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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백일장] 나의 겨드랑이는 또 당신을 향해요
게시물ID : readers_149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신륜근
추천 : 6
조회수 : 829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8/15 18:5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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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드랑이를 제모한 직후엔 사라진 겨드랑이 털에 상실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후엔 어떻습니까.
기존보다 강하고 풍성한 털이 머리를 내밀지 않습니까.
또한 그들은 전보다 길게, 넓게 자랍니다.
 
독서는 겨드랑이 제모와 같습니다.
당장은 시간이 아깝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고의 시간을 거친 후,
당신이란 존재의 상한선은 높아지고 스펙트럼 또한 넓어집니다.
 
겨드랑이털처럼 강하고 풍성한 인생을 위해 독서합시다. 
 
 
 
 
 
 
1.
 
그와 급하게 헤어지고 집에 돌아온 나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상의를 벗자 한껏 부풀어진 겨드랑이 털이 드러났다. 눈물이 울컥 쏟아지려고 했다. 면도기로 겨드랑이를 마구 밀어댔지만 털은 너무 길고 풍성해서 면도기로는 무리였다.
 
젠장. 젠장. 젠장.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나는 들지도 않는 면도기로 겨드랑이를 밀어대며 한없이 울었다.
 
가위를 가져오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 있던 엄마는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너 또 겨드랑이 털이 그렇게 된거야? 그 인간 그만 만나라고 했지. 너 어떡하려고 그래. 어떡하려고!"
 
"아 몰라! 신경쓰지마!"
 
"야 이년아. 너 그러다가 시집도 못가. 시집도 못가고 늙어서 빌빌대다가 찌질한 남자 만나서 엄마처럼 고생하려고 그래!"
 
상의를 벗고 있었기에 잡을 곳이 없었는지 엄마는 나의 겨드랑이 털을 휘어잡고 다른 손으론 나의 등짝을 때렸다.
 
"몰라. 엉엉엉엉.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라고. 지 맘대로 이러는 건데 어떡하라고."
 
"그래도 그렇지. 이 년이. 그 인간을 안 만나면 되는 거 아니야."
 
"엄마가 뭘 알아! 그렇게 쉬운 거면 내가 벌써 알아서 했지. 엉엉엉엉엉엉."
 
엄마는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나의 등을 때리는 엄마의 손은 점점 더 강해졌고 나는 점점 더 크게 울었다. 그 때였다. 나의 겨드랑이 털이 엄마의 손을 벗어나더니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엄마의 가슴팍에 돌진해 부딪히는 것이었다. 엄마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틈을 타 가위를 챙겨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등 뒤에서 "아니 저 년이! 이제 겨드랑이 털까지 쌍으로 지랄이네!"라고 외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적막한 화장실엔 나와 겨드랑이 털, 둘 뿐이었다. 겨드랑이 털은 나를 위로해주려는 듯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겨털아. 고마워. 너 밖에 없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겨털이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가위로 겨털이의 아랫부분을 싹둑 잘라버렸다. 그래도 뒤져 개좆같은새꺄.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한 뭉텅이의 겨털이는 곧 배수구로 빨려들어갔다. 그 검은 악마의 소멸을 보며 나는 무한한 희열을 느꼈다. 개씨발놈이 또 깝쳐봐라. 배수구에 캭 퉤, 가래침을 뱉었다.
 
 
 
 
2.
 
