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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단편,브금]카데식스
게시물ID : panic_1494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tarDream
추천 : 3
조회수 : 2463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1/05/03 11:09:49
눈을 떴다. 이상한 꿈을 꾼 것 같다. 아니, 이상하기보다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꿈이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일어난 후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꿈속에서는 밤이었다. 그것도 아주 깊은 밤. 길거리에 사람도 차도 안 다니는 깊은 밤. 가로등도 켜져 있는지 꺼졌는지 알 수 없는 밤. 건물들도 조용히 침묵하며 그 자리에 서 있는 밤. 밤하늘의 어둠 아래 고요함과 간혹 바람소리만 들려오는 밤. 바람 소리 없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늘과 정적만이 사방에 드리운 밤. 나는 내 방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공부하고 있는 내 모습을 내가 보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연습장에 교과서의 내용을 휘갈겨 쓰며 외우고 있었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관련된 내용인 것 같았다. 그냥 알았다. 왠지는 모르겠다. 꿈속에서 그냥 알고 있었다. 한참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공부할 때는 책만 본다. 꿈속에서의 나도 책만 보며 연습장에 주요 문장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원래 집중을 좀 잘하는 편이다. 한참을 내가 공부하는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얼마 후 내가 책상에서 일어났다. 밤에 공부하다 피로해지면 언제나 커튼을 걷고 창 밖의 거리를 보곤 한다. 꿈속에서의 나도 펜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커튼을 걷었다. 창 밖 아래쪽을 내다보는 내 모습이 보였다. 상당히 가까이서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아래로 향해있던 눈을 똑바로 올리더니 내가 있는 정면을 멈춘 듯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었다! 꿈속의 내가 날 보고 놀란 건가보다. 나도 놀라 꿈에서 깼다. 여기까지가 내가 꾼 꿈이다. 그 다음 눈을 떴다. 내가 밤에 공부하는 꿈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꿈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하게 느껴진다. 마지막에 내가 날 보고 놀란 건 아마 일어날 시간이 되어서 꿈속의 내가 나를 깨우려고 한 것 같다. 꿈속에서 본 나는 나의 무의식이었나 보다. 정말 그럴까? 나도 모르겠다. 요즘 시험 공부를 너무 많이 하고 피곤해서 꿈도 공부하는 꿈을 꾸나 보다. 학교 갈 준비나 해야겠다. 등교 길은 언제나 똑같다. 10분 거리 밖에 안되지만 나는 언제나 일찍 일어나 산책하듯 등교하길 좋아한다. 그래서 지름길로 안가고 비잉 돌아서 학교에 들어간다. 20여분 정도 걸린다. 산책길은 평온하다. 회색 길바닥. 주변에 간혹 심어져 있는 나무들. 구불구불하게 나있는 도로. 아침에 느껴지는 맑은 공기는 내 머리를 맑게 한다. 아침의 서늘함. 엷게 드리운 햇살. 그 자리에 서있는 건물들. 출근하는 아저씨 아줌마들. 등교하는 학생들. 그들 모두 아침에는 말이 없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산책하듯 걸어가는 사람들. 떨어지는 낙엽. 조용히 떨어지는 내 침. 떨어지는 발걸음들. 떨어지는 사과. 떨어지는...헉. 만유인력의 법칙이 자꾸 머리에서 맴돈다. 필요 이상으로 공부해서 그런가 보다. 어쨌든 산책 같은 등교 길이 나는 좋다. 이 시간쯤이면 언제나 기대되는 순간이 있다. 그렇다. 나의 아침 산책길은 다른 것도 있지만 이 순간이 없다면 이 길로 등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바로 나의 짝사랑. 나의 그녀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산다. 그녀는 언제나 공부만 한다. 그녀가 우리 아파트로 이사 온지는 1년 밖에 안 되었지만 한 번도 엘리베이터나 아파트 주변에서 그녀와 마주친 적이 없다. 그녀의 사이클과 내 사이클은 많이 틀린가 보다. 마주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같은 아파트에 사는지 아냐고? 그녀의 자전거를 보고 아는 거다. 