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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피우고 싶은, 혹은 피우고 있는 이들에게 (반말주의. 죄송합니다)
게시물ID : gomin_14853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익명aGhua
추천 : 11
조회수 : 445회
댓글수 : 104개
등록시간 : 2015/07/22 21: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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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나는 서른 네살이다. 여자고, 싱글이다. 


20대에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독신주의 까지는 아니었지만, 결혼에 대한 환상은 전혀 없었고, 결혼의 유지에는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는 엄청난 바람둥이였다. 처음 제대로 정황증거를 포착한 게 중학생이었던 나였고, 당연히 엄마에게 알렸다. 

이후 몇 달간 집안은 지옥이었다. 

부모님은 이혼을 하겠다고 했다가, 싸웠다가, 수그러들었다가를 반복했고 외동딸이던 나는 누구와도 이런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했다. 

당시 살던 곳은 지방이었는데, 아빠의 바람 때문에 이사를 간 거였다(나중에 안 사실이다). 

그 지역에서 나는 서울말을 쓴다고, 지방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왕따를 당했다. 

선생님도 한몫했다. 

한 번은 반 아이 하나가 숙제로 낸 내 일기장을 훔쳐 읽었다. 그 애는 다른 애들도 있는 교실 한 가운데에서 내 일기를 큰 소리로 외우기 시작했다. 요리조리 피하면서 외우는 그 애를 말릴 길은 없었고, 굴욕적이었다. 

교무실로 찾아가 선생님께 말했다.

선생님은 종례 시간에 나와 그 아이를 불러냈다. 그리고 그 애의 손바닥을 내 앞에서 몇 대 때렸다. 

나에게는 그랬다. "서울애들은 다 그러냐"고. "여기 애들은 독립적이어서 스스로 해결하는데, 너네는 친구가 잘못한 걸 감싸주지 못하고 다 말하냐"고.


.. 뭐 그런 시기였다. 집에 오면 아빠는 술을 마시고 밤새 소리를 질렀고, 함께 살던 친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에게 '며느리가 바람이 나서 내 아들이 저런다'고 얘기했고, 엄마는 매일 울었고, 나는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 나가면 혼자였다. 

점심시간엔 모두 도시락을 싸와서 먹었는데, 내 자리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원이 생겼다. 나는 그 원 한 가운데서 밥을 꺼내 꾸역꾸역 먹었다. 아무렇지 않은척 밥을 먹고나선 운동장 한 구석으로 가서 울었다. 



할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농약으로 자살을 시도했고, 경찰들에게 잡혀왔다. 그래서 고모댁으로 보내졌다. 

결국 몇 달 지나지 않아 자살에 성공하셨다. 



여튼 그 사건으로 우리는 다시 서울로 이사를 왔다. 

엄마는 나 때문에 이혼하지 않고 산다고 했다. 난 그게 싫었다. 아빠는 내 탓이라고 했다. 부모가 잘못한 게 있거나 부족한 게 있으면 덮어줘야지 왜 입을 함부로 놀리냐, 했다. 중간에서 부모님 사이를 좋아지게 돕지는 못할망정 못된 딸이라 했다. 

사실 아빠는 원래 극단적이었다. 엄청난 친절을 보이다가도, 뭔가 맘에 들지 않으면 날 괴롭혔다. 바람 사건 이후로는 항상 날 미워했다. 내 앞에서 엄마를 흉보기도 했다. 니네 엄마가 뭐가 이쁘냐고, 바람 피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거라고. 

부모님은 내가 스물 일곱이 되던 해 이혼에 성공했다. 
그때도 아빠는 날 원망했다. 내가 중간에서 다리역할을 안 해서 그런거라고 했다. 나쁜 딸이고, 가족도 아니라고 했다. 
당시의 집은 아빠가 가지고 엄마랑 나는 몸만 나오기로 했는데도, 에어컨을 가져가겠다고 했더니 식탁 의자를 들어서 나에게 던졌다. 

