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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불신의 시대에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게시물ID : sisa_11493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성큼성큼이
추천 : 4
조회수 : 42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2/17 03:28:13

 

언론 불신의 시대에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나아가는자

1.

근래의 시민들은 언론 전체에 대해 크게 불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언뜻보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이다. 대체로 정치와 언론은 연관되어 있어서, 정치세력별로 각 세력에 친화적인 언론이 있기 때문에 자신과 맞는 성향의 언론을 지지하고, 자신에게 맞지 않는 성향의 언론을 배척하기는 쉽다. 그런데 촛불혁명의 주역이라고 할만한 시민층의 상당수는 언론전체를 불신하는 형세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2.

여기에는 물론 언론환경 자체가 변했다는 점이 있다. 다 아는 이야기를 한번 더 설명하자면, 과거와 달리 외국의 소식, 행정부의 소식 등을 언론이 독점할 수 있던 시대와 달리,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일반인도 노력과 시간만 들이면 직접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확인한 내용이 언론과 다를 경우 인터넷 커뮤니티들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파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거 언론은 정보를 외부로부터 가져오고, 정보를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과정 전체에 대한 통제자였지만, 지금의 언론은 정보의 편집자에 불과한 상황이다.

 

이렇게 언론의 활동이 견제 및 검증의 대상이 되면서 언론의 실제 얼굴이 그닥 아름답지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물론 어느 분야이든지 깊게 파들어가면 아름다운 곳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언론은 특히나 권력과 돈이 오가는 중심지였고, 그 깊은 속내가 다른 곳보다 아름답다고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이 드러나기 전까지 언론은 사관(史官) 및 선비에 대한 오랜 존경심을 가져온 한국사회에서 나름의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므로 언론은 한국사회에서 대접과 존경을 받아오던 엘리트 집단으로서 그에 맞는 품격을 요구받았다. 그리고 인터넷 시민의 세상이 열린 지금에 와서 한국 언론은 그런 품격과 거리가 먼 집단이었다는 것이 너무도 많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기대와 언론의 실상이 보여주는 극단적 부조화는 매우 큰 불신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부조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잠깐 검토하면, 이른바 약강강약이라 불리는 언론의 편향성이다.

언론을 조선시대의 선비와 사관의 연장선상에서 대접해온 사회적 기대는, 언론이 자신의 사적인 사상이나 이념, 이익을 넘어서 공평무사하게 세상일에 대해 논평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부당한 권력에 대해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옳은 목소리를 내다가 쓰러지는 것을 원한다.

언론을 사회적 엘리트로 인정해온 한국 사회의 감성에는 언론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옳은 것을 이야기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은 대체로 권력에 굴종해왔다. 이것이 군사독재정부 시대라면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 물리적 폭력을 일삼고, 사실상의 검열을 자행하는 절대적 폭력 앞에서는 문필의 저항이란 한정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1897년의 민주화 이후 절대적 독재권력은 사라졌다. 독재세력의 여파는 정권교체를 처음으로 이룬 김대중 정권의 탄생과 함께 거의 말끔히 사라졌다. 노무현 정권이후 민주화는 제도적 단계에 올라섰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여러 불법적인 수단(예컨대 블랙리스트)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반대파를 괴롭힌 것은 사실이지만, 독재정권때와 같이 겉으로 티가 나는 물리적 수단을 동원하여 탄압하지는 못했다. 물론 보통사람이라면 옳은 말을 하다가 밥줄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언론사라는 회사는 옳은 말을 한다고 해서 밥줄 전체가 끊길 정도까지는 가지 않는다. (밥줄의 일부는 끊길지는 몰라도.) 그정도까지 티나게 공격할 수 없는 한계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시대의 주류언론들(조중동)은 민주화를 역행하는 파행들을 목격하면서도, 정권에 분칠을 해주기에 바빴다.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하는 희대의 명언은 그렇게 탄생했다. 당시의 주류언론은 자신들의 이익, 자신들의 이념에 맞는 정권에 대해서는 공평무사의 정신을 완전히 때려치우고 펜을 휘둘렀다.

그렇다면 비주류언론, 이른바 진보언론은 어떠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진보언론에 대해서도 의심어린 눈길을 주고 있지만, 나는 그래도 이명박, 박근혜 시대의 진보언론이 주류언론에 비해서는 용기있는 보도를 많이 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새누리당 정권의 언론 장악시도에 대해서도 저항한 언론인들이 상당수 되었다. MBC 해직기자들(특히 안타깝게도 사망하신 고 이용마 기자를 포함한 기자들)만 보아도 그러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불법적인 폭력이 횡행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진보언론의 비판도 상당히 조심스러웠던 부분이 있었다.

