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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소의 네 사람
게시물ID : panic_1008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크리스마스
추천 : 11
조회수 : 273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9/09/30 20:5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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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1

 백화점 붕괴 현장에 네 사람이 갇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네 사람이 갇힌 대피소에는 약간의 물과 먹을 것, 그리고 생존 장비들이 있었다.
 “틀렸어요. 핸드폰은 전파가 안 잡혀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핸드폰을 꺼냈지만, 신호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쳇. 쓸모없는 물건 같으니라고.”
 덩치 큰 남자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여자와 나이든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덩치가 큰 남자는 답답한 듯 대피소를 돌아다녔지만, 별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런 날에.”
 덩치 큰 남자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대피소의 벽을 주먹으로 마구 내려쳤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그만 해요! 지금 가만있어도 위험한 판에 죽으려고 작정했어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덩치 큰 남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뭐야 이 조막만한 년은?”
 덩치 큰 남자는 위협하듯 주먹을 쥐고 손을 들어 올렸다.
 천장에서 다시 먼지가 떨어졌다.
 “에이, 시팔.”
 치켜 올렸던 주먹을 내리고 화를 삭이려는 듯 선반에 있는 물병을 들었다. 뚜껑을 뜯어 기세 좋게 마시기 시작한다.
 “자, 잠깐. 뭐 하는 거예요? 왜 마음대로 비상식량을 함부로 먹는 거예요?”
 이번에도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아니 그럼 목이 마르니까 물을 마셔야지, 언제 마시라는 거야?”
 “우리가 여기 얼마나 갇혀 있을지 모르는데, 그렇게 혼자 마셔도 되는 거예요? 그 물이 당신 혼자 거예요?”
 앙칼진 목소리에 덩치 큰 남자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여자에게 걸어왔다.
 “이 민친년이 오냐오냐 해 주니까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만? 한 번 처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지.”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그래? 한 번 쳐 봐! 해 볼 수 있으면 때려 보라고!”
 “아 제발 그만! 제발 그만해! 제발! 제발! 시끄러워서 정신 사나우니까 제발!”
 새로운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거기에는 직장인인 것 같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여자는 한쪽 구석에 앉아 귀를 막고 훌쩍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덩치 큰 남자가 손을 내렸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도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벽에 기댔다.
 가끔씩 위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만 들리고, 대피소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저기, 여러분들요. 죄송한데 한마디만 해도 될까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중년의 남자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서로 자기소개나 할까요? 저는 바로 이 근처 수정대학교에 근무하는 교수입니다.”
 교수의 말에 덩치 큰 남자가 비웃음 소리를 냈다.
 “쳇, 다 죽어 가는 마당에 자기소개는 무슨 얼어 죽을.”
 하지만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에요. 체대에요.”
 이번에는 덩치 큰 남자를 바라보았다. 덩치 큰 남자는 그제야 좀 이해가 간다는 듯 대학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노가다.”
 대학생도 노가다꾼에게 비슷한 심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자, 그럼. 여기 앉아 계시는 분은 실례지만 무슨 일을 하시는지 좀….”
 여자는 교수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울기만 했다. 무릎을 감싸 안고 우는 여자의 짧은 치마 아래로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교수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흐흐. 그 여자는 몰라도 돼. 어차피 여기서 별 쓸모없을 테니까.”
 노가다꾼의 말에 울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한 번만 더 입을 놀리면 죽여 버리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노가다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여자, 노래방 도우미야. 얼마 전에 몇 번 서비스 받았지.”
 노가다꾼은 그때의 일을 생각하는 듯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들은 대학생이 혐오스럽다는 듯 노가다꾼에게서 떨어졌다. 교수는 자기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던 듯 그냥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었다.
 “이 미친 새끼야. 그게 여기서 뭐가 중요한데!”
 도우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장이라도 노가다꾼을 죽이려는 듯 쳐다보았다.
 “뭐, 그냥 그렇다는 거지. 어차피 우리끼리 뭘 하는지 알아야 여기서 버티든 어쩌든 할 거 아니겠어? 안 그래? 교수 양반.”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진 비상 발전기가 있어서 전기가 들어오는 것 같으니, 그전에 빨리 각자 가진 것들과 여기 있는 물건들을 정리할까요?”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나 보구만? 꽤나 능숙한데?”
 노가다꾼의 말에 교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건축학과 교수니까요.”
 “뭐야, 이 건물 당신이 설계한 거 아냐?”
 교수는 아무 말대꾸도 하지 않았다.
 “민친놈. 니가 이 건물 지으면서 시멘트에 담배꽁초 집어넣어서 그렇게 된 거잖아.”
 도우미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저 민친년이 무슨 생사람 잡네.”
 “생사람? 이 건물 지으면서 그랬다고 니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
 “하, 참나. 환장하겠네. 그깟 담배꽁초 몇 개 섞었다고 건물이 무너지냐? 무너져? 할 줄 아는 거라고는 2차 나가서 허리 돌리는 것밖에 모르는 년이 지랄이에요. 지랄.”
 “뭐…, 뭐? 여기서 나가기만 해 봐. 내가 너 부실공사로 신고할 거니까. 각오하라고.”
 “자자. 제발 싸우지들 좀 말고, 진정하세요. 조금 있으면 전기가 끊길 것 같으니까 서로 가진 것부터 확인하고 정리 좀 합시다.”
