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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일곱,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게시물ID : gomin_14961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천랑무적
추천 : 12
조회수 : 1550회
댓글수 : 117개
등록시간 : 2015/08/08 03:30:04
제 나이 서른 일곱... 결혼은 포기했습니다. 연애는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서른 일곱이면, 집은 못사도 전세 정도는 살 줄 알았고 차도 한 대 있을 줄 알았고
여우같은 마누라에 토끼 같은 자식이 둘 정도는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는 게 정말 그렇게 생각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더군요.

저는 집도 없고, 차도 없고 다행히 빚도 없습니다. 
그 나이 먹을동안 뭐했냐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할 말이 없네요.
볼품 없는 외모에 살도 많이 쪄서 연애는 포기하고 살았습니다.
장보러 나가면 시장 아줌마가 '애는 잘 크냐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거보면
영락없이 오빠 소리 듣기를 포기해야하는... 애 둘 있는 아저씨 처럼 생겼나 봅니다.

요새 한 사람이 자꾸 생각납니다.
그 사람하고 같이 식사하고 같이 영화보고 술 한잔 하면서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상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기분 좋아 절로 웃게 되는 상상입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 데 혼자 김칫국부터 마시는 제 꼬라지를 보면서
한없이 씁쓸해지고 쓸쓸해지면서 쓴 웃음만 지어지는데도
마음 속에 그 사람이 떠오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아니 떨쳐낼래야 떨쳐지지 않는다는게 맞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을 처음 본 건 8개월 전 면접장에서 였습니다.
저는 구직자, 그 사람은 면접관... 
긴장되는 면접장에서 저는 그 사람을 계속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첫 눈에 반한거냐고 물어보면... 네 첫 눈에 반했다고 해야겠네요.
그녀는 지금 제 직장 상사입니다. 그녀는 팀장이고 저는 팀원입니다.
지금은 같은 팀에서 일하고 있지만, 입사 초에는 다른 팀이었습니다.
8개월 동안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인사하는 정도였습니다.
같은 팀이 된 것은 불과 며칠전입니다. 저는 정말 뛸듯이 기쁩니다.

 그 사람은 예쁘지는 않습니다. 직장동료에게 물어보니 평범하게 생겼다고 하는데...
제 눈에는 무척 예뻐보입니다.  피부가 무척 하얗고 매끄럽고 좋습니다. 키는 저보다  작고 약간 통통한 몸매에 도수가 조금 높은 안경을 씁니다. 말할 때 입술이 오밀조밀 고양이 입처럼 됩니다. 그게 참 귀엽습니다. 말도 조리있게 참 잘합니다. 사용하는 어휘를 볼 때 교양이 있는 사람이구나. 그런게 느껴집니다. 단아하고 지적인 매력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뻑 갔습니다.
나이를 먹어보니 알겠더군요. 예쁜 것 보다 이런 단아하고 지적인 매력이 더 치명적이라는 거요.
  
일하는 방식도 참 진국입니다.
실적에 쫓겨 팀원들을 닥달하지 않고, 위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밑에 사람들에게
짜증으로 풀지도 않습니다. 누가봐도 힘들고 짜증낼만도 한 상황에서 
언제나 생글생글 웃으면서 팀원들을 대하는 걸 보면
남자 여자를 떠나서 인간적으로도 참 존경할만 합니다.
눈에 콩깎지가 씌여 객관적인 평가는 아닐 것입니다. 근데 아무리 주관적이어도
없는 것을 지어내서 얘기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투잡을 뜁니다. 밤에는 은행 심야상담업무를 하고,
낮에는 여기 카드사 인바운드 상담업무를 합니다.
밤 8시 30분에 출근해서 다음날 아침 8시에 퇴근합니다.
그리고 50분 후에 낮에 일하는 곳에 출근합니다.
잠은 이틀에 한번 잡니다. 만성 피로에 시달리지만 이렇게 투잡을 뛰어야
겨우 남들 버는 만큼만 법니다. 투잡을 뛰지 않으면
부모님을 모시고 살 수도 없고, 제 노후도 대비하지 못합니다.
힘들고 피곤하지만 꾹 참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항상 잠이 부족하니 쉬는 시간, 점심 시간마다 휴게실 소파에 누워 부족한 잠을
보충합니다.
그러다가 은행패용증을 소파에 떨어뜨렸는데 그걸 그 사람이 주운 것입니다.
저를 잠깐 보자고 하더니 조용히 패용증을 건네주는 걸 보면서
저는 살짝 감동했습니다.  사실 밤에도 일한다고하면 채용하지 않을 까봐
속이고 입사한 까닭에 그대로 잘려도 아무소리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은은한 미소로 패용증을 돌려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제 마음이 일시적인 것이겠거니,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겠거니 했습니다.
정신 차리고 보면 일하고 있고, 시간만 나면 잠을 자야했기에
연애든 취미든 도저히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에 대해서도 사실 자신이 없기도 했구요.

