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이렇게 연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장 만나실 수 있는지?"
안재욱이 조금은 커진 목소리로 묻자, 핸드폰 너머 사내가 답했다.
"다,당장 말씀이십니까? 음..그래요. 오히려 일찍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어디 계십니까? 그리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사내와의 통화가 끊긴 후, 안재욱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화면 속 전화번호를 말 없이 쳐다보았다.
. . . . . . .
시간은 아홉시를 향해 있었고, 안재욱은 시내와는 조금 떨어져 있는 연립주택 골목에서 사내를 기다렸다. 가로등 불 하나만이. 희미하게 안재욱을 비추고 있었다.
10분이 지났을까? 앞쪽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사내 한명이 걸어왔다. 그가 점점 안재욱과 가까워지자, 안재욱은 저 남자가 통화를 한 사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시?"
"네! 맞습니다. 아까 통화하셨던."
"아! 반갑습니다. 오시는동안 길이 멀어서 불편하셨을텐데. 하하!"
"아닙니다. 오히려 갑작스레 만나자고 해서 곤란하셨을텐데 제가 감사드리죠."
두 남자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보며 인사를 나눴다.
전화 속 목소리의 정체인 사내가,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형사님! 송의조라고 합니다."
안재욱 역시,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안재욱입니다. 반갑습니다."
"날씨도 춥고 한데, 따뜻한 곳에 가서 얘기 나눌까요? 여기서 좀만 나가면 카페가 한 곳 있습니다."
"좋군요. 그리로 갑시다."
두 사내가 발걸음을 옮겼다.
. . . . . . .
아메리카노 두 잔이 놓인 테이블, 두 사내가 앉았다.
"아, 이 흙탕물 맛! 저는 항상 아메리카노만 마시게 되더군요. 하하!"
송의조가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신 뒤,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웃으며 말했다.
"네. 저도 아메리카노가 좋더군요."
그러나 안재욱에겐 농담보다도, 사내의 얘기가 훨씬 중요했다.
재촉하진 않았지만, 이미 그의 표정이 드러내고 있었다.
안재욱의 표정을 읽자,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던 송의조의 얼굴에서 그새 웃음기가 걷어졌다.
"음.. 하하. 네 그래요. 지금 만난 이 자리가 농담 나누자고 나온 자리는 아니니까요."
"아! 아닙니다. 제 표정이 좀 그랬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죄송하죠. 그럼, 지금부터 얘기를 나눠볼게요."
"좋습니다."
두 사내는 어느새 진지한 분위기로 바뀐 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안재욱이 먼저, 송의조에게 물었다.
"그 날, 정말로 현장을 목격하신 것이 맞습니까?"
"네. 물론이죠. 현수막에 쓰여진 내용을 보자마자 알겠더군요. 그 날, 제가 본 현장의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 생각이 딱 들었거든요."
안재욱이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넉달이나 지난 일이라, 모든걸 자세하게 말씀드리는 건 어려울 거 같지만, 그래도 대부분이 기억납니다. 워낙.. 충격적인 광경이었으니까요."
".. 그렇죠."
송의조도 잠시 마른 기침으로 목을 가다듬더니,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신 후 안재욱에게 시선을 맞춘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그 날 업무상 일로 직장 동료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던 길이었습니다. 저희 집은 시내와는 좀 떨어진 곳에 있는데, 오는 길에 비포장된 도로를 지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길은 거의 인적이 드문 길이라, 왠만해서 사람 볼 일이 없습니다."
"네. 그렇군요."
"그 길에 접어들고 한참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 앞에서 놀랄 정도로 큰 충돌음이 들리더군요. 귀가 찢어질 듯 해서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지 뭡니까. 깜짝 놀란 저는 곧바로 소리가 들리는 곳을 쳐다보았습니다."
안재욱이 말 없이 송의조에게 집중했다.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쳐다보았는데, 그때가 밤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가로등불 하나 드문드문 있는 길이다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그렇군요.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했습니까?"
"일단은,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그런데.."
막힘없이 술술 말하고 있던 송의조가, 잠시 입을 닫은 채 경직된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을 본 안재욱이, 재촉하지 않고 말 없이 기다렸다.
송의조는 다시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셨고, 깍지를 낀 채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곳으로 가보니, 여자 한명이 차에 치어 피를 흘린 채 쓰러져있었고, 차에서 남자가 내려서 그 여자의 상태를 확인하더군요."
"음..그 다음은 어떻게 했습니까?"
"차에서 내린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군요. 마치 무언가가 있는지 찾는 듯 했습니다. 그때 저는 헌옷수거함 뒤로 숨어서 상황을 더 지켜보았습니다."
"네. 계속 얘기해주시면 됩니다."
"신고를 해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핸드폰을 들었습니다. 뺑소니 현장이 아닐까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여자를 향해 병원을 데려가겠다고 말하면서, 여자를 업고 자신의 차 뒷자석에 태우더군요. 그때 저는 그 모습을 보고 뺑소니가 아니라 병원에 데려가려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잡고있던 핸드폰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때 마침 소름돋게도 핸드폰 전원이 꺼져버렸습니다."