 교수의 말에 다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등갓 아래 백열전구가 애처롭게 떨리듯 빛을 내고 있었다.
 “전 아무것도 없어요.”
 대학생이 트레이닝복에 손을 넣으며 이야기 했다. 주머니에서 지갑 하나가 나왔다.
 “쳇, 이거 쓸모가 없구만.”
 노가다꾼이 빈정대듯 말했다.
 “그럼 어쩌란 말이에요? 아르바이트 하다가 갑자기 건물이 무너져서 뭘 챙길 여유도 없었단 말이에요.”
 “그러길래 평소에 대비를 하고 다녔어야지. 나처럼.”
 노가다꾼은 구석에 놓아뒀던 가방을 들어 거꾸로 뒤집었다. 안에서 망치, 톱 같은 각종 공구들과 초콜릿, 담배, 라디오가 나왔다.
 “어이쿠, 이런.”
 노가다꾼은 초콜릿 봉지는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 라디오가 있군요.”
 교수는 구세주라도 만난 것 같은 표정으로 팔을 뻗었다.
 “이봐, 잠깐. 그러는 당신은 뭘 들고 있어?”
 노가다꾼이 발로 교수의 팔을 막았다.
 “저도 가지고 있는 것은 오늘 수업할 교재뿐입니다.”
 가방을 열어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내자 A4 몇 장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뭐야 이거? 쓸모 있는 물건을 가진 놈들이 하나도 없는 거야?”
 노가다꾼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아, 하나 있군요. 손전등이 있어요.”
 “손전등?”
 교수는 기쁜 얼굴로 가느다란 펜을 집어 들었다.
 “레이저 포인트와 같이 사용할 수 있는 손전등이지요.”
 교수가 손전등을 켜자 불이 꺼지면 한치 앞도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약한 빛이 새어 나왔다.
 “젠장….”
 나머지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도우미에게 집중되었다. 시선을 의식한 도우미가 가방에서 물건을 하나씩 꺼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노가다꾼이 소리쳤다.
 “아, 답답하게 굴지 말고 좀 한꺼번에 좀 봅시다. 네?”
 고함소리에 조금 위축된 도우미가 깜짝 놀라 가방을 떨어뜨렸다.
 각종 명품들과 화장품, 콘돔, 주사기, 가루약 등이 안에서 쏟아졌다. 딱히 이곳에서 쓸 만한 물건은 없어 보였다.
 “쳇…, 이렇다니까.”
 도우미는 황급히 쏟아진 물건들을 가방 안에 넣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쏟아진 물건들 사이로, 검은 플라스틱으로 된 물건이 보였다.
 “그건 뭐예요? 혹시 무전기?”
 “아…, 아냐. 아무것도.”
 도우미는 당황하며 검은 플라스틱으로 된 물건을 얼른 가방에 집어넣었다.
 “저런 여자가 들고 다니는 물건이 어디 변변한 게 있겠어? 보나 마나 손님들 갖고 놀기 좋으라고 가지고 있는 물건이겠지.”
 대학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노가다꾼을 쳐다봤다.
 “우리 대학생 아가씨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윙윙이라고 하면 알려나? 윙∼ 하면서 여자에게 기쁨을 주는 물건 말야. 특히 변태 같은 놈들이 좋아하지.”
 그 말뜻을 이해한 대학생의 표정이 새빨개졌다. 도우미는 치욕스러운 표정으로 노가다꾼을 노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이걸로 다 정리가 된 거로군요. 일단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건 라디오와 손전등, 공구들은 일단 확실하지 않고. 그리고….”
 교수는 노가다꾼이 들고 있던 가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안 돼. 엄연히 내가 들고 왔으니까, 이건 내 거야.”
 “뭐, 좋습니다.”
 교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생과 도우미는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냐는 듯 노가다꾼을 쳐다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방에서 초콜릿을 하나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우선은 라디오가 작동하는지 보고, 여기 안에 있는 물건들을 볼까요?”
 대학생이 라디오를 들어 올렸다.
 “제가 작동해 볼게요.”
 교수는 노가다꾼 옆에 있는 선반을 향해 다가갔다.
 “조금 도와주시겠습니까?”
 교수가 도우미를 돌아보자, 도우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우미가 뒤로 다가오고, 교수는 식량이 들어 있는 박스에 손을 뻗었다.
 “잠깐, 뭐 하는 거야?”
 노가다꾼이 교수의 팔을 움켜잡았다.
 “뭐 하다니…, 비상식량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확인한 다음에는 어쩌려고?”
 “확인한 다음에 각자에게 맞게 분배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필요 없어. 손대지 마.”
 노가다꾼이 교수를 뒤로 밀었다. 교수는 뒤따라 걸어오던 도우미의 발아래 쓰러졌다.
 “뭐…, 뭐 하는 겁니까?”
 항의하는 교수를 내려다보며 노가다꾼이 말했다.
 “이 양반이 나이가 들더니 귀가 먹었나? 손대지 말라는 한국말 못 알아들어?”
 거친 말투로 위협하는 노가다꾼의 기세에 깜짝 놀라, 도우미가 뒷걸음질 쳤다.
 그때 라디오의 주파수가 맞춰진 듯 조금씩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백화점 붕괴 사건 관련하여 정부는 119를 중심으로 수색작전을 전개하는 한편…, 날이 춥고 건물 잔해가 많아 생존자들을 구조하기에는 다소 불리한….’
