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라라라라 (2013-08-29 18:31:16) (가입:2012-05-20 방문:504) 추천:1 / 반대:0 IP:58.127.***.34
{{{biblestudy4u //
반박은 하셨다고 했는데... 댓글에 대한 반박만 있고... 예수의 실존에 대한 자료는 없는 건가요~??}}}
==> 네^^ 성의 없어 보였다면 미안합니다. 아래 댓글 답변 달면서 다소 부연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 산신령 (2013-08-29 18:54:29) (가입:2011-07-02 방문:783) 추천:1 / 반대:0 IP:221.139.***.82
{{{ biblestudy4u//
비서가 사장의 구술을 타이핑 하면서 그 문서에 "그 사람이", "사장님이"로 적지 않습니다. (제가 예를 든 마태서, 요한서경우) 그리고, 비서가 직접 사장님의 지시사항을 듣고 썼다면, "사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면 될 걸, 사장님 말씀은 아예 없고, 캐캐묵은 경영학 원론을 들고 나와서 이러쿵 저러쿵 할 필요가 있습니까? 즉, 사도들이 직접 예수의 말을 듣고 썼다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하면 될 걸, 예수 말은 아예 없고, 케케묵은 구약 구절을 들고 나와서 이러쿵 저러쿵 할 필요가 없죠.(제가 예를 든 바울 서간문들 경우. 기타 베드로 전후서, 야고보서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서 경우, 증언과 저자가 따로국밥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사도 요한이 썼다면 애초에 증언은 필요 없죠. 그냥 자신이 목격한거 쓰면되지. 또, 같은 사도 요한이 썼다는 요한계시록에는 구구절절 "내가...", "나 요한이..." 운운하며 기술합니다. 같은 요한이 쓰면서 하나는 '따로국밥'으로, 하나는 "내가..."하면서 쓴다???}}}
==> 사장과 비서 비유??-- 모든 비유는 적용 상황의 지엽적인 변두리까지 모두 일치시키려하면 무리가 따를 수 있습니다. 비유의 적용의도의 핵심적인 취지에만 촛점을 맞춰보시길 권해드리고요^^ 누구라도 성서 한번만 읽어보면 사장이 비서에게 일일히 한자 한자 불러주는 식으로 성서 전체가 기록된건 아니라는 알수 있겠죠^^ 저도 그런 적용을 하려는건 아니니까요
하느님(하나님)이 필자들에게 성서를 기록하도록 영감을 준 방법이 다양합니다.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가르침의 원칙만을 적용하거나 예수의 행적에서 성경 예언이 성취된 경우를 묘사한것 등도 감안하시고 인용 증언 구술등에서도 들리는대로 쓰기만 있는것이 아니라 사상전달을 위한 축약이나 생략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으로 인한 차이와 구술자와 서기관 역할사이의 문체 허용(마치 사장이 최종 승인내지 교정하여 ok한 비서의 작성 문건- 물론 이 비유도 세속적 의미로 까다롭게 따지면 결국 정도의 차이에 따라 필자이냐 필사자이냐 저자이냐 공동 편저이냐 등 분리해야한다고 하면 끝이 없을지 모르죠.)이 있는 부분들도 고려해야 합니다.