"네."
안재욱이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린 표정으로 송의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여자를 차에 태운 남자는 곧바로 차를 몰고 현장을 떠났습니다. 거리가 있어서인지 남자의 얼굴이나 차 번호판은 보이지 않더군요. 이것이 제가 본 그 날의 광경입니다."
"그렇군요.."
안재욱은 표정을 풀고, 송의조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송의조씨의 진술은 큰 협조가 될 것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안재욱의 옅은 미소와는 다르게, 송의조는 죄송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인사에 답했다.
"아닙니다. 그 현장이 뺑소니 현장이었다는 걸 알았더라면, 곧바로 신고해서 그 남자를 잡을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제가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건가요? 이거 참..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때 제가 착각하지 않고 바로 경찰에 신고했어야 했는데.."
면목없다는 송의조의 표정을 바라보는 안재욱의 시선이 묘하게 내려앉았다.
"송의조씨,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네? 아, 말씀하세요."
"그 현장으로 저를 안내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 곳을 말입니까? 흠.."
송의조는 잠시 고민했다. 그 날의 소름끼치는 현장을 밤 늦은 시간에 다시 방문한다는 건, 아무래도 꺼림칙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협조를 위해선 거절 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네. 그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좀 거리가 있는데, 걸어가실 수 있겠어요?"
"그렇군요,아니면 제가 곧바로 차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제 차를 타고 가시죠."
"알겠습니다."
둘은, 그 날의 현장으로 향했다.
. . . . . .
"여깁니다 형사님. 으.. 정말, 그 날 이후론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른 길로 다녀요. 이 길론 절대 못 다니겠네요. "
송의조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안재욱은 현장을 돌아다니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위를 둘러보는 안재욱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 날 여인이 힘없이 쓰러진 바닥만큼, 차가웠다.
주위를 둘러본 안재욱이, 현장에 온 이후 처음으로 입을 뗐다.
"여기라면 정말 뺑소니가 일어나도 범인을 잡기 어렵겠군요. 완전범죄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그런가요?"
"네. 송의조씨가 얘기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남자가 여인을 차로 친 후, 주위를 확인했다고 했죠?"
"맞습니다. 한데, 그게 왜?"
"전 왜 주위를 확인했는지 알겠습니다. 남자는, CCTV를 찾은 것 입니다. CCTV가 있다면 찍혔을테니 말이죠."
"아!"
"그런데 참, 여긴 CCTV가 없네요. 워낙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이다보니, 가로등불도 많이 없고, CCTV는 하나도 없네요. 그 남자에겐 자신의 살인을 숨기기 최적의 조건이 아닐까요?"
"아.. 그렇겠네요. 소름끼치는군요.."
"헌데, 송의조씨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상하다고 느낀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남자는 왜 여자를 먼저 차에 태우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도 없었을 그 현장에서 혼잣말로 여인을 병원에 데려가겠다고 말했을까요? 이미 여인은, 죽어가고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정말 여인을 살리려 했다면, 주위를 확인할 것도 없이 차에 태웠어야하지 않을까요?"
"아.." 송의조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어쩌면, 남자는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CCTV는 없어도, 지금 이 현장엔 나와 이 여인 말고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재욱의 말에, 송의조가 얼어붙었다.
"그,그럼..?"
"남자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일부러 혼잣말로 병원에 데려가겠다고 들리도록 말한겁니다."
"형사님! 그게 무슨! 말도 안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남자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이미 그 순간부터, 범행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있었죠. 여인을 병원으로 데려가는 것 처럼 보인다면, 신고를 당하지 않았을테니까요."
"이럴수가.. 정말, 정말 너무 충격적이라서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송의조의 안색이 눈에 띄게 새하얗게 질렸다.
송의조는 패닉이 돼 있었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여인이 죽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의조씨의 진술 덕분에, 이 사건이 어떻게 된 것인지 완벽히 알 수 있게 되었군요. 감사합니다 송의조씨."
"아..아..네."
시간을 확인한 안재욱이, 그를 보며 말했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늦었군요. 이제 슬슬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안재욱이 뒤돌아 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송의조는, 마치 덫에 걸린 것처럼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안재욱이 차에 올라타기 전, 송의조를 보며 말했다.
"송의조씨, 제가 한가지 드리지 않은 말이 있어요."
"네? 그,그게 무슨?"
송의조가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안재욱의 눈이, 소름끼치도록 차가웠다.
그 날, 여인이 힘 없이 쓰러진 찬 바닥같았다. 피가 스며든 피비린내나는 바닥.
"나는 당신에게, 내가 형사라고 말 한 적이 없습니다."
안재욱의 말을 들은 송의조가 얼어붙었다.
송의조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지금, 덫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는, 두려움의 떠는 생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