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되는 소리를 해 새끼야! 어떻게 꽝 복권이 1등 복권으로 바뀔수가 있냐? 그것도 1년전꺼면 이미 기한 다 된건데!" 안재욱이 화를 내자, 송의조가 이내 자세를 고쳐앉더니 둘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네가 내 얘기를 들어도 믿을지 모르겠다."
아까와는 다르게 어느 정도 진지해진 송의조를 보면서, 둘은 그에게 시선을 맞췄다. 셋이 얘기를 나눌 자세를 갖추자, 이내 송의조가 입을 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면 말이야.." . . . . . . . . .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캔맥주에 감자칩를 먹으며 한숨을 푹푹 쉬는 송의조.
"방세 내고나면 이번달은 10만원으로 버텨야하는데 어쩜 좋지..." 그는 돈걱정으로 인해 타들어가는 속을, 캔맥주를 마시며 삭히고 있었다.
"일자리도 안구해지고, 지금 하고있는 알바론 택도 없고. 아 진짜! 대리운전이라도 뛰어야하나?"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하고 있던 그때.
"걱정이 많아보이십니다." 처음 보는 사내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누구세요?" 당황한 송의조,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일단, 좀 앉아도 됩니까?" "에? 아, 예예!" "하하, 감사합니다."
사내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잘 넘겨진 포마드를 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사내가, 송의조를 보며 물었다.
"사실 아까부터 건너편에서 계속 보고있었습니다." "예? 저를 왜?" "아휴! 표정이 너무 안 좋으시길래. 마치 세상 걱정을 혼자서 짊어지신 것 처럼 축 쳐져계시더라구요." "아, 예.."
"요즘, 힘든 일이 많으신가봅니다?" 정장의 사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송의조는 잠시 망설이더니, 술기운이 올라왔는지 처음 보는 사내에게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송의조가 긴 하소연을 끝내고, 이내 눈물을 터트렸다.
"시발! 남들은 벌써 모아둔 돈으로 여유롭게 살고, 여행도 가고, 이제 결혼까지 준비하는데 저는 아직까지도 이러고 있습니다. 저도 좀 사람답게 살고싶은데. 특별한 거 없이 그냥 평범하게라도 살고싶은건데!"
"많이 힘드셨겠네요. 흠."
송의조를 깊이 쳐다보는 사내, 이내 그를 보며 말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 있으십니까?" "예? 그야 당연히 있죠."
송의조의 대답에, 입꼬리를 올리며,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묻는 사내.
"단 한번! 그 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시겠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당연히 그러고싶죠. 에휴!"
사내의 말이 무슨 뜻인지 파악하지 못한 송의조는 그저 신세한탄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이후로 사내에 한마디를 듣자마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생님은 오늘 아주 운이 좋으십니다. 축하드립니다. 그 기회, 제가 드리겠습니다."
"어떻게요?" 송의조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사내가 웃으며 답했다.
"일단, 눈 감아보세요." "예? 아,예!"
얼떨결에 그의 말대로 행동하는 송의조, 앉은 자리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정장의 사내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눈 감으신 그 상태로, 지금껏 살아온 인생중에서 가장 후회로 남은 순간을 떠올려보시길."
사내의 말을 들은 송의조, 이내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삶을 회상하며, 깊게 생각에 잠기는데.
"아?"
무언가가 자신의 머리를 스쳐지나간 듯, 그의 머리 속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맞아, 1년전에 샀던 복권, 당첨 번호에서 숫자가 하나씩 다 빗겨맞았잖아. 원래라면 그대로 쓰려고 했는데.."
고민에 잠긴 송의조, 그러나 곧 생각을 정리하더니.
"만약에 그때 내가 원래대로 복권 숫자를 써냈다면?"
이거다!
생각을 정리한 송의조가, 조금은 흥분한 듯 사내에게 말했다.
"저,저 생각했어요!" "오, 무엇입니까?"
사내의 물음에 송의조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1년 전에 복권방에서 복권을 한장 샀었는데요. 그때 생각해둔 조합이 두개 있었는데, 원래 먼저 생각해뒀던 조합으로 할까 두번째로 생각해뒀던걸로 쓸까 고민했다가 결국엔 두번째로 생각한걸로 번호를 썼거든요."