아무튼 성서의 정경성 여부는 "영감을 주다"라는 개념으로 비추어 하느님의 인도 여부에 대한 것과 내부적 조화등의 많은 고려 점들이 있죠 성서 66권과 관련하여 각각 이부분 깊이 들어가는 것은 피차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함/ 일단 패스)에 의한 문체섞임으로 인한것과 번역자에 의해 원어로부터 다국적 현대어들로 번역될때 어순과 문법의 한계에서 의역 직역의 정도와도 관련된 지엽적인 문제가 일부 성서 독자에게 부담이 되는 경우가 있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어들이 가진 사전적 의미도 광의와 협의가 있고 그래서 당연한 얘기지만 주요 쓰임새를 고려해야 하지만 문맥과 성서 전체에 흐르는 하느님의 목적 그분의 특성에 비추어 가장 일치된 개념을 선택하여 번역해야 하는 노력이 요구되기도 하지요. 물론 일부 번역판들 중 명백히 드러나는 심각한 오역부분들도 있죠. (예컨데 가톨릭과 기독교의 최상의 상징물로 사용되는 단어: 십자가(x) = 기둥(0), 고통의 기둥) 다행히 그런 부분은 실상 고대 사본 비교연구를 통해 교정된 정확한 번역판들에 의해 사상전달 오류를 모두 잡아낼 수 있습니다. 다행히 성서 문헌만큼 장 절의 구분은 물론 콘코던스 사전들을 통해 성서 내부에 사용된 글자 하나하나 문단 하나하나가 서로 수없이 잘 비교되고 분석된 고대문헌도 드물다는 점은 현대 성서 연구생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 할만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서간문 경우
예수의 지상생애 생존시의 12제자와는 달리 예수의 제자가 된 시점과 영감받은 바울의 서간문 기록시점이 복음서 필자들과 차이가 있다는점도 고려하셔야하고 부분적으로는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을 구별하는 정도만으로도 님의 혼란은 어느정도 해결될 문제가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필자가 자신의 반응이나 역할을 묘사할때는 얼마든지 일인칭 대명사나 자기 이름을 언급 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특히 요한이 계시록을 쓴 시점과 계시받은 방법을 이해하면 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요한이 예수의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쓴 시점은 BC 96년경이니까 예수께서 죽으신지 60년이상 지난뒤임 따라서 계시록은 대부분 예수와 함께 동행하면서 지상생애 실록을 목격담이나 교훈을 역사적 서술 방식으로 쓰거나 예수께서 불러주는 것을 단순히 받아쓰기 식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 계시가 성취 되는 시대가 요한의 시대 관점으로는 주로 미래 있을 일에 대한 예언적인 환상(마치 총 천연 영상 드라마같은 초자연적인 생생한 꿈과 유사)을 기록 한 것인데 많은 초자연적인 환상의 장면들을 기록할때 곳곳에서 자신이 그 환상의 한 등장인물처럼 자신의 반응을 묘사한 경우도 감안해야합니다 "영으로 들어올려져서" 요한도 환상의 한 장면을 차지한 경우도 있고 계시록 전체에서 요한자신도 누군가의 역할을 상징한다는 점(성서 연구 초기엔 좀 어려운 부분일수 있음)에서 때로 필자가 자신의 이름을 요한이란 배우처럼 자기 이름을 언급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환상 중에 요한자신의 반응도 예언적 의미가 있댜는 점을 알게되면 많은 부분이 이해 됩니다.
어떤분들은 예수의 실존성을 논증하는 자료로 반드시 성서 내부의 증거보다 소위 "외부"의 고고학 자료만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외부증거로 제시된 역사 자료는 그 호칭이 "크리스투스/ 그리스도"이지 "예수"라는 단어가 없으니 또 다른 사람일 수 있다는 이의를 제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전혀 배제할 수는 없죠. 하지만 예수라는 이름이 발견된다 할지라도 이번엔 그리스도란 칭호와 함께 발견되지 않으면 그 역시 "김철수" "홍길동"식 동명이인 일수 있다는 이의도 가능하겠죠. 실제로 "예수"라는 이름도 당시 동명이인이 많았으니까요? 그렇다면 유전자 감식이라도 요구하거나 끝없는 자료보충이 필요한 것일까요? 예수라는 이름은 없어도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지닌 사람의 사형수 이야기는 그 시대배경의 일치성등을 고려하여 예수의 실존에 대한 보충자료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사형된 그리스도"에 관한 성서이야기에 적합하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대목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세속역사가의 자료에서 "사형수 그리스도"를 언급할 때 그들이 무엇을 염두에 두었던지 간에 그리스어 "크리스투스"-"그리스도"는 성서 용어상으로는 히브리어 "마시아흐"-"메시야"에 상응하는 그리스어인데 단지 '보냄 받은자'란 부수적 개념만 아니라 주로 성서에서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거나 인용할때 그 주요의미는 "기름부음 받은자"로서 구원의 '메시야'/ 구출자로서 '임명되신 분"이란 개념을 전달 합니다. 성서지식이나 예수에 대한 믿음이 전혀없는 어떤 역사가가 "사형수 그리스도"를 기록으로 남긴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 아닙니까? 그 "그리스도"를 장터에 심부름으로 "보냄받은" "철수"나 "영희"쯤으로 생각하든 하느님에 의해 인류의 구원자로 대속주로 "보냄받고 임명받은" "예수"로 생각하든 여러분의 자유이지만 시대배경상 예수일 가능성도 매우 높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좀 더 부언하자면
예수의 실존성의 증거 자료로 또한 성서내부의 증거를 제시 하는 것은 과연 비합리적일 까요? 성서필자들의 목격증인으로서의 자격을 고려할때 간과해선 안되는 것은 그들의 정직성과 그들이 누구보다 신뢰 할수 있는 기록을 남길 수있는 입장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성서기록 장면에 등장하는 예수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말살시키려 극렬한 노력을 기울인 반대자들 대부분이 유대사회의 역사적 실존 인물들로서 당시 권세를 누리던 유대종교 지도자들였고 그 반대자들의 실존성은 대부분 배격되지 않는 등장 인물들입니다.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사람들은 당시 평민에 대한 권력남용에 관한 기록도 가장 잘 묘사 할수 있었고 예수와 얽힌 유대사회상을 가감없이 그들의 실태를 기록하는 것 역시 매우 신뢰 할만 합니다.