 “거봐. 들었지? 언제 구조대가 올지도 모르는 마당에, 함부로 식량을 낭비해서야 쓰겠어?”
 “각자 몫을 분배하면 필요한 만큼 먹지 않겠어요? 다들 다 큰 성인인데 그런 것도 조절 못 할 것 같아요?”
 라디오를 내려놓은 대학생이 노가다꾼에게 소리쳤다. 도우미는 불안한 듯 그 옆으로 가 뒤에 숨듯이 섰다.
 “허허, 참 미치겠구만. 아가씨. 각자 몫? 여기 어디에 각자 몫이 있다는 거지?”
 노가다꾼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소리쳤다. 한 손에는 가방에서 꺼낸 망치가 들려 있었다.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여기 있는 식량들을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방금 라디오에서 그랬잖아, 생존자를 구조하기에 불리하다고.”
 “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있는 식량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나눠 가질 권리가 있다구요.”
 “아니, 없어.”
 노가다꾼이 망치를 들고 대학생 앞으로 걸어왔다. 대학생은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뒤에 도우미가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도우미는 떨면서 가방 속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 찾고 있었다.
 “이런 데서는 말이야. 강한 놈이 그냥 다 가지는 거야. 한 번 봐봐. 이런 곳에서 살아남는데, 대학교수니, 대학생이니, 노래방 도우미니 전부 무슨 소용이지? 도움이 될 것 같아?”
 “자자, 다들 그만 싸웁시다. 여기서 이렇게 해 봤자 소용….”
 교수가 중간에 서서 말렸지만, 노가다꾼은 교수를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넘어진 교수가 콜록거리며 기침을 했다.
 “나라면 안 그럴 거예요. 아무리 힘든 상황이어도 그렇게 짐승 같은 짓은 안 할 거라구요.”
 “이 조막만한 년이 죽으려고 진짜 환장을 했….”
 망치를 휘두르던 노가다꾼의 몸이 격렬하게 떨리다가 쓰러졌다.
 뒤를 돌아보니 도우미의 손에 아까 그 검은 플라스틱 같은 물건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자위기구가 아니라 전기충격기였다.
 “위…, 윙윙이 맛이 어때 이 시팔놈아.”
 도우미는 대학생 뒤에서 나와 쓰러진 노가다꾼을 발로 찼다. 노가다꾼은 입에 거품을 흘리며 기절해 있었다.
 “어…, 어떻게 할까요.”
 “계속 난동을 부릴지도 모르니, 일단은 묶어 두고 물건들을 좀 찾아볼까요?”
 대학생이 노가다꾼의 손과 발을 묶는 동안 교수와 도우미는 대피소 안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했다.
 “아, 여기 손전등이 하나 더 있네요. 내부 설계도도 있구요.”
 가방 속에서 손전등과 건전지를 꺼내며 교수가 말했다.
 “없어….” 도우미의 목소리에 교수와 대학생 모두 뒤를 돌아보았다.
 “없다니…, 무슨?”
 “아무 것도 없어….”
 도우미는 생수병이 들어 있는 상자와 비상식량이 있는 상자를 한 손으로 들고 집어 던졌다.
 “아무것도 없다고! 씨발.”
 그렇게 말하며 주저앉아 우는 도우미 옆으로 교수가 다가갔다. 안을 열어본 상자 속에는 빈 생수병이 가득 들어 있었다. 

 #2

 ‘…밤이 늦은 가운데 정부는 이번 사태에 대한 특별 TF를 구성…, 과거 사례를 볼 때 물이 있을 때의 생존율이 그렇지 않을 때와 월등한 차이가 있는 것을 고려 소방당국은 생존자들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노력하고….’
 라디오가 가끔씩 구조 상황을 중계해 줬지만, 자세히 들으면 계속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피소에 있는 사람들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대학생은 앉은 채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는 한쪽 구석에서 계속 울고 있었다. 노가다꾼은 의식이 들었는지 가끔 소리를 냈지만,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다. 교수는 아까 발견한 설계도면에 손전등을 비추며 읽고 있었다. 이미 대피소 내부의 전기는 끊긴 상태였다. 남아 있는 식량은 아까 노가다꾼이 반쯤 마시다 남겨둔 생수와 초콜릿 몇 개가 다였다. 바깥의 구조 소리 대신 으스스한 한기만이 대피소를 감쌌다.
 “울지마요.”
 대학생이 도우미에게 이야기했다. 마치 스스로를 달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 소리에 도우미는 코를 훌쩍였지만, 울음을 그치지는 않았다.
 “아, 그 시팔년. 참 시끄럽게 우네.”
 노가다꾼의 목소리에 도우미가 고개를 들어 안쪽을 쳐다보았다.
 “질질 짠다고 해결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시건방진 목소리였지만, 조금 전의 전기충격기가 생각났는지 말꼬리를 흐렸다.
 “한 번만 더 지껄여 봐.”
 도우미의 목소리에 노가다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여기 있다가는 먼저 얼어 죽겠어요.”
 대학생이 손으로 팔을 마구 문지르며 말했다. 확실히 낮이었던 방금전에 비해 온도가 많이 내려갔다. 몸을 따뜻하게 하고 싶어도 쓸 수 있는 것은 박스더미 뿐이었다.
 “우리 진짜 이대로 죽는 걸까요….”
 “뭔 재수 없는 소릴….”
 어느새 노가다꾼이 대학생의 뒤에 와 있었다. 손발은 묶인 상태 그대로였다.
