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 공포를 느끼며 마음을 어지럽히는가?
우리가 진정 공포를 느껴야하는건 우리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줄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경험의 순간에 얻는 공포만이 진정한 공포이다.
불에 데일 때의 통증으로 인한 공포, 흉기로 맞을 때의 통증으로 인한 공포,
세균과 바이러스로 인해 겪는 병의 고통으로 인한 공포, 그러니 우리가 늙어가는건 공포의 대상이 아니고 늙어감으로 인해 병이 들고 노쇠해져 직접적인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 진짜 공포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측을 하고 간접경험을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가짜 공포를 느끼게 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미리 추측하고 걱정부터 하는것은 우리의 순간대응능력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가짜 공포감만을 증대시키는 일이다. 물론 어느정도의 대응체제는 필요하다. 한순간의 불협화음으로 운명자체가 깨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죽음에 이르는 어떠한 행위는 굳이 경험을 하지 않고도 아는척하며 대응해야한다. 대응해야할까? 이러한 생의 과도한 존중으로 인해 우리는 죽음에 대한 가짜 공포가 비대해져버렸다. 생과 사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어느 하나 좋은것도 나쁜것도 아니며 옳은것도 아니고 그른것도 아니다. 모든 죽음은 모든 탄생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산자는 죽음에 대해서 간접경험 밖에 해보지 못한다. 죽음 직전까지 간, 죽음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의 가짜 공포에 짓눌린 두려움의 표현 때문에 우리가 가지는 죽음에 대한 거짓 공포는 커져만 간다. 그러나 실상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인 자들은 말이 없었고 이 무음 속에서 우리는 만들어진 거짓 공포만을 간접경험으로 습득하여 어리석게 공포를 예측하였다.
살아있는 생명은 죽음을 거부할 본능과 권리가 있다. 죽음에 이르는 길은 대부분 직접적인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생명은 죽음 그 자체에 대해 공포를 느껴야 하는게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직접적인 고통을 두려워 해야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 고통스러운 과정인 죽음에 이르는 삶이라는걸 굳이 참아내야할 필요가 있을까?
탄생은 나에게 기쁨도, 고통도, 좋은것도, 나쁜것도, 옳은것도, 그른것도, 대단한것도, 하찮은것도, 사소한것도, 소중한것도, 아무것도 아니였다.
죽음도 이와 같다.
과연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