그런 기록을 남기는 것은 필자들이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하거나 때로 목숨을 내놓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기득권자들이 예수의 생명과 그의 이름과 그의 행적까지 말살하고 싶어 했던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증언한 목격자들의 증언이 단지 "예수의 제자들"이란 이유만으로 정당한 증거로 채택할 수없다고 잘라 말할수 있을까요? 예수의 제자들의 정직성은 당시 권력자들의 박해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일시적으로 예수를 배신한 비겁한 자신들의 행동은 물론 인간적인 많은 약점을 드러낸 배경까지 숨김없이 기록한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형수 예수와 동시대의 사람들로서 "예수를 매우 신뢰한 사람들"이 예수를 위해 증언한 것이 란 말과 같습니다. 물론 소위 "외부"의 증거가 현재보다 더 풍부하면 금상첨화이겠지요 그러나 예수에 대한 증거로서의 복음서 필자들의 기록은 그 증거의 양적 질적 "풍부함"을 지녔다고 해도 결코 손색이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 혹독한 박해에도 순교를 각오하거나 실제 죽임을 당한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슨 휴거 집단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을 대하듯이 쉽사리 "광신도"라는 마녀사냥식 위험한 용어로 매도 할 대상은 결코 아닙니다.
★ 산신령 (2013-08-29 18:54:29) (가입:2011-07-02 방문:783) 추천:1 / 반대:0 IP:221.139.***.82
의 글 계속
{{{뺨 등장하는 구절 많이 알려주셨는데, 어떤 구절은 대항하지 마라 의미가 아니라, "야훼가 대신 갚아줄것이다"라며 이를 박박가는 구절입니다. 로마서
12:17-19를 예를 드셨는데, 이 부분은 신명기 32:35와 잠언 25:21 구절을 인용한 겁니다.
신명기 32:33-35
32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으로 담근 독한 술이요, 독사의 독이 그득한 술이다.
33 '이 독한 포도주는 내가 쓸 데가 있어서 숨겨 놓았던 것, 나중에 쓰려고 곳간에 보관하여 둔 것이다.
35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니, 내가 갚는다. 원수들이 넘어질 때가 곧 온다. 재난의 날이 가깝고, 멸망의 때가 그들에게 곧 덮친다.'
야훼가 원수를 갚아주는 날이 곧 오며, 원수들에게 재난이 닥치고 멸망하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얘깁니다. 그 앞구절의 독포도주를 쓸데가 있다면서 보관하는 구절 역시 원수갚을 날을 기다리며 이를 가는 의미입니다. "원수 사랑"이나 "보복하지 말라"가 아니라, 조금만 기다리면 "야훼가 다 보복해 준다"입니다.}}}
==> 간단히 말하면 " 약은 약사에게 심판은 심판관에게죠"
세상의 법에서도 분하고 억울한일 당하면 그 원한을 직접 갚으라고 하나요? 직접 총기난사하고 손수 즉결심판을 하라고 하나요? 아니죠? 그럼 묵인하고 내버려 두라고 하나요? 그것도 아니죠? 법에 따라 사법당국에 맡기라 하지않습니까! (물론 인간 재판관들의 허다한 오심과 심지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불공정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말입니다)
야훼는 최종 심판자이십니다. 성서에서 야훼는 주권자이고 입법자아며 최종 심판 집행권을 가진 분이라고 알려줍니다. 빗대어 말하자면 대법원인 셈이고 사법 당국인셈이죠. 그래서 심판은 그분에게 맡기라는 거죠.