 “다시 한 번 설치기만 해 봐.”
 도우미가 전기 충격기를 꺼냈다.
 “안 할 거야.”
 그리고 대학생을 보며 말했다.
 “물 좀 줘.”
 대학생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노가다꾼을 올려봤다.
 “우리도 아직 한 모금도 안 마셨어요.”
 “아, 거 물 한잔 가지고 되게 쪼잔하게 구네.”
 “이거 한 병뿐이란 말이에요. 알겠어요? 나머지 병들은 다 텅텅 비었고, 지금 여기서 마실 수 있는 물은 이거 하나뿐이란 말이에요.”
 노가다꾼은 그 말을 듣고 자기가 있던 곳으로 다시 갔다. 발이 묶여 있어 마치 강시처럼 껑충껑충 뛰었다. 박스 안에 물이 하나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욕지거리를 지껄였다. 노가다꾼이 다시 대학생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려고 고개를 돌리자, 위에서 벽에 무너졌다.
 “뭐, 뭐야….”
 노가다꾼이 쓰러지듯 굴렀고, 그 뒤로 건물의 자재가 마구 쏟아져 내렸다. 교수와 대학생, 도우미 모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구조대가 아닐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 스쳐 지나갔지만, 천장 위로 보이는 것은 짙은 암흑뿐이었다.
 무게 하중을 견디지 못한 대피소의 반 정도가 무너져 내렸고, 나머지 절반도 곧 무너질 것만 같았다.
 “어떡해….”
 이제는 대학생이 자리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아, 씨발. 내 발.”
 노가다꾼은 건물 잔해에 발이 끼인 듯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도우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전등으로 설계도를 보는 교수에게로 다가갔다.
 “불 좀 잠시 꺼 주세요.”
 “네?”
 “불 좀 잠시만…, 잠시만 좀 꺼주세요.”
 도우미는 무언가 급한 듯 교수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쳇,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게 생각나는 건지.”
 건물 잔해에서 발을 빼낸 노가다꾼이 빈정거렸다. 종아리와 발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듣고 상황을 이해한 교수가 손전등을 껐다.
 “보…, 보면 안 돼요.”
 도우미가 한쪽 구석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치마와 스타킹을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쪼르륵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옷을 입는 소리가 들렸지만, 도우미는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저기요?”
 대학생이 불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불 좀 켜도 될까요?”
 교수의 물음에 도우미가 대답했다.
 “…여기, 뭔가 있어요.”
 무언가 발견했다는 도우미의 목소리에 대학생과 교수, 노가다꾼 모두 도우미 쪽으로 걸어갔다.
 “뭐, 똥강아지도 아니고 배변 본 흔적이라도 보여 주려는 거야?”
 교수가 손전등을 비춰 봤지만, 그곳에는 평범한 바닥재가 깔려 있을 뿐이었다.
 “아니에요. 잘 봐야 해요.”
 도우미는 교수의 손에서 손전등을 빼앗아 좀 더 가까이 바닥을 비췄다. 바닥을 자세히 살펴보니, 비슷한 색깔로 만들어 진 손잡이가 있었다. 방금 전까지 흥건했던 오줌이 손잡이 아래로 점점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귀를 기울이면 똑똑, 하는 물방울 소리 같은 것도 들렸다.
 “당신 아래 뭐가 있는지 좀 빨리 알아 봐. 건축과 교수라며?”
 노가다꾼이 교수를 재촉했다.
 “그렇게 말해도….”
 교수가 도우미의 손에서 다시 손전등을 받았다. 설계도를 몇 번 뒤적거리던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교수님…, 아래 뭐가 있는 거죠?”
 “제 생각에는….”
 교수는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흐렸다.
 “생각에는?”
 “생각에는요?”
 “일단 여기 설계도에는 없습니다만….”
 교수는 다시 한 번 설계도를 들여다본 다음 주저하며 말했다.
 “아쿠아리움이 있는 것 같아요.”
 대피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 손잡이 아래로 집중되었다.
 “아쿠아리움? 그런 곳으로 여기를 나갈 수 있는 거야?”
 교수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 거참 답답하게 하네. 나갈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손발이 묶여 있었지만 노가다꾼은 여전히 위협적인 말투를 퍼부었다.
 “그건 정확히 내려가 봐야 알 수 있습니다.”
 노가다꾼은 자리에 털썩 앉았다.
 “헤, 그럼 내려들 가보라구. 나는 여기 이렇게 손발이 묶여서 꼼짝도 못 하니까.”
 노가다꾼의 태도를 본 대학생은 조금 주저했지만, 도우미가 오줌을 눈 곳에 손을 뻗었다. 금이 가 있는 곳을 들자 손잡이가 올라왔다.
 “나갈 수 있어도 당신은 여기 놔두고 갈 거야.”
 노가다꾼에게 악담을 하며 대학생이 손잡이를 들어 올렸다.
 “어?”
 하지만 손잡이 아래 있는 바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게 왜 이러지….”
 다시 한 번 힘을 줘서 손잡이를 들어 올렸지만,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내…, 내가 같이 한 번 해볼게요.”
 둘이서 같이 들어 올리자 바닥이 살짝 들렸지만, 거기까지였다.
 “안 되겠어요. 그렇다고 셋이서 하기에는 너무 좁고.”
 대학생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교수가 들어 올렸지만, 역시 바닥이 조금 올라오는 정도였다.