겨털이는 나의 사랑과 함께 태어났다. 처음으로 짝사랑을 하게 된 열 한 살 무렵, 좋아하는 아이를 볼 때마다 나는 겨드랑이에 이상한 가려움을 느꼈다. 처음엔 이런 게 사랑의 느낌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후 목욕 중에 겨드랑이에서 무언가 꿈틀거림을 느낀 나는 경악했다. 열 한 살의 소녀는 너무나도 일찍, 그리고 뜬금 없게 풍성한 겨드랑이 털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좋아하는 아이를 볼 때 느끼는 가려움은 점점 더 심해져갔다. 그리고 집에 와서 확인해보면 겨드랑이 털은 어제와 다르게 쑥쑥 자라있는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알아챘다. 이건 사랑의 느낌이 아니다. 나의 겨드랑이 털은 그 아이에게 반응해 성장하는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아이와 만날 일이 없어지면서 나는 안심했다. 이젠 겨드랑이 털이 반응하지 않겠구나. 평범한 여자아이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정말 그렇게 되었다면 좋았을 걸. 나는 같은 반의 어떤 남자 아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의 겨드랑이 털은 또 그 아이를 볼 때면 급격하게 성장하며 가려움을 유발했다. 나의 겨드랑이 털은 초등학생 시절의 그 아이 한 명에게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겨드랑이가 반응하는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좋아하는 남자가 생길 때면 항상 겨털이 때문에 고생해야 했다. 그와 잠깐 마주치기라도 한 날이면 겨드랑이가 부풀어 올라 하루 종일 불편했고 집에 돌아와 제모를 해야했다. 반 팔티를 입고 있다가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 겨털이가 소매 밑으로 쭉 삐져나오는 추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스물 한 살인 지금, 난생 처음으로 썸이란 걸 경험하고 있는 나는 인생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3.
 
"희연아. 왔어?"
 
"응. 안녕."
 
그의 얼굴을 보자 겨드랑이가 욱신, 진통했다. 그를 보지 않도록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평소와 같은 만남이었다. 그는 다정하게 웃어주었고 나의 겨드랑이는 계속 나를 괴롭혔다. 자란 겨드랑이털의 부피 때문에 옷이 죄여왔다. 나는, 결심했다.
 
"정태야."
 
심상치 않은 나의 말투에 정적이 흘렀다.
 
"응?"
 
정태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표정이 굳었다.
 
"혹시……."
 
입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식은 땀이 흘렀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겨드랑이는 계속 아파왔다. 눈물이 울컥 나오려 했다. 이를 악물고, 말했다.
 
"겨드랑이 털 많은 여자, 어떻게 생각해?"
 
"응?"
 
정적이 흘렀다. 공원의 한 가운데, 우리 둘은 서 있었고, 마치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의 표정과 입모양의 미세한 움직임에 나의 오감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때, 정적을 깨고 무언가 날아들었다.
 
탁.
 
내 뒤에 날아든 탄환은 나의 겨털이의 절대 방어에 막혔다. 그 찰나의 순간에 겨털이가 셔츠를 찢고 나온 것이다. 탄환은, 정체를 모를 오물이었다.
 
"미안해."
 
정태가 말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
 
"누구냐."
 
탄환의 주인에게 외쳤다. 그녀는 공원의 저 편에서 저벅 저벅 걸어왔다. 손가락 하나를 콧구멍에 넣은 채로.
 
"대단하군. 역시 겨털도가 자랑할 만한 절대 방어다."
 
키가 큰 여자였다. 머리가 길고 인상이 강한 화장을 한, 퇴폐적인 미를 가진 여자였다. 그건 그렇도 겨털도라니?
 
질문을 할 틈도 없이 두 번 째 탄환이 날아들었다. 몸을 날려 피했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탄환은 절대 방어에 막혔다.
 
"역시 평범한 딱지탄으론 안되나. 그럼 이건 어떠냐."
 
뜬금 없는 방향으로 날아가는 탄환들. 아차. 정태!
 
'겨털도 오의- 흑철갑!'
 
겨털이 정태를 감쌌다. 나도 모르게, 무언가 기술을 사용했다. 탄환들은 그 검은 갑옷에 막혀 맥없이 튕겨나갔다.
 
"역시, 넌 진짜다."
 
그녀는 희연에게 일그러진 웃음을 보냈다. 즐거운 것 같기도 하고, 두려운 것 같기도 한 웃음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진짜로 간다."
 
'딱지도 오의- 비철폭우!'
 
그녀의 콧구멍이 확장되었다. 곧, 아무 생각도 할 틈 없이 엄청난 수의 탄환이 날아들었다.
 
"꺅!"
 
흑철갑의 뒤에 숨었다.
 
"희연아. 이대론 안 돼. 흑철갑이라도 버티지 못해."
 
정태가 말했다.
 
"넌 대체 뭐야? 어떻게 다 아는 듯한 투고, 아까 미안하다고 한 건 뭐야?"
 