 

2016년 연말의 촛불혁명은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켰다. 민주화 세력의 계승자인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언론에 대한 불법적인 압력도 사라졌다. 민주화 세력이 적대적인 주류언론들은 민주당 정권에 대해서 매우 강도높게 공격을 가했다. 그것은 바로 직전에 있었던 박근혜 정권기의 태도와 너무나도 대비되는 행태였다. 결국 공평무사한 선비라는 사회적 기대를 걷어차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주류언론은 그 신뢰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반면, 진보언론들은 정권초기에는 그래도 긍정적으로 보도하다가, 민주당 정권이 점차 안정기에 들어가자 정권에 대한 견제와 비판으로 옮겨갔다. 이전보다 언론의 자유가 증가한 것에 맞춰서 좀 더 적극적인 견제와 비판도 포함되었다.

진보언론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크게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신들은 이전에도 정권을 비판해왔고, 지금도 비판해왔다고 본다. 물론 강도가 좀 더 강해지기는 했지만, 이정도는 언론의 자유를 쟁취한 현재상태에서 당연한 정도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에 대해서 매우 불쾌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탄생시키고, 지지하는 정권에 대해서 어떠한 언론도 지지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독재세력이 집권하면, 주류언론이 정권을 지지하고, 진보언론이 정권을 비판한다. 그러므로 언론계 안에서 공수(攻守)관계가 탄생한다. 그래서 어느정도의 균형이 이루어진다. 물론 이는 대체로는 불평등한 균형이었다. 주류언론의 힘은 강력하고, 진보언론의 힘은 약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kbs, mbc 같은 방송사가 진보언론에 가까운 포지션을 취할때가 있는데, 독재세력의 후계자들은 방송사를 반드시 장악하여 수구언론-주류언론에 포함시키도록 해왔다.)

 

그런데 민주당 정권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균형도 없다. 주류언론도, 진보언론도 거의 대부분 공격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주류언론의 지나친 공격에 대해 진보언론이 일부 반론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마저도 정권을 비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을까봐 소극적이다. 결국 언론계 안에서의 균형관계는 거의 붕괴된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은 노무현정권기에 이미 겪은 바가 있었고, 노무현정권의 최고 지도자인 노무현은 모든 언론의 공격을 받으며 바위산 위에 올라야 했다. 시민들은 노무현이 목숨을 잃은 다음에야 언론계의 불균형이 꽤나 훌륭했던 정치지도자를 어떻게 파멸로 몰아갔는지에 대해 깨달았다. 그리고 10여년만에 다시 민주당 정권이 부활했는데도, 언론은 똑같은 상황을 되풀이하고 있다.

 

결국 시민들의 언론에 대한 불신, 혐오, 분노는 언론계 내부에서는 전혀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현실에 기반한다.

 

 

3.

그렇다면, 민주당 계열이 집권할때마다 언론계의 불균형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민주당 계열, 곧 민주화세력, 혹은 민주적 시민그룹의 감성을 대변할 언론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지형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진보, 민주 그리고 보수 이다.

 

1)

진보세력은 대체로 사회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적 정치지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정치지향을 대표하는 정당이 정의당, 민중당, 노동당, 녹색당 등의 진보정당 들이다. 각종 총선결과를 봤을 때, 한국사회 내의 진보정당 지지층은 대략 10% 내외이다. , 이들은 한국 전체의 인구에서 10% 내외의 인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력은 결코 10%가 아니다. 진보세력은 대부분 고학력층이 많다. 그러므로 언론계의 상당수, 그리고 학계의 상당수가 이들에 속한다. 그러므로 인구수에 비해 언론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히 강하다

 

진보세력, 특히 진보세력의 머리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진보엘리트들은 대체로 세계시민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문화적으로 세계시민의 관점에 서 있고, 다원화된 사회를 지향하며, 한국사회가 미국과 같은 다문화사회로 가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에 대해서는 매우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진보 엘리트들에게는 세계주의로 가도, 곧 국가를 세계에 개방해도 자신들의 위치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50~60대 이상의 진보세력들은 민족주의적 감성이 강하지만, 그 이하 세대들, 특히 40대 이하 진보엘리트들은 이미 민족주의적 감성을 버린지 오래되었다.)