 “왜 날 봐? 나 빼고 어서들 내려가라고.”
 대학생과 교수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천장을 한 번 바라보고, 노가다꾼을 봤다. 도우미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듯 이야기 했다.
 “난 반대야. 풀어 줬다가 또 무슨 짓을 할지 알고?”
 “그렇긴 하지만….”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기서 깔려 죽으나 저 민친놈이 날뛰어서 죽으나 어차피 같은 거 아냐? 그리고 이 아래로 내려간다고 해서 우리가 살 수 있다고 보장되는 것도 아니잖아? 어쨌든 난 반대야.”
 “흥. 멋대로들 하라고. 어차피 난 잃을 게 없는 놈이라, 여기서 죽어도 상관없는 몸이라고.”
 “그래도 한 번 시도는 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상황이 이런데, 설마 여기서 또 그러겠어요?”
 “방금전에는 날 두고 혼자 가겠다더니, 이제 생각이 바뀌셨나봐?”
 “저것 봐, 또 저렇게 빈정거리는 거 보라고. 절대 풀어 주면 안 돼.”
 도우미의 말이 끝나자마자 위쪽에서 잔해물이 다시 쏟아져 내렸다. 노가다꾼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머리를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눈을 뜨자, 구부러진 철근과 콘크리트들이 대피소의 절반 이상을 뒤덮고 있었다.
 “제발, 제발. 더 이상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도우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끄덕이기만 했다.
 “다…, 다른 생각 하면 안 돼요.”
 “알았으니까, 빨리 풀기나 해.”
 대학생은 노가다꾼의 뒤로 돌아가 묶어 놨던 줄을 풀었다. 줄이 조금 느슨해지자 노가다꾼은 스스로 줄을 푼 다음, 대학생을 밀쳤다.
 “꺄악.”
 벽에 부딪히며 대학생이 비명소리를 질렀다. 발에 묶여 있던 끈을 마저 풀고, 노가다꾼은 도우미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놔, 이거 놔. 이 민친놈아.”
 도우미는 머리카락 채로 붙잡힌 채 바둥거리고 있었다. 눈에는 후회가 가득한 듯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도우미의 가방에서 전기 충격기를 꺼낸 노가다꾼은 도우미를 벽에 집어 던졌다.
 “쓸데없는 물건이나 가지고 다니고 말야….”
 “다…, 다른 생각 안 한다고 했잖아요.”
 대학생이 떨리는 목소리로 항의했다. 노가다꾼은 남아 있는 물 한 병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흥. 죽이지 않은 걸 감사하게 여기라고.”
 도우미가 가방을 옆에 매고 슬금슬금 기어 노가다꾼의 뒤로 도망쳤다.
 “쳇…, 더럽게 오줌이나 싸고 말야.”
 노가다꾼은 만지기 찝찝하다는 듯 바닥을 한 번 내려 보고 손잡이를 들었다.
 “흡.”
 노가다꾼이 힘을 주자, 손잡이에 붙어있는 네모난 콘크리트 덩어리가 딸려 올라왔다. 들다가 손잡이가 부셔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두꺼운 콘크리트였다.
 “흐아…, 흐아….”
 드는 도중 잠시 쉰 다음, 노가다꾼은 겨우 콘크리트를 바닥에서 들어 올려 옆으로 밀어냈다.
 “무식하게 만들어 놨구만.”
 들어낸 콘크리트 아래쪽으로 사다리가 연결되어 있고, 그 옆으로 B103이라는 하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말한 대로 치웠으니까, 얼른 나가는 길이 맞는지 확인해 보쇼, 교수 양반.”
 대피소 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구석에 있는 통로로 모였지만, 아래쪽에 무엇이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교수가 건축 잔해물에서 돌덩이를 하나 들어 아래로 던지자, 풍덩 하는 물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물소리 아냐?”
 “아쿠아리움 맞는 것 같은데요?”
 “아래쪽 상황이 어떤지 정확히 봐야 할 것 같지만, 여기가 B103이라면 출구에서 가까운 것 같아요.”
 “얼마 정도?”
 교수가 바닥에 설계도를 내려놓았다. 손전등을 비춰, 자신들이 있는 곳과 출구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뭐야, 당장 내려가면 되겠구만.”
 교수의 손에서 손전등을 낚아챈 노가다꾼은 조심스럽게 사다리 위에 다리를 올렸다. 사다리는 노가다꾼의 체중에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해 보였다.
 “잠깐….”
 교수가 말릴 틈도 없이 노가다꾼은 사다리 아래로 내려갔다. 나머지는 전등 불빛이 사라지는 것을 위에서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불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대피소 안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다음은 내가 가겠어.”
 두 번째로 도우미가 사다리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곧 아래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밝은 빛이 비치고 노가다꾼이 다시 올라왔다.
 “뭐…, 왜, 왜 올라온 거예요?”
 대학생의 질문에 노가다꾼은 말없이 사다리에서 올라와 콘크리트 위에 걸터앉았다. 자세히 보니 불빛에 비친 다리 부분이 전부 물에 젖어 있었다.
 “전부 물이야.”
 탈출의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표정에 전부 실망한 기색이 떠올랐다.

 #3

 ‘…구조대는 지하에 있는 아쿠아리움으로 진입이 가능한지 여부를 조사하고 있으나, 붕괴 우려가 있어….’
 “이런 씨발. 지들 죽는 건 무섭고, 우린 여기서 그냥 뒈지라는 거야?”