"원수 사랑"이나 (스스로)"보복하지 말라" vs "야훼가 보복해 준다" "야훼에게 맡기라"는 것은 결코 상충되지 않습니다.
또한 누군가 하느님 사랑과 자비란 말 앞에 "무한한"이란 수식어를 붙인다해도 그말은 불공정을 무한정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현재 악과 고통(모든 슬픔, 고난, 환난따위 포함)이 허락된 세상이지만 무한정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 계시 21: 3, 4
심지어 억울하게 죽은자를 부활시켜 새로운 생명의 기회를 주실수도 있는 생명의 수여자이시기도 합니다. 누명 쓴 사형수 얘기 알죠 오랜 후 증거가 밝혀져 후기 재판관들이 그의 누명을 벗겨 주고 유족에게 보상 아닌 보상을 해 주는 경우가 있으나 결코 생명은 돌려주지 못하는 재판관들과도 다릅니다
★ 산신령 (2013-08-29 18:54:29) (가입:2011-07-02 방문:783) 추천:1 / 반대:0 IP:221.139.***.82
{{{나아가, 로마서는 바울이 썼다는데, 예수가 직접 말한 "네 원수를 사랑하라"거나, "뺨을 돌려대라" 구절 하나면 될텐데, 바울은 케케묵은 구약구절을 인용합니다. 즉, 바울은 예수가 생전에 무슨 말 하고 다녔는지도 하나도 모른단 얘깁니다.}}}
==>
바울의 14개 서한은 예수의 가르침을 몰라서라기보다 오히려 오랜 기간 율법의 기본취지를 잘못이해하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율법의 원래 취지와 기본원칙을 다루는 경우와 예수라는 실체가 오심으로 완성되고 마감되는 모형 또는 그림자 역할을 한 율법의 예언적 의미등을 다룬 부분이거나 구약성서의 성취를 언급한 경우들이 포함되 있었다는 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전도로 예수의 제자가된 사람들을 하느님과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살게 하려고 당시 다양한 지역과 도시의 후기제자들(바울이 자기 자녀처럼 여기거나 형제처럼 여기는사람들)에게 그들의 당시 상황에 맞게 구체적인 교훈을 한것 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서신은 아주 때에 적절한 교훈였습니다
★ 산신령 (2013-08-29 18:54:29) (가입:2011-07-02 방문:783) 추천:1 / 반대:0 IP:221.139.***.82
{{{뺨 돌려대기 의미에 대해, 저 내용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지만, 전혀 동감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수가 뺨을 맞자 왜 때리냐며 따지는 부분인데, 저 내용엔 언쟁이나 싸움을 피하라는 의미라고 설명하지만, 예수는 왜 때리냐며 발끈합니다. 이건 언쟁이나 싸움을 시작하는 반응이지, 피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이 부분 따로 예전 글 올립니다.}}}
===>
예수님이 "발끈"하셨다?? 물론 일부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에게 종종 "발끈"의 정도가 아니라 준엄한 심판선고적 말씀을 하실때 의분섞인 호통과 힐난을 하신적도 있으셨죠. 그런 경우에 비하면 님께서 "발끈"이라 묘사하신 이번 상황은 그야말로 "신발의 끈"도 안되죠. 그러나 이미 포워딩 해드린 참조문헌과 성서를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다시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성서를 통해 예수의 체포장면 전후 배경과 평상시 보이신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깊은 사랑과 편협한 종교인들과 권력을 남용하던 자들을 제압하던 그분의 말의 힘과 행실과 겸손의 특성등에 비추어 그 장면을 다시 그려보새요 그리고 체포되시던 니산월14일 전후 며칠간의 행적이라도 다시 읽어보신 후 그분이 자신을 고통스런 죽음으로 몰아갈 부당한 재판상황으로 빠져가는 환경을 결코 피하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참고 자료로
1. 성서 단어 설명 자료와
2. 2007년 가을 직업적인 교직자가 아닌 어느 평범한 사람들이 특정주제로 성서를 공부하기 위해 모여 토의했던 내용중에 관련문제(보복에 대한 성서의 견해)가 일부 다뤄진 적이 있어서 일련의 시리즈 자료중에 일부를 아래 옮겨 봅니다
아마 부분적으로나마 도움이 되는 내용을 일부 찾으실 수 있을듯 합니다
<참고 자료>
1. 성서 단어 설명
보응
(retribution)
개인이나 집단이 당연히 받아야 할 것에 따라, 상이나 벌을 주거나 받는 것. 특히 악에 대한 응보로 주어진 것 혹은 요구된 것.
