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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영웅 혹은 폭군 스탈린(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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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2
조회수 : 788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1/05/21 16:56:56
구글어스로 본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지역 사진입니다.
 
31. 피의 블랙홀 -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8월에 이르러 청색 작전을 진행 중이던 독일군은 동쪽으로 이제 볼가강에 도달해 

볼가강 연안의 도시 스탈린그라드를 점령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아니 그런것처럼 보였습니

다. 몇일이면 점령할 줄 알았던 도시가 몇달이 지나도 점령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독일군은 A/B 집단군으로 나뉘어서 A 집단군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전진하여 목표인 그로

즈니에 거의 도달했고, B 집단군은 선두의 6군이 스탈린그라드를 두드리며 볼가강을 넘어

서 카스피해 연안의 주요 유전지대를 장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초 계획과는 달리 스탈

린그라드는 쉽사리 점령되지 않았습니다 원래 차리친 (노란강(물)이란 타타르어, 지금은 볼

고그라드) 이란 이름을 지닌 이 도시는 앞서 지난 글에서 설명한대로 볼가강의 수로의 중심

지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였습니다. 이 도시를 장악하고 수로와 철도를 차단한다면 소련의 

주요 유전지대와 소련의 나머지 부분을 차단시킬 수 있으므로 상당히 중요한 전략적 가치가 

있었죠. 그 가치는 적백 내전에서도 입증된 바가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앞서 적백 내전 당

시 이 도시에 사령부를 마련하고 군을 지휘(?)한 적이 있다는 것은 이전 글에서 설명한 대

로입니다. 이 도시는 그 인연으로 1925년 이름을 스탈린그라드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당

시 떠오르던 실세 스탈린의 눈에 들기 위한 공산당원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잠시밖에 이 도시에 없었던 서기장 동무이지만 스탈린도 이 도시의 중요성을 깨달았

고, 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이기에 특별히 여겨서 본래 이 지역은 5개년 개발 계획당시 

집중적으로 공업화된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의 특징은 구글어스에서 보듯이 볼가강 서안에 

늘어선듯이 위치한 도시라는 것인데요. 따라서 독일군은 볼가강과 돈강을 도하하지 않는 이

상 이 도시를 포위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그런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볼가강 반대

쪽에도 많은 소련군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쉽게 우회하긴 어려웠죠. 이런 특징을 

이용해 독일군의 끊임없는 공습과 폭격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지속적으로 병력과 물

자를 강을 건너 투입했기 때문에 이 도시가 그토록 점령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 도시에서 이렇게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게 된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이 전

투가 6개월에 걸쳐 무려 500만명의 피를 빨아먹은 블랙홀이 된 것은 몇가지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최초에는 중요 목표중 하나인 이 도시는 스탈린에겐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는 

마지노 선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물론 전략적 요충지인건 사실이었고, 이 도시를 상실하고 

볼가강의 수로를 내준다면 소련이 위험해지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그 이상으로 스탈

린은 자신의 이름을 딴 이 도시를 적에게 넘겨주기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이 독재자의 자존

심의 보루였지요. 한편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히틀러는 이 도시를 꼭 점령하려고 했습니다. 

점점 이 전투는 이 콧수염 달린 두 독재자중 누구 고집이 더 센지를 겨루는 것 같은 양상으

로 변해갔습니다. 파울루스가 이끄는 독일 6군은 이 도시를 꼭 점령하려 했고, 소련 62군은 

어떤 희생에서도 이 도시를 사수해야만 했습니다. 파울루스 장군은 처음에는 전투를 매우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피의 블랙홀 안으로 부하들을 진입시킨 순간 그들은 아무리 

죽여도 다음날이면 더 많이 나타나는 소련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독일군의 장기는 

넓은 평지에서 빠른 속도로 전투를 벌이는 기동전에 있었으며, 그들에게 시가전은 낮선 영

역이었습니다. 일단 그들이 이 도시로 들어간 순간 폐허가 된 도시에는 곳곳에 소련군이 숨

어서 그들을 노렸습니다. 그래서 양군에서 모두 저격수의 중요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래도 독일군은 정예한 군대답게 매섭게 소련군을 밀어 부쳤습니다. 그들은 곧 도시의 

80%를 장악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20%는 끝내 장악할 수 없었습니다. 소련군은 볼가강에

서 계속 넘어와서 엄청난 피를 뿌리며 이 도시를 지켜냈습니다. 소련 각지에서 기초적인 훈

련만 받은 신병들이 볼가강을 건너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했지요. 어떤때는 심지어 그들에게
 
나누어줄 총이 모자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병사들은 전선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 를 보신분은 알겠지만 실제로 소련군은 그런 상태에서도 깃발만

이라도 들고 나가야 했습니다. 이 도시를 사수하라는 스탈린의 명령은 그만큼 잔인하고도 

절대적이었습니다. 스탈린은 이 도시를 사수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국민들을 얼마든지 희

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도시의 지키는 소련 62군의 사령관은 본래 알렉산드르 

로파틴 이었으나, 그는 부하들이 너무 희생되자 부하들을 볼가강 동안으로 소개시켰습니다. 

