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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게시물ID : panic_10118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JJSS
추천 : 9
조회수 : 207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0/03/05 20:2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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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지.”

 

그 남자가 자주 지껄이던 말이다. 그는 남들이 보기에 제법 착실한 삶을 살아가는 가장이었다. 좋은 회사, 높은 직급, 높은 연봉.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그 남자는 다정다감했고 주변 사람들의 평판도 좋았다.

 

나도 그 남자가 좋았다. 그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 올 때는 항상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과자나 아이스크림 통닭과 같은 맛있는 음식일 때도 있었고, 인형이나 머리핀 같은 선물일 때도 있었다.

 

그 남자를 나는 낮의 아빠라고 불렀다. 그 남자는 나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낮에 아빠는 매일 나한테 맛있는 것도 사주고, 선물도 사주고 놀아줘서 정말 좋아!”

 

그럴 때마다 그 남자는 복잡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는 나를 꼭 안으며 말했다.

 

미안해 딸. 아빠가 더 잘할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더 끔찍하다. 그 남자는 분명 알고 있었다. 본인이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했다.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술을 손에 댄 그 남자는 악마 그 자체였다. 엄마는 매일같이 그에게 맞았다. 그럴 때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엄마는 살려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를 때렸다. 주먹으로 때리다가 씩씩거리며 자기 분을 참지 못하고는 주변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잡고 엄마를 때렸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심한 욕과 함께.

 

육시럴년. 길바닥에서 굴러먹던 년을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나 없으면 네가 갈 곳이나 있는 줄 알아!”

 

그는 밤의 아빠였다. 나는 밤의 아빠 앞에서는 뱀 앞의 개구리 같았다. 지체장애를 앓고 있는 어린 동생은 우어어어 하며 알 수 없는 말로 울었다. 나는 동생의 입을 틀어막은 채 꼭 끌어안고 장롱 안에 숨어 벌벌 떨었다. 그리고 빌었다. 부디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기를.

 

엄마는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갔다. 상처를 가리기 위해 항상 긴 옷을 입고 다녀야 했다. 얼굴에 멍이라도 들면 한동안 밖에 나가지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엄마는 그 남자의 평판을 필사적으로 지켰다. 술에서 깬 그 남자는 무릎 꿇고 엄마에게 빌었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미X놈이야. 앞으로 술은 입에도 안 댈게. 절대 안 마실게. 알지? 나 너 없으면 못살아. 또 애들은 어떡하고. ? 한번만 용서해주라. 제발.”

 

하지만 그것은 말뿐이었다. 술을 마시지 못한 그 남자는 밤이 되면 항상 손을 덜덜 떨었다. 그러고는 주문을 외듯 이렇게 말했다.

 

딱 한잔만. 한잔은 괜찮을 거야.”

 

그는 다시 악마가 되었다.

 

엄마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을 것이다. 분명 그 남자와 인연을 끊을 기회도 있었다. 나와 내 동생이 눈에 밟혔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엄마는 차마 집을 나가지는 못했다. 나는 당시 엄마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직도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장롱 문틈으로 내다봤던 끔찍한 광경을. 평소와 마찬가지로 악마가 된 그 남자는 엄마를 때렸다. 나와 동생은 숨어서 떨고 있었다. 그날따라 동생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우어어어 하는 동생의 울음소리가 장롱 밖으로 새어 나갔다. 살기를 띈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 남자는 씩씩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안 돼!”

 

엄마가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순간 그 남자의 눈이 홱 돌아갔다. 그는 탁자의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어항을 들어 엄마에게 던졌다. 어항은 엄마의 머리와 부딪히며 산산이 부서졌다. 끔찍한 소리였다. 커다란 유리파편이 엄마에게 박혔다. 금붕어는 바닥에서 펄떡이며 생을 갈구하고 있었다. 엄마는 피를 흘리며 금붕어를 바라봤다. 금붕어를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잔뜩 흥분해 씩씩거리던 그 남자는 쓰러진 엄마에게 쇼하지 말라며 발길질을 했다. 하지만 엄마는 움찔거리기만 할 뿐 그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이내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는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잠시 후 구급차가 왔다. 그가 부른 모양이었다. 나와 동생은 장롱에서 기어 나와 엄마 앞에서 울었다. 그 남자도 울며 말했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 ? 이렇게 가면 어떡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잖아. 우리 애들은 또 어떡하고!”

 

나와 내 동생, 그리고 그 남자의 간절한 부름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그 남자는 체포됐지만 처벌은 중하지 않았다. 술에 의한 심신미약, 그리고 남아있는 나와 내 동생으로 인해.

 

엄마가 없어지자 그 남자는 완전히 변했다. 직장을 잃었고 수입이 없어졌다. 그의 숨겨왔던 치부가 세상에 드러났다. 항상 착한사람이었고 다정한 남편이었고 자랑스러운 아빠였다. 그랬기에 주변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더욱 컸다. 그 남자는 집에 틀어박혀 폐인처럼 술만 마셨다. 더 이상 낮의 아빠도 밤의 아빠도 없었다. 한명의 알콜 중독자만 있을 뿐이었다.

 

동네에서 나와 내 동생을 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어른들은 우리를 보며 혀를 찼고 또래 아이들은 우리와 놀아주지 않았다. 우리는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나와 내 동생은 그렇게 방치되었다. 제대로 먹지 못했고 입지 못했다.