"네."
송의조가 잠시 말을 멈추고 침을 꿀꺽 삼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랬더니 당첨 번호에서 숫자가 다 하나씩 빗겨맞았지 뭡니까? 만약 제가 그때 원래 생각했던 조합으로 번호를 써냈다면, 수십억 당첨금 그게 다 제꺼였다고요! 그것만 생각하면, 진짜 자다가도 깨서 땅을 친다니까요!"
송의조의 발언에, 사내가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아! 숫자를 하나씩 빗겨써서 결국 당첨을 놓치다니, 저라도 땅을 치고 후회할 거 같군요."
"그,그럼 이제 어떻게.."
말은 했으나 바뀐건 없자, 송의조가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그의 생각을 읽은 듯, 곧바로 입을 열어 말했다.
"만약에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당연히 복권 번호를 수정하시겠죠?" "네? 네! 맞아요!"
사내가 감긴 송의조의 눈 앞으로 손을 내밀더니, 그에게 물었다.
"그 날의 날짜와 장소, 정확히 기억하고 계십니까?" "날짜랑 장소요? 그게.."
잠시 머리속으로 기억을 더듬는 송의조,
"아! 기억났어요! 2018년 5월 23일, 집 아랫동네에 있는 덕배마트였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
곧바로 눈 앞의 손가락을 튕구자,
"아악!" 어딘가로 세게 빨려들어가는 느낌에, 송의조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떠버렸다. 그러나, 눈을 뜨자마자 눈 앞에 놓인 광경이 한번 더 그를 놀라게 했다.
"여..여긴?"
아까까지만 해도 편의점 테이블에서 캔맥주에 감자칩을 까먹고 있었던 자신이, 그 날의 복권방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오른손엔, 그 날 구입했던 복권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당황한 송의조가 자리에서 안절부절 하자, 이내 사내의 말이 떠올랐다.
[단 한번! 그 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시겠습니까?]
"..아!"
그의 말을 떠올린 송의조, 이내 팬을 잡아, 복권 번호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바쁘게 복권 번호를 써내리자마자 다시.
"아악!" 눈이 감기며, 다시 어딘가로 세게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는 송의조, 그리고 다시 눈을 떠보니,
"잘 되돌리고 오셨나요?" "어어..어?"
원래 있었던 편의점 테이블 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죠?" "굳이 긴 말은 필요 없을 거 같고, 핸드폰에 은행 어플 있으시면 한번 들어가보시는게?"
"네?"
사내의 말을 들은 후 잠시 상황을 정리하는 송의조, 얼마 안가 정신이 번뜩 뜨이더니, 곧바로 그의 심장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설마?"
주체하기 힘든 떨린 손으로 핸드폰을 붙잡은 송의조가, 이내 자신의 은행 어플에 들어가 통장을 확인했다.
"이럴수가! 이럴수가!"
원래라면 10만원밖에 없었을 그의 통장에, 40억이 찍혀있는것이 아닌가!
"반응을 보니, 성공적으로 잘 하셨나봅니다!"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된거에요?"
상황을 믿지 못하는 송의조, 사내는 그저 그의 반응을 보며 웃음지을 뿐이었다.
믿기 어렵다는 듯 송의조는 자신의 볼을 꼬집더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지 자신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아악! 너무 세게 때렸나?"
고통을 느낀 송의조는 이내, 통장에 찍힌 40억을 보며 환호를 질렀다.
"이야아아아아아아!"
사내는 기뻐하는 송의조에게 뒤돌아서며, 들릴듯 말듯한 말로 자리에서 떠났다.
"앞으론 후회없는 인생을 사시길, 그리고 기억은 서서히 지워져가실겁니다."
. . . . . .
"너 지금 이 말을 믿으라고 하는거냐?"
송의조의 긴 얘기가 끝나자, 안재욱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야! 그게 사실이면 나한테도 좀 오라고 해봐!" 이용 역시도 송의조를 쏘아붙였다.
"그러니까~ 이럴 줄 알았어. 뭐,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어쨌든 야야! 오늘 먹고 죽자!"
그들의 반응은 석연치 않았지만, 송의조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웃으며, 친구들에게 씀씀이를 베풀었다.