그리고 가끔 목소리 큰 그녀의 엄마가 바로 위의 위의 위의 위의 위의 위의 위층에서 아파트 주민들 다 들으라는 듯 그녀 이름을 부르며 심부름 시키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의 시간 중 사이클이 딱 한 번 맞는 때가 있다. 바로 이 시간과 장소이다.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그녀가 이곳으로 이사오기 전부터 이 길을 산책길 겸 등교 길로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 이 길을 지나 등교한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그녀의 옆모습을 언제나 보곤한다. 아주 잠깐 동안의 시간이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그녀의 얼굴을 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집중력이 뛰어나다. 아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기 위해 집중 하던게 쌓이고 쌓여 지금과 같은 집중력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말하는게 옳은 것 같다. 전부터도 집중은 잘했지만. 어쨌든 그녀가 가까이 온다. 더 가까이 온다. 더 가까이. 내 옆에 까지 왔다. 나는 그녀를 그녀 몰래 쳐다본다. 보인다. 달걀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그녀의 얼굴. 자존심 강해 보이는 오똑한 코. 반짝거리는 눈동자. 살랑살랑 흔들거리는 윤기있는 검은 머리에 가려질 듯 말 듯한 귀. 제법 붉그스레한 빛을 띤 뺨. 하얀 아침 공기를 내쉬는 그녀의 입술. 핸들을 잡고 있는 뽀얀 손. 내 안에서 뭔가 일렁이게 하는 그녀의 곡선. 1초도 안 되는 시간. 그러나 이 순간은 곧 영원의 순간이다. 저 멀리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오늘도 사는 의미를 느끼며 학교 정문으로 들어간다. 벌써 5교시가 시작될 시간이다. 이전 수업 시간 동안은 눈뜨고 잔 것 같다. 밥 먹고 화장실을 갔다 오니 종이 울린다. 이번 시간은 무슨 시간인가. 헉. 물리 시간이다. 또 뉴턴을 배워야 한단 말인가. 이번엔 진짜 자고 싶어진다. 선생님이 들어왔다. 그 특유의 두꺼운 안경과 맞으면 무지 아픈 회초리를 들고서. 자면 죽는다. 맞아 죽는다. 아파서 죽는다. 자면 안 된다. 그냥 듣자. 꿈속에서 공부한 거 또 공부하자. 근데 다행히도 뉴턴의 운동법칙은 안 한댄다. 대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겉 핥기만 하겠댄다. 아인슈타인, 이름만 알지 그 사람이 왜 유명한지는 잘 모른다.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하다는데 그게 뭐냐. 그냥 들어보자. 겉핥기만 한다는데 뭐 별거 있을까. "그러니까 상대성 이론은 모든 운동은 상대적으로만 그 절대적 값을 알 수 있다는 내용으로 예를 들어 30Km/H로 달리는 차 위에 내가 있고 반대편에서 70Km/H로 달리는 차가 나를 향해 달려 올 때 30Km/H로 달리는 차 위에 있는 나에게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차의 속도는 100Km/H가 된다는 얘기지...중략...여기서 아인슈타인의 놀라운 업적 중 하나는 중력과 가속도는 같은 것이라는 것을 증명했다는 사실이지. 이전에 우리가 배운 만유인력의 법칙, 즉 뉴턴의 중력이 곧 가속도라는 말이지..." 선생의 말을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들었다. 내가 알아들은 내용만 써봤다. 그러니까 중력이 가속도라면...음, 가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를 내 순간적인 집중력으로 똑바로 자세히 볼 수 있다면, 그러니까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물체도 내가 집중만 하면 똑같이 볼 수 있다는 말이로군. 음...그러니까....음....그래. 그래. 음... "야! 너! 한 눈 팔고 있는 놈! 너 이리 나와!" 헉. 걸렸다. 맞는 일만 남았다........ 손에서 불이 나는 것 같다. 맞을 때 나의 집중력이 배가 되었는지 회초리가 매서운 소리와 함께 나의 손과 맞닿을 때 무궁한 순간을 경험했다. 그것도 열 번씩이나. 회초리가 내 손에 잠시 달라붙어 있던 것 같았다. 순간이 너무나 길었다. 그 와중에서도 움직이는 회초리를 잠시 멈추게 했다. 회초리가 멈춘게 아니라 내가 집중을 해서 멈춰 보였던 거다. 집중력도 때로는 안 좋을 때가 있는 것이다. 수업 시간이 다 끝났다. 담임 선생님이 종이 뭉태기를 들고 들어오더니 이름 부르면 한 사람씩 나오랜다. 성적표였다. 이번엔 성적이 좀 올랐다. 집중하고 공부하니 그런 것 같다. 기분도 좋은데 야간 자율 띵까고 집에나 가야겠다. 집에 가서 밤새 공부나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에 일부러 아침에 등교하는 길을 택했다. 밝았던 태양은 이제 힘을 잃었는지 서서히 붉게 변해간다. 사방은 어두운 것도 아니고 밝은 것도 아니고 묘한 기운만 내뿜고 있다. 