 노가다꾼이 화를 참지 못하고 라디오를 걷어차려다가 멈췄다.
 “아래 상황이 어떤지 좀 제대로 말해 봐요. 그래야 뭘 할 거 아니에요.”
 대학생이 옆에서 노가다꾼에게 말했다.
 “말하면 뭐 어떻게 할 건데? 니가 내려가기라도 할 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냥 사다리가 끝나는 지점부터 물이야. 아래에 뭐가 있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런 물이라고. 알겠어, 어? 오도 가도 못 하는 물!”
 도우미는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대학생은 사다리 옆에 서서 아래를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검은 공간에서 찬바람이 매섭게 올라왔다.
 “그래도 누군가 나간다면 우리는 살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다른 사람들이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수였다.
 “아니 전신에 물인데, 어디로 나간단 말이야?”
 “우리가 있는 위치에서 입구까지는 백 미터가 조금 넘는 거리에요. 누군가 내려가서 출구를 찾아볼 가치 정도는 있지 않을까요?”
 교수의 말을 듣던 노가다꾼이 옆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망치를 꺼냈다.
 “난 못가.”
 콘크리트 위에 앉은 채 나머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셋 중에서 알아서 정해.”
 대학생과 도우미, 교수가 각자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나…, 나도 못가.”
 도우미가 고개를 흔들었다.
 “난 진짜 수영 못해.”
 “그럼 둘 중에 정해.”
 노가다꾼이 교수와 대학생을 쳐다보았다.
 “모…, 못가요. 여길 어떻게 가요? 거기다 아쿠아리움 이잖아요? 아래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알아요?”
 여대생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여기서 다 죽자는 말이야? 넌 체대니까, 수영할 수 있을 거 아냐?”
 “그냥 여기서 기다리면 안 돼요? 이제 먹을 물도 충분하겠다, 여기서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티면 되잖아요.”
 “그걸 확신 못 하겠으니까, 이러는 거 아냐?”
 노가다꾼이 손전등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천장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그럼, 내려가면요? 내려가면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있나요?”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노가다꾼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대학생은 교수를 쳐다봤다. 교수는 대학생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었다.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게 우리가 처음에 자기소개를 했던 이유 아닌가? 나는 죽기 싫으니까, 나머지 셋 중에서 알아서 정하란 말이야.”
 그 말을 들은 도우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난 수영 못해. 진짜야. 그리고 내가 잘하는 일은 저 아래 내려가는 일이 아니니까, 난 여기에 있어야겠어.”
 어느새 도우미는 노가다꾼의 뒤에 서 있었다.
 “저, 저기요….”
 갑작스러운 도우미의 태도 변화에 대학생은 할 말을 잃었다.
 “미…, 미안하지만 나도 수영은 좀….”
 교수는 발걸음을 옮겨 어느새 도우미와 노가다꾼 옆에 섰다.
 “교수님!”
 대학생이 항의하듯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교수님 수영하실 줄 아시잖아요! 전에 교양수업 하실 때 수영 잘한다고 자랑하셨잖아요!”
 “그…, 그건 오해야. 그리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자네가 나보다 낫지 않겠나. 게다가 내가 없으면 여긴 건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세 사람의 시선이 다시 대학생에게로 모였다.
 “내가 못 내려가겠다고 하면요?”
 “아니, 우린 널 보낼 거야.”
 대학생은 손전등의 빛 사이로 나머지 세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저마다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지만, 누구 하나라도 걸리기만 하면 금방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눈매를 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내려가서 나가는 길을 찾는다면,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여기 있다고 말해 줄 것 같아요?”
 “그건 문제가 안 되지.”
 노가다꾼이 일어나 대학생의 팔목을 잡았다.
 “꺄악. 뭐, 뭐에요.”
 노가다꾼은 가방에 들어 있던 가느다란 공업용 로프를 대학생의 오른쪽 손목에 감았다. 얼핏 봐도 백 미터가 넘는 길이였다.
 “우린 나갈 곳이 있는지만 알면 되는 거니까 말이야.”
 대학생은 그제야 노가다꾼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노가다꾼은 자신을 미끼로 아래쪽에 위험한 것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작정이었다. 만약 위험한 것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 자신도 직접 내려가 탈출할 것이 틀림없었다.
 사다리 아래쪽을 내려다보자, 방금전까지 생각했던 공포가 다시 머릿속을 떠돌았다.
 노가다꾼은 사다리가 끝나는 쪽부터 물이 차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일반 수조가 아닌 대형 수조였고, 그에 걸맞는 어종에 살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물 온도도 차갑고, 들어가는 순간 상어가 자신을 물려고 덤벼들지도 몰랐다. 더 위험한 생물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
 눈물이 찔끔 났지만, 뒤에 있는 세 사람은 자신을 절대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을 것 같았다. 추위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뭐해? 빨리 내려가지 않고.”
 대학생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본 다음, 눈을 질끈 감고 사다리로 내려갔다. 손에 매여있는 로프는 도우미가 들고 있었다.
 사다리를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대학생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래쪽에 있는 물 때문에 춥고 음습한 느낌이 그대로 몸을 타고 올라왔다. 발에 물이 닿았을 때는 너무 놀라 비명이 나올 뻔했다.
 손전등을 물 아래로 비춰 봤지만, 짙은 어둠만 보일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학생이 들어갈지 말지 우물쭈물하자, 사다리 위에서 노가다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들어가고 뭐 하는 거야?”