히브리어 어근 동사 샬람과 가말의 변화형 혹은 파생어들은 “상”, “보응”, “응분의 처분”, “갚다” 등으로 번역된다. 그리스어 아포디도미, 안티미스티아, 미스타포도시아 그리고 관련 단어들도 비슷하게 번역된다.
이스라엘을 압제한 나라들에 대한 보응 모세는 죽기 직전에 모압 평원에서 이스라엘에게 알려 준 노래에서, 여호와를 자신의 적대자들에게 ‘복수를 하시는’ 분, 자신을 심히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분으로 묘사하였다. (신 32:35, 41; 히
10:30) 하느님은 완전히 자제하시는 가운데 자신의 공의와 온전히 조화되게 복수와 보응을 집행하시는데, 반드시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에만 그렇게 하신다. 예를 들어, 그분은 때때로 아시리아와 바빌론 같은 이방 나라들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시어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 처벌하셨다. (신 28:15-68; 왕둘 17:7-23; 대둘
21:14-20) 그러나 이 이방 나라들은 그들 나름대로 여호와와 그분의 참 숭배에 대한 미움을 품고 행동한 결과, 한도를 넘어 이스라엘의 패배를 크게 기뻐하고 이스라엘을 압제하였다. 따라서 하느님은 그들에게 보응의 심판을 선언하셨다.—사
10:12; 34:1, 2, 8; 렘 51:6, 56; 옵 8-16; 슥
1:15.
특히 바빌론은 여호와와 그분의 백성에 대한 해묵은 적의 때문에 보응을 당하였다. 바빌론에 몰락과 완전한 황폐가 닥칠 것이 예언되었다. 바빌론은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 사람 키루스에 의해 무너졌지만 그 후로도 여러 세기 동안 한 도시로 존속하다가, 마침내 철저히 황폐되어 다시는 재건되지 않았다. (예레미야 50, 51장) 상징적인 큰 바빌론도 그와 비슷한 보응을 당하여, “결코 다시 보이지 않”도록 던져져 가라앉게 될 것이다.—계 18:2, 6, 20, 21. 큰 바빌론 참조.
율법 아래서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엄격한 보응의 법이었지만, 부지중에 죄를 지은 회개하는 죄인에게는 자비를 베풀었다. (레 5:4-6, 17-19; 6:1-7; 민 35:22-29)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의도적인 범죄자들에게는 보응의 법이 온전히 적용되었다. (민
15:30) 어떤 사람이 거짓 증인으로 나서서 재판관들 앞에서 이웃에 대해 허위로 증언한 경우, 그는 보응을 받아, 자기가 무고한 사람에게 덮어씌우려고 했던 것과 같은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눈이 아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영혼은 영혼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아야 할 것입니다.”—신
19:16-21.
1세기 유대 나라에 대한 보응 유대 나라는 하느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과분한 친절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면에서 이기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여호와께서는 이 이기적인 행로와 태도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보응이 임하게 하셨다. 그들은 하느님의 의에 복종하는 대신 자기 자신의 의를 굳게 세우려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로 10:1-3) 그 결과, 그 나라 사람들 대다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지고 그분을 배척한 나머지 그분의 죽음과 관련하여 유혈죄에 연루되었으며, 그렇게 해서 자기들의 도시와 성전에 멸망이 닥치게 하고 나라가 황폐되게 하였다. (마 27:25; 단
9:26) 사도 바울은 시편(69:22)에서 인용한 글을 그들에게 적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다윗도 말합니다. ‘그들의 식탁이 그들에게 올무와 덫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십시오].’”—로 11:9.
불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보응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아들에게 순종하는 일의 중대성을 강조하면서, 율법 아래서 시행된 보응이 수반된 공의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굳건하게 되어 모든 범법과 불순종의 행동이 공의와 일치하게 보응[문자적 의미는 ‘대가의 지불’]을 받았다면, 우리가 그처럼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길 때에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주를 통하여 말해지기 시작하였고, 그의 말씀을 들은 이들이 우리를 위하여 확증한 것입니다.” (히 2:2, 3, 각주. 히
10:28-31 비교) 배교한 “불법의 사람”에게 닥치는 멸망의 심판은 그러한 보응의 예가 된다.—데둘 2:3, 9, 10.
