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목격자에 의하면 반지하방에서 연기가 나와 열고 들어가보니 방 안에 사건의 주인공인 5살 권혜영, 4살 권용철(기록에 따라 이름이 '영철'이라고도 한다) 남매가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사건 당시 이들의 부모인 권모씨와 이모씨는 맞벌이를 하고 있었는데, 권 씨(당시 30)는 부천시에서 경비원을 하고 있었고, 이 씨(당시 28)는 합정동에서 파출부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을 하러 나가다 보니 어린 자녀들이 부모가 없는 사이 부엌에만 나가도 연탄불이나 식칼 등 다칠 일이 많고, 밖에라도 나가면 길이라도 잃을까, 유괴나 교통사고라도 당할까 우려하여 밥을 차려놓고 요강을 들여놓고 문을 밖에서 잠그고 일을 나간게 화근이 되었다.
남매는 모친인 이 씨가 파출부 일을 나간 직후 방안에 있는 성냥으로 불장난을 했고, 불은 옷장과 옷가지로 옮겨붙은 다음 곧 꺼졌지만 안타깝게도 이들 남매는 모두 질식사로 피어보지도 못한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아이들의 부모는 충청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나, 가난이 너무도 극심하여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형편은 순탄치 못했다. 남편 혼자의 벌이로는 벅차 아내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지만 아이들이 문제가 되었다. 처음에는 시골에 계신 어머니에게 보냈지만 어린애들을 돌보는 게 매우 체력소모가 큰 일인지라 연로하신 어머니는 얼마 버티지 못해 다시 돌려보냈고, 돈을 쪼개 이웃에게 주며 아이들을 봐 달라고 부탁해 봤지만 오래 못 가 그럴 돈도 바닥났다. 인근에 어린이집이 있었지만, 오후 5시까지만 맡아줘 도움이 안 됐다. 또 아이 한 명당 월 5만원이었고, 부부 수입은 월 65만원이었다. 그렇다고 아내가 돈을 안 벌고 아이들만 돌보고 있자니 집세는 급격히 오르고, 빚더미는 불어가기만 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결국 아이들은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하루종일 일을 나가 필사적으로 돈을 벌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가 없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결국 아직 제 앞가림도, 사리분별도 못하는 다섯살짜리에게, 더 어린 세살짜리 유아를 떠맡기고 잘 놀라고 당부하는 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결국 아이들은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집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외롭게 놀다가 화마에 휩싸여 숨졌다. 불은 별로 태운 것도 없이 곧 꺼졌지만, 전술했듯 문이 잠겨 있던 게 문제였다. 방에 갇힌 아이들은 열리지 않는 문을 피가 나도록 필사적으로 손톱으로 긁어대며 죽어갔다. 실제로 방문에서 손톱 자국이 발견됐고, 아이들의 손에 피가 나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다칠까 문을 잠가둔 부모의 배려가, 오히려 자녀들을 탈출조차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죽게 만든 것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면서, 바로 이듬해인 1991년 영유아 보육법을 제정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관련법이 아예 없었다는 데서 짐작이 가겠지만, 당시에는 유아보육에 대한 인프라가 너무나도 미비한 시절이었다. 정말 어려운 집이 아니고서야 맞벌이가 드물었고, “접시와 여자는 내돌리면 깨진다”는, 지금 보면 여성혐오에 가까운 소리가 속담이랍시고 입길에 오르내리던 때였다. 보육 시설이나 제도는 부족하기 그지없었고, 탁아나 보육 시설의 확대를 논하면 너도나도 “애들은 엄마가 길러야지.”, "애를 부모가 책임질 것이지 왜 사회에 떠넘기냐? 지가 낳아놓고, 왜 나라에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며 냉소하기 바빠 힘이 실리지 못했다.
그리고 사연이 알려지자 안타깝게 여긴 시민들로부터 부모에게 성금이 답지했다고 하지만, 자식들을 하루아침에 잃은 부모에게 그 돈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정태춘의 5집 <아 대한민국>에 실린 곡 중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우리들의 죽음>이라는 노래가 있다. 사건 6개월 뒤인 1990년 10월 발매. 심약한 사람은 듣고 나면 펑펑 울 수도 있는 슬픈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