학교에서 눈뜨고 자고 물리 선생한테 맞은 일을 되새기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밤에 꾸었던 꿈 생각도 났다. 오늘 배운 것들 중에서 물리 시간에 들었던 것들 밖에 생각이 안 난다. 생각만 나지 뭔 소리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뭐 오늘 하루 배웠는데 얼마나 많이 알 수 있을까. 저기 뒤에서 뭔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소리가 저어기서 계속 들려온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제법 빠른 속도로 오고 있다. 등 뒤에서 긴장감이 느껴진다. 내가 걸어가고 있으니까 내 뒤에서 나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은 내 속도를 빼야 원래 속도가 나오나 아니면 더해야 내 속도가 나오나? 음..헷갈리는군. 아까는 조금 이해한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니 모르겠다. 뒤의 물체는 가속도로 오고 있으니까 아까 중력은 가속도랑 같다고 했으니까 저것이 내 옆을 지나갈 때 순간적으로 내가 집중을 해서 바라볼 수 있다면....음, 뭐였더라. 까먹었다.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순간, 뒤에서 달려오던 물체가 내 옆을 지나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것을 쳐다보았다. 웬걸, 나의 사모하는 그녀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예쁜 모습은 저 멀리 떠 있는 구름들의 모습과 겹쳐 더욱 경이로워 보였다. 그녀의 머리는 많이 헝클어져 있었다. 저녁 노을에 그녀의 뺨은 더욱 붉어보였고 그녀의 눈시울도 붉어보였다. 땀방울이 그녀의 눈과 귀 사이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듯 흔들거렸다. 아니, 땀방울이 아닌 것 같았다. 눈물인 것 같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가 지나갔다. 왜 우는 걸까. 내가 잘못 본 거였나. 자전거 타고 달리다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런건가. 그녀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옆쪽에 대어놓은 그녀의 자전거를 보았다. 그녀의 자전거는 왠지 우울해 보였다. 수위 아저씨 옆을 지나 계단으로 향했다. 운동도 할 겸 계단을 올라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우리 집은 그렇게 높이 있지 않다. 그녀의 집은 그렇지만. 한 층 한 층 뛰어올라갔다. 네 번만 더 뛰면 우리 집이다. 내 방에 들어가 가방을 팽개치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정신이 몽롱한 것 같다. 자꾸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걸린다. 울고 있던 것 같았는데... 내가 잘못 본 것일까. 그녀에 대한 생각과 몽롱함이 섞여 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아이구, 네시간이나 자버렸다. 벌써 아홉시다. 잠에서 깬 날 보고 엄마가 오늘은 피곤한 것 같아 그냥 자게 냅뒀다며 밥을 차려줬다. 밥을 먹고 엄마에게 성적표를 보여줬다. 10등 이었다. 저번보다는 오른 등수다. 엄마는 내가 몇 달 전부터 집중을 잘하기 시작하더니 성적도 조금씩 오른다며 좋아하셨다. "윗집에 너랑 동갑인 여자 애는 집중을 잘 못한다더라. 걔네 엄마가 그러던데 걔는 공부하는 시간은 많은데 성적은 전학 온 후가 더 안 좋고 요즘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더라. 걔네 엄마한테 우리 아들 자랑하니까 글쎄 그렇게 부러워하지 뭐니." 엄마는 그 말씀을 하시며 좋아하셨다. 나는 내심 '그럼 제가 걔랑 같이 공부하면서 숙제도 서로 도우고 하면 어떨까요?' 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쩌랴. 내 성격이 그런 것을. 이 말을 할 용기가 있었다면 벌써 그녀에게 말을 걸고도 남았다. 이빨을 닦고 오늘도 밤새 공부를 하기 위해 아까 내던진 가방을 풀고 책들을 정리했다. 오늘 배웠던 것들과 내일 배울 것들 복습 예습 모두 하기로 맘 먹었다.... 한 시간쯤 지나서였을까. 위에서 큰 소리로 소리치는 어떤 아줌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 아파트에 쩌렁쩌렁 울리는 듯 했다. 누군지 뻔했다. 나의 그녀의 엄마였다. 근데 이번엔 말투가 좀 달랐다. 굉장히 화가 나 있는 말투였다. "이것이 봐주고 봐주고 또 봐줬는데 이번엔 아주 종지부를 찍어놨어! 앙? 너 공부를 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 앙? 공부를 했는데 왜 이 모냥이야? 공부하면서 딴 생각하니까 그렇지! 책상에 앉아있기만 하면 뭐해? 정신은 딴데다 팔고 눈만 책을 보고 있는데! 