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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백제 성왕... 그 마지막 길[BGM]
게시물ID : history_1488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동물의피
추천 : 20
조회수 : 3148회
댓글수 : 25개
등록시간 : 2014/03/20 10:26:56
 
영화 은행나무 침대 OST
 
 
 
 
 
[출처]이종격투기
http://cafe.daum.net/ssaumjil/LnOm/1278491
글쓴이:센이고르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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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  성왕 영정>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결성한다.
한동안 양국간의 협력은 550년에 신라와 힘을 합쳐 한강유역을 진출하는데 성공하면서
어느정도 효과를 보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성왕은 한강유역을 확실하게 점유하려고 했지만
신라의 진흥왕이  배신  뒤치기를 때리면서 한강유역을  신라가  강탈함....
 
이에  빡돈 백제성왕은  대군을 일으켜  신라와 전쟁을 하게되는데....
백제의 주력은  태자 부여창이  지휘하였고
임금인  성왕은  조력을 하는 조공 역할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쨋든..  이  전쟁의 이야기는   백제 성왕의  전사라는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자......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穠與加良 來攻管山城。軍主角干于德伊飡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15년(서기 554) 가을 7월, 명활성(明活城)을 보수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明穠)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만9천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삼국사기》진흥왕 본기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32년(서기 554) 가을 7월, 임금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혼전 중에 임금이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 《삼국사기》성왕 본기
 
삼국사기  기록을 보자면,  성왕이  겨우 50명만  대동하고  신라진영을  습격했다고 전하는데
솔직히  이건 말이 안된다는 해석이 많다... 그런데  성왕의 전사를 전하는 또 다른 기록이 있는데..
우습게도  <일본서기>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명왕(明王:성왕)은 여창(태자)이 오랫동안 행군하느라 고통을 겪고 한참 동안 잠자지도 먹지도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고자 하였다.
- <<일본서기>> -
 
 
음....  겨우 50명만 대동하고  신라진영을 습격했다는 이야기 보단,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주력군을 지휘하던  아들이  아프다기에  아비로서 위로하고자  호위만 이끌고
아들의 진영으로  가다가  신라의  매복에  걸려서  살해당했다는게 더 자연스러운 추측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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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전투  현황....지금의  금산과 옥천 일대 지역이다.  성왕은 그림처럼
아들인  태자를 위무하려고  저 루트를 따라  이동하다  신라군의 GOP가 있던 삼성산 아래..
구진벼루(구천벼랑)에서  신라군의 매복에 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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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 삼국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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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기병  고증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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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의  진영으로 가는 길이  신라군의 최전방 GOP가 있는 삼성산 기슭을 지나는  위험한 루트인데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일을 벌였는지  의문이다....
 
 
 
 
성왕 전사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기록한것이 <일본서기>인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라는 명왕(明王:성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때 신라에서 좌지촌(보은)의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삼국사기의 고간도도)에게 "고도는 천한 노비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비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고도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고노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다른 책에는 "신라가 명왕의 두개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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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이  주둔한  고리산성 방면으로  향하는  루트에  무심히 흐르는 하천....성왕은 이길을 따라
50여명의  기병만을 호위로 대동하고  신라의  매복도 모른채  쓸쓸히  달려갔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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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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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멀리  작은  비석이  하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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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비석이  백제 성왕이  신라의 매복에 걸려  사로잡혀  참수당한것을 기리는  비석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성왕이  전사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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