복수
(vengeance)
손상이나 모욕을 갚아 주기 위해 처벌을 내리는 것. 보응 행위. “복수하다”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엑디케오는 문자적으로 “공의로부터”를 의미하며, 이것은 그 행위가 나타내는 바가 공의의 달성임을 시사한다. 성서에서 사용되는 바와 같이, “복수”는 대개 공의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보응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지만, 사람이 자신이 보기에 공정하거나 공평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자신이 만족할 만큼 실행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여호와께 속한다 여호와의 임명을 받거나 그분의 말씀에 의해 지명되어 복수 집행자로서 자격을 갖게 되지 않는 한,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복수하려 든다면 그것은 그릇된 일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며, 보응도 나의 것이다”라고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신다. (신 32:35) 시편 필자는 하느님을 가리켜 “오 여호와, 복수를 행하시는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시 94:1) 따라서 자신이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 가해진 그릇된 일—실제로 있었던 일이든 상상 속의 일이든—에 대해 앙심을 품거나 개인적으로 복수하려 든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단죄를 받게 된다.—레
19:18; 로
12:19; 히
10:30.
성경은 하느님의 분노가 모든 죄인과 범법자 위에 머물러 있음을 지적하는 한편, 죄인에 대한 온전한 공의—보응이 수반된 공의—를 완화하거나 보류할 근거가 있게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을 마련하신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 때문임을 알려 준다. (로
5:19-21; 고둘
5:19; 히 2:2, 3. 대속물 참조) 하느님은 그처럼 죄를 용서하실 때 자신의 의와 온전히 조화되게 행동하시며, 또한 자신의 마련을 배척하는 죄인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때도 의로우시다. 그런 자들은 하느님의 복수를 피할 수 없다.—로 3:3-6, 25, 26. 시 99:8 비교.
여호와의 복수에는 목적이 있다 여호와께서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행동하실 때 여호와의 복수는 구제와 유익을 가져온다. 게다가 그것은 공정한 심판관이신 그분에게 찬양이 돌아가게 한다. 시편 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로운 자가 복수를 보았기에 기뻐하리[라]. ···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확실히 의로운 자에게는 열매가 있고 확실히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느님이 존재하시는구나’ 하리라.” (시 58:10, 11)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복수하시는 주된 목적은 자신의 주권을 옹호하고 자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출
14:18; 시 83:13-18; 사 25:1-5; 겔 25:14, 17; 38:23) 그분의 행동은 또한 그분의 종들이 진실로 하느님의 대리자들임을 입증하고, 그들을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으로부터 구출해 준다.—출
14:31;
15:11-16; 겔 37:16, 21-23; 시 135:14; 148:14; 잠
21:18.
하느님이 복수하실 지정된 때 성경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적들에게 대규모로 복수를 표현하실 정해진 때를 가지고 계심을 지적한다. 예언자 이사야는 “우리 하느님의 복수의 날”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기원전 539년에 메디아·페르시아 군대가 고대 바빌론의 힘을 부수는 데 사용되었을 때에, 하느님의 복수가 하느님의 백성의 압제자였던 고대 바빌론에게 표현되었다. (사 61:1, 2; 13:1, 6, 9, 1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이사야의 예언의 일부(61:1, 2)를 인용하여 자신에게 적용하셨다. (누
4:16-21) 기록은 예수께서 “복수의 날”과 관련된 부분을 인용하셨다고 알려 주지는 않지만, 그분은 실제로 그“날”을 선포하셨으며 그날은 기원 70년에 예루살렘에 닥쳤다. 예수께서는 (로마) 군대가 그 도시 둘레에 진을 칠 것이라고 예언하시면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그런 일을 보거든 예루살렘에서 도피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공의를 시행하는 날[“복수의 날”]로서, 기록된 모든 것이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누
21:20-22, Int. AT, KJ, Ro, RS 비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임을 당하고 부활되시기 전에 이렇게 더 말씀하셨다. “[현 사물의 제도에 심판을 집행할] 그 날과 시간에 관하여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십니다.” (마 24:36)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이 알고 계시는 정하신 때에 반드시 복수가 집행될 것임을 밝히셨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이름과 종들을 위하여 정하신 때에 반드시 행동을 취하신다는 사실을 예시하면서, 한 재판관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재판관은 공의로운 판결을 받게 해 달라는 과부의 끈질긴 청에 못 이겨 “공의로운 판결을 받게 해 주어야겠다[“그 여자를 위해 복수를 요구해야겠다”]”고 작정하였다. 예수께서는 이 예를 하느님에게 적용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비록 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실지라도, 주야로 자기에게 부르짖는 택함받은 자들을 위해서 틀림없이 공의가 시행되도록 하시지[“복수하시지”] 않겠습니까?”—누 18:2-8, Int.