2차까지 술을 마신 후, 셋은 택시를 잡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카카오택시로 택시를 부른 안재욱이, 취한 송의조를 태우려 하자 송의조가 거부하며 말했다.
"2차로 끝이야? 야! 오늘같은 날 3차까지 가야지 임마, 아 원에 가야지! 투터치로 가야지 임마~" "아오! 이새끼 얼마나 마신거야 진짜로! 야! 택시 잡아줄테니까 집까지 조심해서 가라. 내일 아침에 연락하고!"
억지로 택시에 송의조의 몸을 우겨넣은 후, 안재욱과 이용 둘은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신호에 걸려 횡단보도에서 멈춰 서있는 둘, 이용이 안재욱을 보며 말했다.
"의조 저새끼가 하는 말 진짜일 수도 있을거 같지 않아?"
이용의 말에 안재욱이 미간을 찌푸렸다,
"야. 너까지 무슨 소리야? 혹시 술기 올라와?"
"그건 아닌데, 뭔가 허튼 소리는 아닌 거 같던데, 크큭!" "왜 그러냐 너까지? 그냥 복권 당첨돼서 기분 좋아서 헛소리 늘어놓은걸거야. 의조 그 놈 전부터 이상한 소리 많이 했잖아."
안재욱은 오늘 송의조가 했던 얘기에 대해 그저 술에 취해 하는 잡소리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용은 그와는 다르게 어느 정도 흥미를 느낀 듯 했다.
"의조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나한테도 좀 왔으면 좋겠더라."
이용의 말에, 안재욱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걷다가 가는 길이 엇갈리게 된 둘은, 이내 인사를 나누고 떠났다.
"승아야 나왔어."
집에 들어온 안재욱,
"어? 안 자고 있었어?"
꺼진 거실, 그의 아내인 복승아가 작은 소파에 홀로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먼저 자고있지 그랬어. 나 오늘은 회사 끝나고 애들 만나느라.." "응.."
아내는 무표정이었는데, 기분이 좋아보이진 않았다. 눈치를 본 안재욱이 아내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기분 안 좋아보이네 여보." "아니야 그런 거."
말과는 다르게, 확실히 복승아의 기분은 좋지 않아보였다.
어떻게 분위기를 바꾸면 좋을까 고민하는 안재욱, 그러다 오늘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송의조가 한 얘기가 떠올랐다.
"맞아 여보! 나 오늘 오랜만에 애들 만나고 왔어. 내 친구들 알지? 의조랑 용이." "응."
"의조 이 놈은 진짜 오랜만에 만났는데, 한다는 얘기가 뭔지 알아? 자기가 복권에 당첨됐는데, 그게 1년전에 샀던 꽝이었던 복권이 1등 당첨된 복권으로 바뀌었다는 별 이상한 소리를 하는거야? 내 친구지만 진짜 간혹 보면 미쳤나 싶더라니까."
"..근데?"
"그래서 말야, 대충 들어줬지. 그랬는데 또 뭐라더라? 이틀전에 의조가 집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 마시고 있었는데 자기 옆으로 무슨 정장을 입은 남자가 갑자기 다가왔다는거야. 그래서 둘이 얘기를 나눴는데, 남자가 이렇게 말했대. 후회되는 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겠냐고.'"
복승아는 일일히 반응하진 않았다.
"그래서 의조 그 놈이 그러고싶다고 하니까. 갑자기 그 남자가 축하드린다며, 기회를 드리겠다며 그러는데!"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복승아가 그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별로 듣고 싶진 않다. 오빠."
그녀의 반응은 너무도 차가웠다.
"미,미안! 별 거 아닌 얘긴데 쓸 데 없이 길었네. 하여간 의조 그 놈 이상한 애기를 하더라고. 복권은 어떻게 당첨됐는지 부럽네! 피곤할텐데 이제 자러 갈까?"
"그 전에 오빠랑 하고싶은 얘기 있어."
"응? 뭔데?"
복승아가 그에게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오빠 고생하는 거 알아서 미안한데, 요즘 우리 많이 어려워. 이번달만 해도 가스비에 전기세에 수도세에, 관리비 내고나면 남는 생활비가 없는데.."
복승아의 걱정에, 안재욱의 심장이 땅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렇지만, 아내에게 걱정을 주고싶지 않은 듯, 안재욱이 말했다.