 올라가도 상황은 변함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물에 들어 갔다 자칫 출구를 찾지 못하면, 확실하게 죽을 거라는 것을 대학생은 알고 있었다. 굳이 저들 때문이 아니더라도, 매서운 물의 차가움 때문이었다.
 “제발….”
 숨을 막은 채 손전등을 들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손전등은 방수가 되었지만, 밝기가 약해 바로 앞에 있는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제발, 자신보다 큰 생물체가 없기를 빌면서 대학생은 앞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벽이 나타났다. 얼마 전 헤어진 남자 친구와 아쿠아리움에 왔던 기억이 났다. 다른 곳이긴 했지만, 여기도 어딘가에 다이버들이 드나드는 통로가 있을 터였다. 손목에 있는 줄을 붙잡고 다시 사다리가 있는 곳까지 올라왔다.
 “푸하.”
 손에 묶어둔 밧줄이 이렇게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숨을 크게 한 번 고른 다음, 다시 물속에 뛰어들었다. 유리벽을 붙잡고 나가는 통로를 찾으려고 안으로 들어가자 무언가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눈을 질끈 감자 온몸에 부딪치는 충격이 몰려와 손전등을 놓쳐버렸다. 숨이 막혀 눈을 잠깐 뜨자 수천 마리가 넘는 물고기 사이에 휩싸여 있었다. 얼마 전에 봤던 정어리들이 생각났다. 손에 매여있는 밧줄을 허겁지겁 당겼지만, 밧줄은 팽팽해지지 않았다. 물이 입안으로 들어오고, 숨을 쉴 수 없는 괴로움에 온몸이 헐떡이며 팔을 휘젓자, 손끝에서 딱딱한 것이 잡혔다.
 철문이었다.
 누군가 닫지 않고 나간 듯 계단과 연결된 철문이 열려 있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듯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더 올라가자 얼굴이 물 밖으로 나왔다.
 “흐악…. 헉…, 푸악….”
 뱃속에 든 물을 토해내고 미친 듯이 기침을 했다. 조금 정신이 들자 오한이 몰려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바깥으로 나가는 문도 열려 있었다. 건물이 무너지기 전 누군가 급하게 나간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하하…, 하하하.”
 그 좁은 대피실에서 탈출했다는 기쁨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느슨해져 있던 밧줄이 다시 팽팽해졌다. 문으로 내려와 조금 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쿠아리움의 출구가 나왔다. 교수가 말했던 대로였다.
 “이제 여기만 열면.”
 대학생은 탈출의 마지막을 장식하듯 있는 힘껏 문을 밀었다.
 “어…?”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손잡이가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잠겨 있지는 않았다.
 “이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이 아무리 힘을 줘도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저 멀리 사이렌 소리, 사람이 외치는 소리 등이 얼핏 들리는 것 같았다.
 “여기요. 여기에요. 여기 있다구요.”
 문을 두드리며 외쳤지만, 바깥에서 먼지만 흘러나올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무래도 앞쪽에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무너져서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팔에 묶여 있는 로프가 다시 팽팽해졌다.
 누군가가 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대학생은 바깥쪽으로 통하는 통로를 한 번 보고, 다시 대피소 쪽으로 돌아가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직 무너져 내린 곳은 없었지만, 천장에는 자그마한 균열들이 무수히 발생해 있었다. 몸을 돌려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두드리며 다시 외쳤지만, 구조대에게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학생은 대피소 쪽 계단을 다시 바라보며 손목에 묶인 로프를 풀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자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4

 ‘…새벽 02:30분 소방당국은 붕괴 현장을 여전히 수색하고 있으나…, 하고 있습니다. 1층 현관에서 피해자가 발견된 가운데…, 지방색전증으로…. 기온이 점점 영하로 떨어지는 가운….’
 “이 시팔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노가다꾼이 벽을 치며 성질을 냈다. 대학교수는 말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으며, 도우미는 양손으로 로프를 꽉 잡은 채 울고 있었다.
 대피소는 어느새 3분의 2 이상이 무너져 내려 있었다.
 “벽 치지 마. 이 미친 새끼야. 더 무너지면 어쩌려고 그래?”
 도우미가 울면서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먼지와 시멘트 조각이 쉴새 없이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니가 이 민친년아 중간에 그 로프를 놓쳐서 그렇게 된 거잖아? 어?”
 “그럼 그렇게 갑자기 확 당기는데 안 놓고 배겨? 그리고 다시 주워 왔으니까 됐잖아.”
 도우미의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당겨봐. 혼자 살겠다고 도망갔을지도 모르니까 당겨봐.”
 “싫어.”
 “진짜 이 민친년이….”
 노가다꾼이 도우미를 때리려는 듯 오른손을 들었다. 하지만 도우미는 악에 받쳐 멈추지 않았다.
 “싫다고. 이대로 당기면 시체가 나올 거 아냐. 싫다고. 싫어. 이 미친 새끼야. 니가 당겨.”
 도우미는 자포자기한 듯 두 손 꽉 쥐고 있던 로프를 집어 던질 듯 치켜 들었다.
 “잠깐만요.”
 조용히 앉아 있던 대학교수가 도우미를 말리듯 로프를 움켜쥐었다.
 “로프가 떨리고 있어요.”
 그 말과 동시에 세 사람의 시선이 도우미가 들고 있던 로프로 향했다. 악에 받친 채 잡고 있던 도우미의 손이 추위에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손 치워 봐.”
