력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하루면 다 사용하는 휴대폰 배터리 시장에, 2-3일, 심지어 일주일 넘게 가는 배터리가 나타났다고 하면 어떨까요? 단번에 시장을 휘어잡을 거에요.
그런데 그런 기술을 갖고 있는 일본 업체가 있다고 해서 미팅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름 화학공학과 출신이라 기대를 하고 미팅에 참석했죠. 이론적으로 몇 가지 의문 가는 부분이 있지만, 질문을 삼가고 시제품부터 먼저 봤습니다. 말처럼 일주일은 못 가도 에너지 밀도나 전력/전압을 보니 꽤 많은 용량을 가지고 있더라구요. 이제 시제품 양산 이야기로 넘어가야 하는데, 양산 이야기가 없더라구요. 생산 CAPA나 기간들이 이야기가 나올 법도 한데 없길래, 대충 눈치를 깠습니다. 양산하려면 뭐가 필요하냐고 물어봤더니 설비가 필요하답니다. 그래서 검증된 설비냐고 물었더니, 아니랍니다.
이쯤 이야기 나오면, 꽝입니다. 애써 기술을 개발한 업체엔 미안한 이야기지만, 검증된 설비도 아니고, 별도로 개발하는 설비를 이용해서 양산해야 하고, 그 설비를 이용해서 제품을 뽑아도 양품이 나오기까지는 또 하세월이고. 그 시간에 설비투자 비용까지 치면 답이 안 나오는 거죠. 그래서 좋게 좋게 이야기하고 잘 끝냈습니다.
대충 어떤 이야기인지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우수한 기술을 갖고 있다고 해도, 양산이 되고, 양산된 제품이 정상적인 양품으로 만들어지기까지는 부단히도 오랜 세월과 많은 비용이 투자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양산이 안 되고 기술로 끝나는 기술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습니다. 소위 엔지니어적 관점에서 기술을 개발만 하고, 양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기술들이 한국보다 일본에 많을 수 있죠. 그런데 그런 기술은 시장에서 생존하기 힘듭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없는 거죠.
이런 순수 기술 혹은 양산 이전의 기술이 많으면 그만큼 양산기술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은 건 사실입니다. 순수 기술 개발은 중요하죠. 실제 한국 순수과학 기술 연구 실적이 해외보다 높지 않은 게 장기적 관점에서 약점으로 꼽히곤 합니다. 하지만 순수기술이 발달했다고 해당 국가의 기술 수준이 높은 건 결코 아닙니다.
예를 들어, 러시아나 구 동유럽의 체코나, 헝가리 같은 국가는 순수 과학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S/W 보안이나, 화학 등과 같은 순수 과학 기술은 매우 뛰어나죠. 그러나 응용 및 양산 기술이 부족해서 제품화되기 힘든 산업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중국과 더불어 우수한 제품화 / 양산 기술을 가진 몇 안 되는 국가입니다. 특히 제조업 전 분야에 걸쳐서 말이지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응용기술력이 뛰어난 이스라엘 같은 국가에서는 한국의 제품화 역량이 매우 필요한 기술로 평가하고 있는 중입니다. 제품화 능력에 대해서 일본과 비교하고 말고의 수준이 아니란 건 명백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출처 | http://www.ddanzi.com/ddanziNews/5715063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