그 이유로 그는 면직되었고, 이를 이어 바실리 추이코프가 62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

다. 이 결정은 현명한 것으로 판명되었죠. 그는 어떠한 희생을 치뤄서라도 스탈린그라드를 

지킬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새로이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이 된 

예레멘코와 정치위원인 흐루시초프도 손발이 잘 맞는 콤비로 좀처럼 독일군의 승리를 허용

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히틀러는 이제 거의 미치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비록 

전략 요충지일진 몰라도 본래 스탈린그라드가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히틀러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고 말았습니다. 본래대로라면 카프카스 지역을 장악해야할 

부대들이 소환되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되었으며, 차라리 이 도시를 우회하여 볼가강

의 수로를 차단하자는 장군들의 애원도 히틀러에게 거부 당했습니다. 이러한 히틀러의 오판

이야말로 종국에는 독일군은 붕괴시키고 소련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최고 

사령관 대리 및 부 총사령관이 된 주코프는 참모 총장인 바실레프스키와 함께 스탈린그라드

를 살릴 묘안을 가지고 스탈린을 찾아왔습니다. 그 묘안이란 62군이란 미끼를 물고 계속 실

랑이를 벌이는 독일군의 양 측면에 있는 약체인 루마니아군과 이탈리아군을 격파해서 독일 

6군을 포함한 적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죠. 이른바 '천왕성 작전' 이라는 이 작전은 주코프

의 입안으로 알려져 있지만 바실레프스키나 다른 소련군 지휘관도 이러한 아이디어는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건 독일군도 걱정했던 문제이니 아이디어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

나 어려운 문제는 45일에 걸쳐 100만이 넘는 병력을 독일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양측면에 

집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독일군 사령부가 소련군의 예비 

병력이 더 없을 것이라 오판했기 때문입니다) 주코프는 이 어려운 임무를 실행에 옮겼습니

다. 그러나 더 어려운 일은 독일군의 매서운 공세 앞에 45일이나 추이코프와 예레멘코가 더 

버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전투 의지를 유지하기 위해 주코프는 일부러 이들에

게 이 사실을 몇일 전까지 말하지 않았습니다)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이 작전이 

성공한 건 모든 장군들이 반대하는데 히틀러가 독일군을 계속 이 도시에 잡아두었기 때문이

었습니다. 결국 군사 전문가들의 의견을 끝까지 무시한 히틀러가 일을 그르친 것이지요. 스

탈린이 적당한 시기에 실제적 지휘권을 주코프를 비롯한 군사 전문가들에게 이양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큰 차이를 만들었다는 것은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1942년 11월 19일 100만 이상의 소련군이 남과 북에서 독일군 양측면

의 루마니아군과 이탈리아군을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순식간에 스탈린그라드 주변을 

장악해 계획대로 6군을 비롯한 독일군 33만명을 포위망에 가두는 것에 성공합니다. 이 위

기 상황에서 상식적인 지휘관이라면 포위망을 뚫고 일단 빠져나오는게 정상일 것입니다. 독

일 6군의 지휘관인 파울루스는 물론 모든 독일군 장군들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

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상황을 완전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스탈린그라드 점령

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고립된 군대가 계속 싸우게 할 수 있는 총통의 

비결은 바로 항공기를 이용한 물자 공수였습니다. 괴링은 하루 500톤 이상의 물자 수송이 

가능하다는 허풍을 쳤지요. (그러나 나중에 연구된 바로는 사실 괴링도 이런 허풍은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히틀러의 압력으로 괴링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건 누가 바도 허풍이었습니다) 한편 독일군 최고의 명장인 만슈타인에게는 급조된 

돈 집단군을 이끌고 고립된 6군을 구원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이 급조된 집단군은 이름

만 집단군으로 사실은 온갖 잡다한 병력이 모인 짜집기 군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지휘

관이 누구입니까? 독일군이 아니라 2차 대전 통틀어 최고의 명장이라 할 만한 만슈타인이

었습니다. 이 만슈타인이 공격을 가하자 주코프도 움찔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짜집기 집단군은 소련군을 매섭게 몰아치게 됩니다. '겨울 폭풍 작전' 으로 알려진 이 구

원작전은 거의 성공할 뻔 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불과 40마일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으

로 만슈타인이 전진하자 그는 파울루스에게 명령해서 포위망을 뚫고 나오라고 지시했습니

다. (그러나 히틀러의 명령은 요지 부동이었습니다. 그에게 이 도시를 포기한다는 계획은 절

대로 없었습니다) 결국 소심한 남자 파울루스는 총통의 눈치를 살피며, 연료 부족을 핑계로 

포위망을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주코프가 준비한 60개 사단과 1000대 이상의 탱크에 맞

설 만한 병력이 없었던 만슈타인 장군은 어쩔 수 없이 후퇴를 결심하게 됩니다. 자신의 부

대까지 무너지면 그 때는 카프카스 지방으로 진출한 A 집단군까지 갖히는 형국이 될 것이

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독일군 전체가 와해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파울루스와 6군을 포기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소련은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6군은 

항복하고 독일군은 다시 후퇴하는 수 밖에 없었죠. 분명 이 전투는 소련군의 승리였습니다. 

피를 빨아먹는 블랙홀 같던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은 이전의 오합지졸 군대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춘 군대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1943년 쿠르스크 전

투에서도 입증되었습니다. 

1.기동전에 익숙한 독일군들에게,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은 지옥과 같았습니다.

2.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초반부의 소련군 돌격 장면입니다. 군데군데 총도 없이 맨몸으로 돌격하는     병사들이 보입니다.

3.천왕성 작전 개요도입니다.

4.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의 주역, 바실리 추이코프입니다. 병사들에게 무자비하기로 악명 높았지만, 자신도 전투 중 수차례나 부상을 입을 정도로 용맹스럽게 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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