 노가다꾼이 도우미의 손에서 튕겨내듯 로프를 빼앗았다. 희미하지만 로프를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곧이어 사다리를 타고 대학생이 올라왔다.
 “으헉…, 쿨럭….”
 대학생은 올라오자마자 토하듯 뱃속에 든 물을 쏟아 냈다.
 “통로를 찾은 거야 뭐야? 빨리 말해.”
 “으으으으….”
 노가다꾼이 보챘지만, 대학생은 창백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추운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빨리 말 안 해?”
 “많이 힘들어서 그런 것 같으니 잠시만 기다립시다.”
 대학교수가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대학생에게 덮어줬다. 천장 위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대피소가 다시 무너져 내렸다.
 “어어어, 어…, 어떡해.”
 도우미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치며 벽 끝으로 붙었다. 이제 대피소는 처음 왔을 때의 5분의 1정도 공간만이 남아 있었다. 
 “있어요…, 흐억.”
 나머지 세 사람의 시선이 대학생에게 집중되었다.
 “이…, 있는데….”
 “있는데, 어떻게 문제가 생긴 건가요?”
 “앞이 무너져서 나갈 수가 없어요…. 으흑….”
  침착을 유지하던 대학생의 목소리가 점점 서럽게 흐느끼는 목소리로 변했다.
 “으휴.”
 노가다꾼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한숨을 쉬고 바닥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도우미의 속옷이 적나라하게 보였지만, 피로와 스트레스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 사람들이 있긴 한데. 들리지가…, 들리지가 않아요.”
 “뭐? 거기가 어딘데?”
 “사육사들이…, 사용하는 것 같은 통로가 있어요.”
 대학생이 떨리는 손을 들어 사다리 아래쪽을 가리켰다. 처음 갔을 때 묶었던 로프는 반대편 통로 쪽 철문에 묶여 있었다.
 대학생의 말을 들은 노가다꾼이 연장 몇 개를 챙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비좁은 통로를 향해 발을 내렸다.
 “어, 어디 가는데.”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쳤다.
 “어디긴 어디야.”
 노가다꾼은 대학생이 말한 통로를 가리키듯 턱을 움직였다.
 “나, 나도 데려가.”
 도우미가 다급하게 노가다꾼의 어깨를 붙잡았다. 노가다꾼은 뿌리치듯 도우미의 손을 잡아 밀쳤다.
 “아야, 이 씨발. 뭔데 이 새끼야. 너 혼자 살거야?”
 “원래 이런 데서는 각자도생 하는 거야. 몰라?”
 노가다꾼은 다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대피소의 천장에서 시멘트와 먼지가 떨어졌다.
 “제발. 제발. 제발 나 좀 데려가 줘. 진짜 수영 못한단 말이야. 제발….”
 도우미가 노가다꾼에게 절규하듯 빌었지만, 노가다꾼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려갔다.
 “그럼…, 저도.”
 노가다꾼에 이어 대학교수가 비닐에 감싼 라디오를 들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 좀. 저도 데리고 가세요…, 제발.”
 도우미가 교수의 팔을 붙잡았지만, 대학교수는 냉정하게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이 나이가 되니 제 몸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서요….”
 곧이어 대학교수가 물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당신 체대라면서. 어? 좀 일어나서 나 좀 데리고 같이 나가라고….”
 누워 있는 대학생을 보며 도우미가 마지막 울분을 짜내듯 애원했지만, 대학생은 여전히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발….”
 도우미가 절규하며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몸이…, 몸이 움직이지…, 않아요.”
 몸을 떨면서 대학생이 말했다. 괜히 다시 대피소로 돌아왔다는 억울함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뒤섞인 눈물이 흘러나왔다. 
 시멘트와 먼지가 떨어지던 대피소 지붕이 완전히 철근을 드러내며 무너져 내렸다. 대학생과 도우미 모두 눈을 질끈 감았다.
 “대장님. 찾았습니다. 생존자 두 명. 여자 생존자 두 명입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환한 빛이 두 사람을 비추기 시작했다.

#5

 ‘…새벽 03:30분 소방당국은 붕괴 현장에서 피해자 두 명을 구조했습니다. 피해자들은 바로 아래 위치한 발견 되었으며, 스스로 걸어…, 추가 인원이 있는 것으로 판단, 구조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 시팔년들….”
 노가다꾼은 대학생과 도우미가 구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욕설을 퍼부었다. 급하게 로프를 당겨보았지만, 이미 끊어진 듯 힘없는 로프 끝자락만이 딸려왔다.
 “니가 이 아래 탈출구 있다고 말했잖아 응? 어떻게 책임 질거야 이 씨발.”
 노가다꾼은 대학교수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단지, 방금전보다 상태가 안 좋아진 라디오에서 자그마한 구조 소식이 들려 올 뿐이었다.

#6

 ‘새벽 02:18분 소방당국은 붕괴 현장에서 약 100미터 떨어진 지점…, 남성 2명 발견….’
 대학생의 어렴풋한 기억과 대규모 구조대의 노력으로 약 하루 뒤 동사 직전의 노가다꾼과 대학교수가 발견되었다. 정부는 이들 네 명의 기적적인 생존 소식과 탈출기를 홍보하려 애를 썼으나, 생사고락을 같이 한 사람치고는 서로 데면데면한 것 같다는 세간의 평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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