 

진보엘리트들이 민족주의를 버린 자리에는 여성주의, PC주의와 같은 것들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2)

민주세력은 대체로 민주정당을 지지하는 세력이다. 정치지향으로는 사회민주주의 혹은 민주주의를 지향한다.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튼튼한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어느정도의 분배정책에 동의하지만, 사회주의적 평등까지는 동의하지 않는다. 경제적인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케인스 주의적인 수정자본주의적 경제관을 가졌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다.

 

민주세력은 정치적으로는 민주당계열의 정당을 지지해왔는데, 이들은 대체로 25% 정도의 안정된 지지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촛불혁명이후 현재는 40% 내외의 지지층을 보유하고 있다.

 

민주세력의 문화적 감수성은 곧바로 평가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각 세력 안에서 엘리트와 지지층의 감수성이 약간씩 다르기 때문이다. 부정확한 것을 감수하고 추측해보자면, 민주세력의 문화적 감수성은 대체로 소극적 민족주의에 속한다. 세계주의에 대해 어느정도 개방적이면서, 극단적 민족주의로 가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편이다.

 

그러나 민족이나 국가를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한국이 지금과 같은 민족국가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일상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원한다. 다문화주의는 별로 바라지 않는다. 세계화 및 이주민의 유입이 자신들의 일자리에 타격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적 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주세력은 이주민에 대한 직접적인 차별에는 반대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한국민족이 사회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현 상황을 변경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이런 민족주의를 굳이 용어를 써서 정리한다면 열린 민족주의혹은 민주주의적 민족주의에 해당한다. 한국민족의 중심성을 유지하면서도, 어느정도의 개방성을 가지려고 한다. 특히 극우적 민족주의가 민주주의를 해체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감성을 가지고 있다.

 

 

3)

보수세력은 대체로 독재정권의 후신세력들을 지지하는 세력이다. 정치지향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데, 사실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이 그렇게 강한편은 아니다. 이들이 독재자인 이승만과 박정희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고 있는데에서 그 점은 명확하다. 이들의 진정한 지향은 성장과 돈을 벌 자유 그리고 국가이다.

정치적 지향은 애매하고, 자신들이 표방하는 것과 진정한 목표가 엇갈리는 것과 달리, 보수세력의 경제적인 지향은 확고하다. 자유주의적 시장경제, 곧 자유시장경제이다. 이들은 분배정책에 별로 찬성하지 않으며, 이들의 분배정책은 오직 선거를 위한 정책에 가깝다.

 

이들은 대체로 40%내외의 안정된 지지층을 가지고 있었지만, 촛불혁명이후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지금은 25~30%내외의 안정된 지지층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의 문화적 감수성은 세대에 따라 그리고 엘리트냐 지지층이냐에 따라 좀 다르다.

보수세력 내의 노년층은 민족과 국가에 대한 인식이 매우 강한 편이다. 이들에게 성장은 자신들이 평생동안 경험한 것이며, 이것이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바란다. , 이들은 성장이 국가와 자신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하고,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라고 본다.

반면 보수세력내의 젊은 층은 민족에 대한 인식은 희미하며, 국가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인식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역시 성장과 돈이다. 이들에게 국가는 자신의 소득과 자산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뒷받침을 해주는 조직에 가깝다.

 

한편, 보수세력의 엘리트 역시 문화적 감수성이 상당히 다르다. 보수세력의 든든한 경제적 지원세력은 재벌이며, 정치적 지원세력은 주류언론이다. 재벌과 주류언론은 성장과 돈의 관점을 중심에 두고 보며, 그래서 다문화주의나 세계화역시 찬성하는 편이다. 간단히 말하면, 한국이라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출산율 향상 정책은 이들의 입장에서는 낭비이다. 한국민족이 사라지든 말든, 그들을 대체할 이민자를 받아들이면 그만이니까. 복지정책을 통해 한국인들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려 출산율을 제고하자는 정책을 할 바에, 이민자를 불러들여 쓰면 그만이다.

 

그래서 문화적 정체성은 상당히 복잡하게 흐른다. 진보세력 엘리트는 세계인은 모두 평등하기 때문에, 그리고 함께 사는게 정당하다고 보기 때문에 세계화 및 다문화주의를 지지한다면,

보수세력 엘리트는 복지정책을 쓰는 것보다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싸게 먹히고, 돈을 더 벌 수 있기 때문에세계화 및 다문화주의를 지지한다.