"그건…. 사실…. 나는 딱지도의 첩자야."
 
"뭐?"
 
"미안해. 너는 사실 기억은 잃은 겨털도의 후계자야. 아마 너의 부모님은 너가 평범한 인간이 되길 바래서 일부러 겨털도를 전수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 너를 꾀어 처치하기 위해 딱지도에선 나를 보냈지."
 
"그런……. 그럼 지금까지 나에게 관심을 보인 건……."
 
"그건 거짓이 아니었어! 처음엔 너를 처치할 목적으로 접근했지만, 점점 너를 진짜 좋아하게 되었어.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배신자 자식이 말이 많구나!"
 
딱지도의 여자가 말을 끊고 들어왔다. 나는 머리가 멍했다. 내가 겨털도란 것의 후계자라고? 정태는 그런 나를 처치하기 위해 라이벌 문파에서 보낸 암살자란 건가. 그리고 우리 엄마도, 겨털도의 고수? 그래서 나의 겨털을 그렇게 억제하려고 한 거였나.
 
"그렇군."
 
"정말 미안해. 희연아. 너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어. 하지만 역시 다른 문파의 우리는…."
 
"내가 바보로 보이냐. 끝까지 속이려 들어?"
 
"그런 게 아니야. 희연아. 나도 여건만 된다면 너와 함께 있고 싶어. 하지만 역시 헛된 꿈이었나봐. 우리 이 쯤에서….."
 
그런 게 아니긴. 꼴갑을 떨고 있군.
 
"넌 나의 겨털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반응해 강해지는 걸 알고 있어. 그래서 나로 하여금 너를 사랑하게 만든 후에, 전투 중에 실연을 시켜 나의 겨털도를 약하게 만드려는 거지. 만약 너가 정말 나를 사랑했고, 내가 이 싸움에서 이기길 바란다면 그 말을 지금 꺼낼 리가 없어. 끝까지 너를 사랑하게 만들어서 내 힘을 증폭시키고 너가 첩자였다는 건 나중에 밝히고 용서를 빌던가 하겠지. 너가 원하는 건 그냥, 내가 실연해서 힘을 잃길 바라는 거잖아. 내 말이 틀리냐."
 
정태, 아니 딱지도의 비겁한 첩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리숙하기는. 겨털이의 일격이 첩자의 배에 작렬했다.
 
"겨털아. 지금까지 미안했다."
 
'겨털도 오의- 흑사보!'
 
발판이 된 겨털이를 밟고 섰다.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겨털이는 알겠다고 대답하는 듯 했다. 나는 서핑을 하는 듯 겨털이를 타고 이동했다. 나에게 쏟아지는 딱지탄들을 피해가며 나선을 그리며 적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거지? 실연한 너는 분명 힘이 약해졌을 텐데!"
 
"흥! 이제 나와 겨털을 숨기지 않겠어. 남자 따위가 아니라, 나를. 그래, 겨털을 가진 나를 사랑하겠어!"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힘을 증폭시킨다는 거냐! 말도 안되는…!"
 
탄환을 모두 피했다. 이제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발판을 힘껏 디디고 뛰어오른다.
 
'겨털도 진'오의- 흑도!'
 
샥.
 
가벼운 검은 소리도 없이 상대를 두 동강 낸다.
 
사뿐히 지면에 안착했다.
 
다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남은 건 싸움의 흔적과 딱지도의 두 어중이 떠중이들.
 
"너무 소란을 피웠군. 먹어치워라. 겨털."
 
두 동강 난 고깃덩어리는 마치 그림자에 녹아들어가는 듯 겨털의 검은 품으로 사라졌다. 기절한 정태는, 벤치에 눕혀놓았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겨털이가 검은 천처럼 변형해 스웨터처럼 몸을 감싸주었기 때문에 찢어진 셔츠가 창피하지는 않았다. 다시 한 번 겨털이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안했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남자를 잃었고 지금까지의 삶을 잃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어머니, 죄송합니다. 저 역시도 겨털도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 지금만큼 기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겨털도의 길 위에서 처음으로 저 자신을 찾았습니다. <完>.
 
 
.
우리는 아직 세월호를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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