뿐만 아니라, 계시록에 기록된 사도 요한의 환상에서,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하던 증언하는 일 때문에 살육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다음과 같이 외치는 것을 보았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권자인 주여, 언제까지 당신은 심판을 미루셔서 땅에 사는 자들에게 우리의 피에 대한 복수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들이 받은 대답은 복수를 집행할 확정적인 때, 즉 “자기들처럼 곧 죽임을 당할 동료 종들과 형제들의 수가 [찰]” 때가 있음을 보여 준다.—계 6:9-11.
성경은 이 복수 집행이 큰 바빌론에서 시작된 다음, 이어서 “야수와 땅의 왕들과 그들의 군대들”에게 미칠 것임을 밝혀 준다.—계 19:1, 2, 19-21.
임명된 집행자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수를 집행하는 하느님의 수석 집행자이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다음과 같은 말로 위로한다. “여러분에게 환난을 가져오는 사람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겪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함께 평안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느님에게 의로운 일입니다. 이 일은 주 예수께서 자기의 강력한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타오르는 불 가운데 나타나셔서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우리 주 예수에 관한 좋은 소식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수하실 때에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은 주의 앞과 그분의 힘의 영광에서 떠나 영원한 멸망의 사법적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데둘 1:6-9.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아래서 그리스도인 회중을 돌보도록, 그리고 여호와의 은혜를 잃는 일과 불결함으로부터 회중을 보호하도록 임명되었다. 사도 바울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권위와 조화되게, “거짓 사도”로 인하여 분열과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고린도 회중에게 “우리는 ··· 모든 불순종에 대하여 처벌할[“복수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편지하였다.—고둘 10:6, Int;
11:13;
13:10.
회중을 돌보도록 임명된 연로자들은 “복수”를 집행할 권한을 부여받았는데, 그것은 저질러진 악행을 시정하여 공의를 시행하고 하느님 앞에서 회중을 의 가운데 다시 굳게 세우기 위한 조처를 취할 수 있는 정도의 권한이었다. 고린도 회중을 다스리던 성원들은 바울이 그들을 시정한 후에 그런 일을 행하였으며, 따라서 바울은 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그것이 여러분을 얼마나 진지하게 하고, ··· 그릇된 것을 바로잡게[“복수하게”] 하였습니까!” 이 사람들은 바울의 첫째 편지를 받은 후에 하느님의 뜻에 맞는 회개를 나타냈으며 그 편지 가운데 언급된 악한 사람을 추방했고 여호와 앞에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일을 하였다. (고둘 7:8-12, Int)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는 공의가 요구하는 온전한 형벌—모세의 율법 아래서 재판관들의 특별 권한이었던, 그런 자를 처형하는 온전한 복수—을 행악자에게 내릴 권한이 부여되지는 않았다. (레
20:10; 히
10:28) 그들은 단지 그런 회개하지 않는 악한 사람들을 회중에서 추방하기만 했다. (고첫
5:13) 그런 사람들이 만일 회개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면, 그들은 마침내 자신의 악행에 대해 온전한 처벌을 받아 영원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히
10:29, 30) 사실, 음행과 같은 불의를 자행하는 그리스도인은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 “여호와는 이 모든 일에 대하여 강력히 처벌하시는 분[문자적 의미는 “복수자”]이기 때문[이다].”—데첫 4:3-6, Int.
통치자들 정부 통치자들의 직무는 공의가 시행되게 하는 것이므로, 그들은 행악자들에게 복수를 집행할 때도 있다. 그리고 행악자들 중에는, 나라의 법이 옳은 것과 조화를 이루고 하느님께서 그러한 통치자들에게 허락하신 권위와 모순되지 않는데도 그 법을 어기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런 그리스도인도 포함된다. 그런 경우에, 이 통치자들은 하느님의 복수를 간접적으로 집행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술한 바와 같다. “통치하는 이들은 선행에 대해서가 아니라 악행에 대해서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 그것은 하느님의 봉사자, 곧 악한 일을 거듭 행하는 사람에게 진노를 나타내는 복수자입니다.”—로 13:3, 4; 베첫
2:13, 14. 창 9:6 비교.