 

이러한 진보세력 엘리트와 보수세력 엘리트의 기묘한 문화적 합의점을 말해주는 것이 이자스민 전 국회의원의 행보이다. 필리핀인 출신인 이자스민 전 국회의원은 보수세력에 의해 국회의원이 된 다음에, 이번에는 진보세력인 정의당에서 국회의원으로 다시 출마할 준비를 하고 있다. 진보/민주/보수로 구분이 명확하고, 특히 진보와 보수는 거의 내전수준에 가까운 사상적 적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볼 때, 이는 분명 특이한 현상이다. 이자스민 현상은 진보엘리트와 보수엘리트 사이의 문화적 정체성이 상당부분 합치된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4)

꽤 길게 한국의 정치지형을 설명하였다. 자 그러면 이제 이런 정치지형을 언론지형에 대입해보자.

주류언론이 보수세력과 연관성을 가진다는 것은 바로 드러난다.

진보언론이 진보세력을 지지하는 성향이 짙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갈곳이 없는 정치세력이 하나 있다. 바로 민주세력이다. 민주세력은 자신을 지지하는 언론이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국의 언론은 기본적으로 언론엘리트들로 구성된다. 언론엘리트들은 한국사회 전체의 엘리트 지형안에 있다. 한국사회 엘리트들은 미국의 주류학문을 익힌 사람들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사회 엘리트들은 미국의 세계화되어있고, 다문화주의이고,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학문적, 문화적 세례를 듬뿍 받은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언론 엘리트들 중에서 자유주의적 경제질서에 친화적인 이는 주류언론으로, 사회민주주의적 경제질서에 친화적인 이는 진보언론으로 이동한다. 이들은 각기 맹렬히 전투를 벌이지만, 세계주의적, 다문화주의적 지향성에서는 일치한다.

 

그래서 시민대중의 열린 민족주의(혹은 민주주의적 민족주의)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은 있지만, 이들을 대변하는 언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 엘리트들 중에서 이단아 몇 명만이 언론사를 벗어나 팟캐스트나 라디오를 통해 어느정도 이들을 대변해주고 있지만(유시민이나 김어준), 하나의 회사를 이룰 정도의 정교한 언론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5)

 

한국의 민주세력은 결국 자신을 대변할 언론이 없다. 그 결과 민주세력이 집권할때마다, 언론계는 균형을 잃고, 거대한 파도와 같이 정권에 대한 비난을 쏟아낸다. 결국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 민주세력은 권력을 잃고 야당세력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러면, 권력의 칼자루는 한줌밖에 안되는 진보세력이 아니라, 보수세력이 장악하게 된다.

 

민주세력의 시민들은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언론전체를 혐오하고, 유시민이나 김어준에게 열광한다. 그러나 유시민이나 김어준은 비록 많은 구독자를 확보하고 있지만, 게릴라에 불과하다. 거대한 정보들이 오가는 현대에서, 아직까지는 언론사만이 전체적인 정보의 편집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권위와 안정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중요한 것은 민주세력의 목소리를 정당하게 대변하고, (다문화주의가 아닌) 소시민들이 원하는 일상의 안정적인 유지를 대변해줄 언론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민주세력의 안정적 집권과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은 모두 민주세력의 언론사를 만드는 작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누군가는 이미 전통적인 언론사들이 몰락해가는 시기에 뚱딴지 같은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맞다. 전통적인 언론사들이 몰락해가는 시대이다. 그렇기에 유시민과 김어준이 활동할 자리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유시민과 김어준은 항상 공격당하고 있고, 언론사에게 주어진 권위, 안정성, 사회적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역량으로는 주류언론에 맞서 민주세력 정권의 안정적인 뒷받침까지는 기대할 수가 없다.

 

유시민과 김어준 같은 게릴라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게릴라만으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정규군이 있어야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 언론전쟁이라는 거대한 전쟁판을 계속 비난하기만 해서는 승리자가 될 수 없다.

민주세력과 강하게 연결된 대중적 언론사가 있어야 한다. 그 언론사가 정규군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게릴라들의 전투가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전쟁에 비유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는 우리 사회전체를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다.

 

보수세력의 집권은 적폐만 양산한다는 것이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9년을 통해서 입증되었다. 진보세력은 집권할 역량이 부족한 집단이다. 그리고 보수엘리트이든 진보엘리트이든 한국사회의 보통시민들의 문화적 감수성을 깔보고, 무시하고, 개조하려는 세력이다. 이들에게 정치와 언론을 맡겨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민주세력이 집권할 뿐만 아니라, 민주세력이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개혁을 진행할 수 있도록 언론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지원을 해줄 든든한 언론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민주세력을 위한, 민주세력에 의한, 민주세력의 언론사가 꼭 필요하다.

, 우리 자신을 위한, 우리 자신에 의한, 우리 자신의 언론사가 꼭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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