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란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어서 그런지 자고 일어났는데 몸이 개운치가 않았다.
아침으로 사과 반쪽과 커피 한 잔을 머그컵으로 한가득 마시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엄마, 나 동네 가까운 산으로 산책 좀 하고 올게.”
“그래... 혼자갈래?”
“음, 혼자 좀 생각 좀 정리할 게 있어서...”
“알았다. 소리는 내가 잘 데리고 있으마.”
“엄마, 나도 따라갈 거야!”
소리는 엄마랑 같이 나가겠다고 떼를 썼다.
“오늘은 산에 다녀와야 해서 안 돼. 나중에 공원 갈 때 데리고 갈게. 알았지? 할머니랑 잘 놀고 있어. 엄마가 소리 좋아하는 거 많이 사가지고 올게.”
이른 아침의 산책로는 공기가 도심과 달리 시원하고 상쾌했다.
미영은 결혼하고 애 낳고 키우느라 혼자 한가하게 산책을 할 겨를이 없었었다. 거기다 남편이 밖에 나가는 걸 싫어해서 아예 밖을 나갈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오랜만에 누구의 구속도 없이, 산책을 할 수 있다는 게 천국이었다. 걷는 운동만으로도 땀이 송송 솟아나며 노폐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등줄기에서 이젠 제법 땀이 줄을 그으며 흘러내리기 시작하자 답답했던 몸이 홀가분해졌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지 않았다.
10분 후쯤 남편에게서 장문의 문자가 도착했다.
[잘 지내고 있어?
매일 매일 난 이런 생각을 해.
오늘은 당신이 집에 와 있을까? 퇴근하면서 부푼 기대를 품고 곧장 집으로 달려오곤 했어.
집 현관문을 열면 당신이 있을까? 마치 우리가 연애할 때 가슴이 뛰는 그 시절처럼 기대하고 열었지만 집은 고요한지, 보름이 넘어가네.
불 꺼진 조용한 집에 들어가는 기분은 마치 죽어서 무덤 속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지금 많이 후회하고, 그리고 당신이 너무나 보고 싶고 우리의 소중한 딸 소리가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
철없던 날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될까?
당신이 떠난 후 내가 얼마나 가정의 소중함을 모르고 엉망으로 살았는지 깨달았어.
내가 그동안 얼마나 당신 그늘에서 편안함을 누리고 살았는지 당신이 떠난 지금에야 느끼는 바보라는 걸 많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오늘은 당신과 소리가 반겨주는 집에서 따뜻한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천국 같던 예전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염치없지만, 그래도 기대해 볼게.]
글씨를 읽는데 갑자기 글씨들이 너울거려 읽을 수가 없었다. 눈에서 물결이 파도를 치며 흘러내렸다.
미영은 남편이 그동안 어떤 마음일까? 궁금했었다.
평소엔 경상도 남자도 아닌데 무뚝뚝하게 그렇다, 아니다, 알았다. 그런 정도의 단답형으로만 문자를 하던 사람이 이렇게 장문을 써서 보낸 것이다.
글을 보자 미영은 남편이 많이 뉘우치고 있구나, 싶었다.
거기다 미영이 듣고 싶은 말을 진심 어린 마음으로 한자, 한자 꼭꼭 눌러쓴 것이 보였다. 남편이 잘해보겠다는 마음이 들어간 문자에 미영은 고마움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래, 이혼녀로 사는 것보단 남편을 한 번 용서하는 게 낫지.’
미영은 남편의 문자에 올라가던 산길을 턴 해서 서둘러 친정집으로 돌아갔다.
“엄마, 나 이혼은 아무래도 힘들겠어.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겠다니 한 번 용서해줄래.”
“김 서방이 연락 왔니?”
“응... 다신 그런 짓 안 하겠대.”
“지금 당장 제 몸 불편하니 반성하는 척하는 거지, 도박은 절대로 못 끊는다고 입 달린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하지 않던?”
“아냐, 엄마. 이렇게 진실되게 반성하는 데 엄마, 기혁 씨를 믿지 말고 나를 한 번 믿어봐. 앞으로 엄마 걱정 끼쳐 드리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아볼게.”
미영은 바로 일어나서 집으로 갈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래,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다고 한 번만 용서해줍시다!”
아버지는 마뜩치않아 하는 엄마에게 한마디 말을 하고선 짐을 싸는 미영의 손길을 부지런히 도왔다.
엄마도 주방으로 가더니 사위가 좋아하는 제주 갈치를 냉동실에서 꺼내고 밑반찬도 바리바리 싸기 시작했다.
‘정말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이지만 일단 딸 미영이 저렇게 제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을 보자, 더 이상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버지의 차로 집으로 돌아온 미영은 그동안 엉망이 되어 있을 줄 알았던 집이 깨끗이 치워져 있자 갑자기 남편이 고마운 마음 까지 들었다.
‘친정엄마가 아무리 잘해줘도 역시 내가 살던 내 집이 좋구나!’
미영은 집을 치워 놓은 남편의 행동을 보고 남편이 그동안 잘못했던 일들을 다 잊기로 했다.
‘정말 달라졌어! 그래, 이혼한다는 게 누구 집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미영은 저녁에 남편이 좋아하는 메뉴로, 신나는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 만들기 시작했다.
된밥보다 질척한 밥을 좋아하니 밥솥의 물의 양도 넉넉히 부었나 확인했고, 소금 전혀 하지 않은 갈치구이와 슴슴한 된장찌개와 친정엄마가 못 미더워하면서도 이것저것 싸주신 반찬들을 퇴근 시간에 맞춰 정갈하게 세팅해 놓았다.
분주하게 식탁을 꾸몄는데 혹시나 오늘 안 들어오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문자나 전화를 하고 싶진 않았다.
‘예측하지 않은 선물이 기대가 큰 것 아닌가?’
미리 말해서 괜히 돌아온 이벤트를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남편은 정말 퇴근 시간에 맞춰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왔다.
기혁은 불 켜진 집이어서 놀랐고, 오늘따라 아내가 끓여준 된장국과 갈치구이가 몹시 그리웠는데 집에 들어서자 그 그리운 냄새가 확 느껴지자 콧날이 빙~ 하고 울었다.
“아빠~!!”
소리도 아빠를 오랜만에 만나자 반가워서 뛰어가 반겼다.
‘내가 이런 천국을 모르고 살았다니...’
기혁은 소리를 번쩍 들어 안아주고, 그리고 미영을 조심스럽게 꼬옥 안았다.
“손만 씻고 밥부터 먹어. 음식 식으면 맛없으니까.”
“고마워. 이렇게 돌아와 줘서. 내가 미안했어.”
“......”
미영은 아무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가정을 꾸려 갔지만, 남편이 따라와 주지 않으니 힘들었던 지난날들이 스치며 눈물이 소리 없이 흘렀다.
평소에 말이 없던 기혁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동안 밖에서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도 해주었다. 평소엔 똥 씹은 얼굴로 밥상머리에 앉아 밥이 되다, 질다, 반찬이 짜니 안 짜니 투정하던 기혁은 그런 말투는 싹 없어지고, 미영이 늘 꿈에 그리던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사랑스러운 눈빛 교환하며 저녁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오랜만에 뿌듯한 행복을 느꼈다.
다음 회에서 만나요.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 [ Una furtiva lagrima. 남몰래 흐르는 눈물]를 불 러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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