"승아야. 힘들겠지만 우리 조금만 더 힘내보자. 오빠가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하면.." "아! 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아내 복승아가 울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오빠 몇년째 그 소리야? 나 오빠 믿고 결혼했어. 근데 이게 뭐야? 우리 지금 너무 힘들게 살고 있잖아! 내 친구들은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다 자기들 하고싶은 거 살면서 행복하게 잘 살기만 해. 근데 난 뭐야? 돈 때문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오빠랑 결혼한 이후로 난 내가 하고있던 것도 잘 못하고 있는데! 이게 뭐냐고 속상하게!"
"승아야.."
"몇년째 이렇게 살고 있는데 애는 어떻게 가지려고 그래? 매번 아이 갖자고 그러면서! 그럴만한 여유가 돼야 아이를 갖든가 할 거 아니야! 나도 우리 애 만들고 싶어. 근데, 지금 상황에서 애 생기면 나중에 우리 지금보다 더 힘들어 질 거 아니야. 난 우리애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단 말이야!"
복승아가 이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작은 몸의 아내가 흐느껴 울때마다, 안재욱의 세상은 무너져 가루가 되는 것만 같았다.
아내 복승아가 그의 품에서 나오며, 침실로 들어갔다. 차마 그는, 아내를 따라 침실로 들어갈 수 없었다. . . . . . .
[힘~이 들 땐~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야근에 쩔어있는 안재욱, 그의 핸드폰에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승아인가?"
뒤집어진 핸드폰을 바로잡으며 화면을 쳐다보는 안재욱.
그러나 그에게 온 전화는, 이용에게 온 전화였다.
"아이 씨 뭐야."
"어, 왜?" "재욱아. 의조가 했던 얘기 있잖아." "아 그 얘긴 또 왜! 나 오늘 야근이라 피곤한데 그런 얘기할거면 나중에 해라."
안재욱이 질색하며 전화를 빠르게 마무리하려 하는데,
"사실이더라."
이용의 한마디에, 안재욱이 당황했다.
"무슨 소리야?" 되묻는 그의 말에.
"정장입은 남자가 와서는 후회되는 순간을 되돌리고 싶냐면서 물어본다는거." "그,그게 뭐?"
잠깐의 침묵 끝에, 이용이 말했다.
"정말 사실이었어. 나한테도 그 남자가 왔다고." "뭐,뭐?"
이용의 말에, 안재욱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 송의조가 얘기했었을 땐 그저 술에 취해서 푼 소설이라고 생각했건만. 이용까지 똑같은 얘기를 하자 그는 점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아버지 위암이신 거 너도 알지? 우리 아버지 작년부터 병원에 계셨는데.."
이용은 이내 안재욱에게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모두 얘기하였다.
이용의 아버지는 위암이었다. 처음에 그의 아버지는 요즘따라 몸이 영 좋지 않다며 가족들에게 심심치 않게 말했었는데, 이용은 그저 늙어서 피곤해지신거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러나, 그의 무심함은 이내 큰 후회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위암이었고, 치료 시기를 놓친 것이었다.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의사가 이용에게 했던 얘기는, 그의 가슴에 박혔다.
"좀만 더 빠르게 오셨어도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되시진 않았습니다. 관심 가져주셨다면 이런 일은 없으셨을텐데요."
그 날, 이용은 아무도 모르게 홀로 울었다. 자신의 무심함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가족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보다 강했던 아버지가 점점 쇠약해져만 가게 되었다.
최근 이용은 아버지의 병문안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눈에 띄게 야위어져 있었다.
이용은 그를 보자마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안일함으로 인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저렇게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자신이 죽고싶은 심정이었다. 되돌리고 싶었다. 그때 자신이 아버지에게 병원을 가자고 애기 했다면. 바뀌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건강해지실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아버지의 침대 옆에 앉아,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저 말 없이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용이! 이 아빠 튼튼하다. 살면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뭘. 걱정마! 아빠 잘 치료받고 있으니까."
걱정하는 아들을 위해 애써 둘러말한 아버지의 말이, 아들 이용의 가슴엔 너무나도 큰 대못이었다. 끝내 눈물을 참지 못할 것 같은 그는, 오랜시간 머물지 못하며 병실에서 뛰쳐나왔다.