저어기 아래층 집 엄마 아들은 시험 볼 때마다 성적이 오른다는데 왜 너는 볼 때마다 내려가? 앙? 그리고 이번 성적은 이게 뭐야 이게? 시험 볼 때도 한 눈 팔았어? 한 눈 팔았지? 설명 좀 해 봐 이년아! 어떻게 15등이나 석차가 떨어지냐고? 말해봐! 말해! 어서! 앙? 이것이!" 때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엄마는 더욱 더 크게 소리질러 댔다. "언제 정신 차릴래, 언제, 앙?" (찰싹찰싹) 위에서는 약했지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이 울면 다 되는 줄 알아?" (찰싹찰싹....) 너무나도 잔혹한 소리에 나는 괜히 쫄았다. 한 편으로는 그녀의 못된 엄마를 때려주고 싶었다. 나의 그녀에게 그렇게 심한 짓을 하다니...간혹 들려오는; "에구 내가 못 살어 저것 때문에" 하는 그녀의 엄마의 사람들 다 들으라는 듯한 큰 목소리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멎었고 아파트는 다시 조용해졌다. 얼마 후 거의 자정이 되어갔다. 나의 머리는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혼란스러웠다. 당장 그녀의 집으로 올라가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육체는 책상에 앉아 책을 펼치고 연습장에 뭔가를 쓰며 공부를 하고 있는 듯 했지만 나의 정신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나의 몸 동작은 거의 매일 같이 반복된 학습에 의해 내가 아닌 나의 무의식이 조종하고 있는 듯 했다. 지금 책상 위에 펼쳐놓은 책이 뭔지 몰랐다. 연습장에 무슨 글씨를 쓰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의 몸은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가 내 몸을 느끼고 있는 건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몸은 지 움직이는 대로 놔두고 내 정신은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내가 용기만 있었다면 그녀에게 말이라도 걸어볼 텐데....근데 그녀가 나를 좋아할까? 혹시 아까 그녀의 엄마가 그녀를 나랑 비교해서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마음 같아서는 그녀 대신 시험을 봐주고도 싶은데. 그녀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하다가 이윽고 밤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까 펼쳐져 있던 페이지가 지금도 펼쳐져 있는건가. 아니면 넘겨왔나. 하는 생각도 들며 주위에 신경을 기울였다. 몸은 공부를 하게 놔두고. 때때로 불어와 커튼을 펄렁이게 하는 바람. 그늘이 그늘을 삼키고 있는 듯한 정적. 여기에 내가 있다.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다. 이곳은 내 방이다. 내 방은 내 집에. 내 집은 이 아파트에. 이 아파트는 이 동네에. 이 동네는 이 도시에. 이 도시는 이 나라에. 이 나라는 이 지구에. 이 지구는 태양계에. 태양계는 은하계에. 은하계는 이 우주에. 가장 큰 것은 끝이 없고 가장 작은 것은...음... 어느덧 깊던 밤이 더 깊어졌다. 귀신에 홀린 듯 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내가 무슨 책을 놓고 무슨 글을 쓰고 있는 건지 보았다. 순간, 나의 가슴은 철렁했고 머리엔 쥐가 난 듯 띵했다. 나는 펜을 놓고 무의식적으로 커튼을 걷어 창 밖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가로등 하나는 전구 수명이 거의 다 되었는지 껌뻑껌뻑 거리고 있었고 길거리에는 사람 하나 차 하나 보이지 않았다. 건물들의 아랫부분은 음침한 기운을 띠며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바람은 곡소리를 내며 아직 나무에 붙은 낙엽들을 떨구어 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번쩍거림과 함께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나는 정면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떨어지는 그 모습을. 그리고 내가 짝사랑하는 그녀의 눈물 가득한 두 눈동자를. 그녀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두 팔은 흐물흐물 양옆으로 뻗어있었으며 예쁜 얼굴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내 방에서 뻗어 나온 형광등 빛은 눈물로 범벅된 그녀의 눈 속에서 놀란 모습의 나를 영원의 순간동안 비추었다. 출처 : 붉은 무당 벽돌집 작가 : 검은바이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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