6개월 정도 지켜본 그 사람은.... 참 괜찮았습니다.
저 사람 참 마음에 든다....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없습니다.
정말 이 것 저 것 그 사람에 대해서 궁금한게 많습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취미는 뭔지... 집에서 쉴 때는 어떤 모습으로 쉬는지...
어떻게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지... 술은 잘 못마신다고 했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는 정말 하나도 모릅니다. 
어떤 책을 읽는지, 어떤 정치 성향을 갖고 있는지, 
현 시국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혹시 오유는 하고 있는지
어떤 인터넷 커뮤니티를 하는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양친은 다 계신지 형제 자매는 어떻게 되는지...
정말 시시콜콜한 거 사소한 거 하나하나가 다 미치도록 궁금합니다.
 같은 팀이 된 후로 몇가지 궁금한게 풀렸습니다.
그저께 8개월만에 그녀가 의정부에 산다는 걸 알게되었습니다.
출퇴근은 어떻게 하는지 어디사는지 궁금했는데 그걸 알게되었습니다.
무척 기뻤습니다. 1시간정도 걸린다는데 지하철 한번 갈아타면 되서
나름 편하다고 합니다. 얼마나 궁금했던 것인가....그 정보가 저한테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듯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또,  결혼 한 줄 알았는데 미혼이랍니다. 그 얘기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유부녀를 좋아하는 건 아닌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것 같아 걱정됐는데
큰 짐을 덜었습니다. 사실 우리 나이대가 그렇습니다....
젊고 이쁘고 싱그러운 분들은 이런 마음 잘 모를겁니다. 저도 사실 그 사람이
애 하나는 있는 줄 알았거든요. 그래도 자꾸 좋아지는 마음에  이러면 안되는거 아닌지
무척 괴로웠는데 큰 짐을 덜었습니다.
남자친구도 없답니다. (이건 본인이 직접얘기한게 아니라 다른 팀장님에게 들었습니다.)
카톡 프사를 봐도 확실히 연애하는 분위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쾌재를 부르는 제 표정을 숨기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그 사람이 남친이 없다고 해서 나하고 사귀어줄것도 아닌데도
제 마음이 이미 그의 남친이 된 것 같은 착각.... 짝사랑 해본 분들은 아실겁니다.

 그 사람에게 바라는 건 없습니다.
 그냥 딱 이대로만 있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네, 어디서 나보다 괜찮은 놈 만나서
연애만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뜬금없이 결혼한다며 청첩장 내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랑 안사귀어도 좋고, 저를 거절해도 좋습니다.
사실 제가 너무 못나서 그의 남친 되는 것도 미안합니다.
남편이 되는 상상은 너무 달콤하고 즐겁지만, 결혼까지는 절대로 바라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제가 그 사람 고생만 시킬 것 같아 너무 미안하거든요.

 가끔 한달에 한번 찾아오는 꿀 맛같은 한나절 휴일에
그 사람과 식사나 같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퇴근하고나서 더운데 시원한 치맥 같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영화 볼 사람이 없다면, 저랑 같이 보고싶어하는 영화 보여주고 싶습니다.
연인관계가 아니더라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요.
술 한잔 하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하는 상상.... 지금 글을 쓰면서도 하고 있네요.
 저는 그 사람의 사적인 거 하나 하나 알아가는 것만으로 저는 충분히 행복할 거 같습니다. 
 
 아, 어제 8개월만에 용기내어 '언제 한번 시간내서 같이 식사나 하시죠.'
한마디 건넸습니다. 워낙 지나가는 말인 것 처럼.... 인사치레인 것 처럼 
말을 걸어서 정확한 날짜는 잡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그러자고 했습니다.
싫다고 안한게 어디인가요. 다시 언제 언제 시간 괜찮아요? 라고 물어볼
용기가 났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인사치레로 답한 것은 아닌지 걱정되네요.

아.... 내 나이 서른일곱,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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