병원 근처 공원에서 눈물을 쏟고 있던 그의 옆으로, 정장의 사내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 사내는, 이용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걱정이 많아보이십니다."
이내 사내는 자연스레 이용의 옆에 앉아 대화를 나눴고, 송의조에게 했던 말처럼 똑같이, 이용에게 말했다.
"단 한번! 그 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시겠습니까?" 라고. . . . .
"그,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안재욱이 어느새 이용과의 전화에 집중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서 말했어. 그때로 돌아가서 아버지와 병원에 가고 싶다고. 그리고 치료받게 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떻게 됐어?"
안재욱의 물음에, 이용이 답했다.
"애초에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없던것처럼, 우리 아버지 지금 엄청 건강하셔. 야윈 모습은 온데간데도 없고."
"뭐?"
안재욱은 그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거지?
"아버지한테 전화했는데, 집에서 치킨시키고 축구 보시고 계신다더라. 그 말 듣고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어,어쨌든 잘 됐다! 다행이네."
전화를 끊은 후, 안재욱은 한동안 자리에서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늦은 야근이 반복된 지 어느새 사흘째.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썩은 동태 눈깔이 된 안재욱은 너무나도 쉬고 싶었다.
그러나 쉴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벌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안재욱이 핸드폰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링. 신호가 가고 있었다. 한데.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신 후..]
"뭐?"
말도 안되는 소리가, 그의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아내의 전화번호가 없는 번호라니?
혹시 자신이 전화번호를 잘못 눌렀나싶어.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럼에도 들려오는 건, 아까와 똑같은 전자음 이었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신 후..]
"어떻게 된거야?"
불안해진 안재욱, 하던 일들을 모두 집어차우고, 옷과 가방을 챙겨 늦은 시간 회사 밖으로 나왔다.
다급하게 차 시동을 거는 안재욱, 그는 바로 집으로 가기로 했다.
혹시라도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긴건가 싶어, 불안한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그의 눈 앞에 보이는 건 없었다.
어느새 그의 차가 집 앞까지 도착했다. 거칠게 차 문을 닫아제끼는 안재욱.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쉴 틈 없이 계단을 올라간 안재욱, 급하게 집 문을 열었다.
"여보!"
집안의 불은 모두 꺼져있었다.
"여보! 나왔어! 여보!"
안재욱은 애타게 불렀다. 가장 사랑하는 그녀를.
그런데, 순간 안재욱은 얼굴이 새하얗게 바랬다.
"이..이게 뭐야?"
아내와 같이 찍은 사진들에, 아내의 모습이 없었다. 사진 속, 그의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당장 액자를 들어올려 다시 확인하는 안재욱.
분명 자신의 옆에 웃고있어야 할 그녀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웃고있는 건 자신 뿐 이었다.
패닉이 된 안재욱,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그녀의 전화번호를 다시 한번 찾는다.
"뭐..뭐야!!"
그의 연락처에, 아내의 전화번호가 없었다. 아내의 번호가 사라져있었다.
"아아..아아..아니야. 아니라고!!"
그는 더 이상 이성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점점 돌아버리기 시작했다.
이내 자리에서 무릎을 꿇는 안재욱. 서럽게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여보.. 흑..흑.. 여보.. 아아.."
그때 문득, 생각이 났다.
내 아내 이름이 뭐였지?
아내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의 동공, 손이 심하게 떨렸다. 그리고 그의 심장까지도 주체없이 쿵쾅거렸다.
"아아..아악! 시발! 우리 아내 어딨냐고!"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아내가 없는 아내와 찍은 사진이 든 액자를 집 안 바닥 곳곳에 거칠게 던지며 분노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서..설마 이것도."
그는 떠올렸다. 송의조와 이용에게 있었던 그 일들. 정장의 사내가 옆에 와서
[걱정이 많아보이십니다.] 라고 묻는다, 그 다음엔
[단 한번! 그 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시겠습니까?] 묻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말한다.
"기억은 서서히 사라질 것 입니다."
텅 빈 집 안에 남아있는건, 누군가에게 버려진 사내 뿐 이었다. 그는 누군가의, 가장 큰 후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