 

그 남자가 모아놨던 재산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라졌다. 우리는 결국 쫓겨나듯 그 동네를 떠났다. 새롭게 정착한 곳은 퀴퀴한 냄새가나는 반지하 단칸방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돈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주워서 팔았다. 새로운 동네에서 나의 별명은 거지였다.

 

거지래요. 거지래요.”

 

아이들이 놀림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그런 놀림 따위보다 굶주림이 더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어렵게 모은 돈은 대부분 그 남자의 술값으로 소비되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본 게 언제였을까. 나는 괜찮았지만 동생이 더 문제였다.

 

언니 배고파.”

 

가여운 동생은 점점 말라갔다. 말라비틀어진 팔은 꼭 수수깡 같았다. 동생에게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일념으로 그 남자 몰래 돈을 모았다. 겨우 몇 천원이 모였고 동생에게 제대로 된 음식을 사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는 이 좁은 단칸방에서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은 무의미했다. 술에 잔뜩 취한 그는 절대 손을 대면 안 되는 돈에 손을 뻗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 남자한테 대들었다.

 

이 돈은 안 돼! 내 동생 밥 사 먹여야 한다고!”

 

순간 그 남자의 눈이 휙 돌아갔다. 그때처럼.

 

야이 씨부럴년아. 여태껏 먹여주고 재워줬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눈이 번쩍이고 귓가에 이명이 들렸다. 밤의 아빠, 아니 악마가 돌아왔다. 나는 뱀 앞의 개구리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허벅지가 뜨뜻해졌다. 흘러나온 오줌이 바닥을 적셨다. 너무 무섭고 아파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엄마 대신이 되었다. 장롱 너머에서 보이던 것은 나에게 현실이 되었다. 그 남자는 모든 분풀이를 나에게 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죽은 것도 내 탓, 회사에서 잘린 것도 내 탓, 동네에서 쫒겨 난 것도 내 탓, 자기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도 내 탓모든 것이 내 탓이었다. 폭력도 폭력이지만 비수 같은 말은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너 같은걸 낳는 게 아니었는데! 너 때문에 네 엄마가 죽은 거야.”

 

나는 그 말을 사실인 양 받아들였다. 나 때문에 엄마가 죽었고, 아빠가 저렇게 되었다는 것을. 부조리한 악마의 분노는 매일같이 나를 죄어왔다.

 

살고 싶었다. 정말로 살고 싶었다. 그 남자가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유일한 살 길이었다.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에선 때리지 않았으니까. 이전처럼 다정다감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때리지 않았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술을 감춰놔도 어디선가 술을 구해 마시고는 악마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남자는 그러다 어느 순간,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었다. 평소처럼 만취한 그는 자기 딸에게 차마 저질러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 잔뜩 충혈된 눈, 몰아쉬는 숨. 시뻘개진 얼굴.

 

나는 뱀 앞의 개구리였다.

 

너무 무섭고 고통스러웠지만 차마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 남자가 동생을 보는 눈빛은 나를 보는 눈빛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없어진다면 동생이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될 것이다. 나는 동생의 방패가 되어야 했다. 엄마가 도망가지 못했던 이유도 분명.

 

일 년이 년오 년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나에겐 시간이 멈춘 것과도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째서인지 그 남자는 내 앞 무릎 꿇고 빌고 있다.

 

, 내 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요, 용서해줘.”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일까.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게 용서를 구하고 있다. 어째서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금세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치는 나의 모습은 너무나도 괴상했다. 뻥 뚫린 두 눈,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피, 시커멓게 말라비틀어진 몸, 다리 없이 둥둥 떠있는 몸. 하하, 뭐야 이래선 마치 귀신같잖아.

 

어두운 방의 한 구석에서 썩어가는 시신이 보였다. 그것은 나였다. 내 동생은 우어어 하고 울고 있었다. 불쌍한 내 동생.

 

제발 용서해줘. 네 동생을 생각해야지.”

 

그렇구나. 나는 죽었고, 이 남자는 자신을 데리러 왔다고 오해하고 있는 거구나.

 

개똥밭에 굴러도이승이 낫지.”

 

문득 저 남자가 자주하던 말이 튀어나왔다.

 

, 그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잖아.”

 

작은 희망이라도 발견한 듯 그 남자는 미소 지었다. 가증스러운 놈. 증오스럽다. 무척이나 증오스럽다. 저 남자가 너무나 밉다. 나의 사념은 한기가 되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는 나를 보며 벌벌 떨었다. 뱀 앞의 개구리처럼.

 

나는 내 동생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불쌍한 동생. 그동안 너도 얼마나 힘들었겠니. 하지만 이제는 괜찮을 거야. 적어도 지금보단 나아질 거야.

 

동생은 나를 보며 우어어 하며 울었다. 내가 무서운 것일까. 아니면 내가 반가운 것일까. 나는 동생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 남자는 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증오스러운 놈. 평생을 고통 받아라. 평생을 속죄해라. 평생을 지옥 속에서 살아라.

 

***

 

따스한 햇살이 비추었다. 주변은 싱그러운 풀 냄새가 가득했다. 발바닥을 타고 느껴지는 풀밭의 감촉이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몸 이곳저곳에서 느껴지던 고통도 어느 샌가 사라졌다. 동생은 내 손을 잡고 신난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언니. 얼마나 더 가야돼?”

글쎄.”

 

길 너머 펼쳐진 동산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있었다. 그 아래 엄마가 손을 흔들며 우리를 맞이해주고 있다. 아름답고 젊은 엄마가. 엄마는 무척이나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출처 https://blog.naver.com/jjss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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