이혼 후 일년이 지난 내 생일날, 아빠는 처음으로 나에게 연락을 했다. 
만나자마자 엄마랑 재결합하게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두분이 그걸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도울 생각은 없다고 했다. 아빠는 내 생일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리고 아빠와 다시 만난 적은 없다. 소문으로 중국여자와 재혼했다고 들었다. 이혼했다는 소문도 들었다. 
지금은 반년에 한 번쯤 카톡이 한 줄씩 온다. 회개하라는 내용이 마지막 카톡이었다. 



한창 사춘기였을 시기에 나는 일년에 한 번씩 아빠가 바람피운 상대가 없는 동네로 전학을 갔고, 2년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왕따를 당했다.

이유는 항상 비슷했다. 
중간고사 기간에 전학을 간 적이 있었다. 다들 시험을 급히 준비하고 있길래, 나는 준비도 안 되어있고 해서 그냥 책을 읽으며 시험 시간을 기다렸다. 
다음날부터 나는 잘난척하는 애가 되어있었다.
한 번은 전학을 갔는데, 선생님이 조회시간에 떠들던 애랑 자리를 바꿔주었다. 쉬는 시간에 그 아이가 와서 '담탱 없을 땐 원래대로 앉자'고 했고, 나는 싫다고 대답했다. 그 애는 소위말하는 '반짱'이었고 나는 그날부터 왕따를 당했다. 
뭐, 그런 식이었다. 대부분 내가 책을 읽는 것을 고깝게 여겼다. 중학교때 나는 삼국지와 임꺽정, 유럽 소설들을 좋아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내가 HOT 리더가 누군지 모르는 것을 비웃었다. 

사실 나로서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부모님과의 사이는 멀었고, 그 둘은 서로 사랑하지 않았고, 형제도 없었고, 친구가 생길라치면 전학을 다녔다. 
변함없이 곁에 있어준 것은 책뿐이었다. 



그렇게 자라난 나는 기본적으로 사랑이나 남자를 믿지 못했다. 

스무살 이후 남자와 사귀기 시작했지만, 완전히 맘을 놓아본 적은 없었다. 결혼하고 싶지도 않았다.

남자란 그저 잠깐 만나는 상대지, 믿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 느꼈다. 
길에서 커플을 보면 예뻐보이다가도 그들이 부부란 걸 알게 되면 이상한 동정심이 들 정도였다. 

좋은 사람도, 그렇게 좋지는 않은 사람도 만나봤지만 내 연애는 2년을 채 넘지 못했다. 이 나이까지 일년 반 정도 만났던 상대가 둘 뿐이고, 보통은 반년에서 일년 정도면 끝이났다. 

사랑이란 건 시간이 지나면 결국 변할거란 생각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나도, 상대방도, 사랑도 믿지 않았다. 그저 순간의 감정만 믿었다. 





그렇게 서른 네살이 되었다. 

물론 지금까지 했던 연애가 모두 결실 없이 끝난 게 다 아빠 탓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아빠 덕에 지금의 내 모습이 완성된 것만은 맞을거다.

부모님이 좀 더 일찍 이혼을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언제나. 

중학교 이후 27살이 될때까지 맹렬하게 아빠를 증오했다가, 가족이란 말을 앞세워 용서하려 애썼다가, 차갑게 비웃었다가, 불쌍해했다가, 원망했다가, 저주했다가를 반복한 것은 내 인생의 너무나 많은 시간을 너무나 처참하게 갉아먹었다.

나에겐 초등학생때의 몇 몇 순간을 제외하면 가족 내에서 즐거웠던 기억이 없다. 

가족을 이루는 일을 꿈꾸기도 하지만, 여전히 두렵다.




바람이란 건 그런거다. 가까운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뒤흔들어놓을 수 있는 그런 거. (사실 내 아빠란 사람에겐 바람기 외에도 수많은 성격적 결함이 있었지만)

그냥 참고 살아주고 말고, 그건 배우자끼리 성인끼리의 문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길 하고 싶었다.

결혼도 안(못)한 주제에, 이런 얘긴 뭔가 싶지만.. 사실은 지금 마감이라서 그렇다.

원래 마감기간이 오면 뭐든 마감과 관계가 전혀 없는 딴 일을 하고 싶어지는 거잖아.




출처 출처는 일거리가 쌓였는데 일만은 하고 싶지 않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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