복수하려는 불완전한 인간의 경향 자신에게 불공정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혹은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복수하려는 것은 타락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경향이다. 다른 사람의 아내와 간음을 범하는 사람은 그 남편으로부터 보응의 복수를 당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잠언에서 이렇게 알려 주는 바와 같다. “남자가 격노로 질투하니, 그는 복수의 날에 동정심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떠한 대속물도 고려하지 않겠고, 네가 아무리 큰 선물을 한다 할지라도 응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잠
6:32-35) 그렇지만 사람이 스스로 복수하는 경우, 그것은 대개 제어되지 않은 분노 가운데 행해지며 어떤 좋은 목적도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분노가 그 복수하는 당사자에게 임하게 한다.—야
1:19, 20.
하느님과 그분의 종들의 적들 하느님을 미워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종들에게 적대감을 나타내고, 그들에게 복수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진실한 공의의 발로가 아니라, 올바르고 의로운 것에 대한 적대감의 결과로 생긴 욕망이나 행동으로서, 그 의로운 자들—그 말과 행로를 통해 사람들의 악함을 정죄하는 자들—을 제거하려는 시도이다. (시 8:2; 44:15, 16) 일부 경우에 하느님의 종들은 공의를 시행하고 있다고 왜곡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요 16:2) 하지만 그들은 “징벌을 시행하는 공의”라고 주장되거나 그렇다고 여겨진 이런 복수를 집행한 결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들에 대한 복수를 쌓아 둔 셈이 되었다. 때때로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자신과 맺은 계약을 깨뜨렸을 때 바빌론과 같은 나라들을 사용하여 그들에게 복수하신 것은 사실이다. (레 26:25) 그러나 그러한 나라들은 미움과 악의를 품고 행동하여 자기들의 복수심을 나타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호와께서 그 나라들에게 복수하셨다.—애 3:60; 겔 25:12-17.
2. 2007년 가을 토의 자료 중 일부
주제 :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주제 성구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이 보는 데서 훌륭한 것을 마련해 주십시오.”—로마
12:17.
흔히 아이들은 함께 놀던 친구가 떼밀면 자기도 똑같이 떼밉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이들만 그와 같이 되갚아 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어른들도 그런 식으로 행동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한 사람에게 앙갚음하고 싶어 합니다. 물론, 어른이 되어서도 상대방을 실제로 떼미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 방법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한 사람에 대한 험담을 퍼뜨리거나 그 사람이 잘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려고 할지 모릅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의도는 같은데, 똑같이 되갚아 주려는 것, 다시 말해 보복하려는 것입니다.
앙갚음하려는 충동이 뿌리 깊은 것이기는 하지만, 참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충동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라는 사도 바울의 권고를 따르고자 노력합니다. (로마
12:17) 무엇이 동기가 되어 우리는 그러한 높은 표준에 따라 살게 됩니까? 누구에게 악으로 갚지 말아야 합니까? 앙갚음하려고 하지 않을 때 어떤 유익한 결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바울이 한 말의 문맥과 로마 12장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장에서는 보복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올바른 행로이자 사랑의 행로이며 겸허한 행로임을 설명합니다. 이 세 가지 부면을 하나씩 고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바울은 12장부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네 가지 관련된 문제를 논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여호와와의 관계에서, 동료 신자들과의 관계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정부 권위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바울은 보복하려는 충동을 포함하여 그릇된 성향을 물리쳐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음을 지적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나는 하느님의 동정심으로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로마 12:1) 이 구절에 나오는 “그러므로”라는 말에 유의하십시오. 바울은 사실상 ‘앞서 설명한 것을 근거로, 내가 이제부터 하는 말대로 행할 것을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앞서 어떤 점을 설명하였습니까?
바울은 그의 편지 처음 열한 개 장에서 육적 이스라엘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열려 있는 놀라운 기회에 대해, 다시 말해 하느님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자가 될 희망에 대해 논하였습니다. (로마
11:13-36) 그러한 귀중한 특권은 오로지 “하느님의 동정심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이러한 크신 과분한 친절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합니까? 그들은 마음속 깊이 느끼는 감사함으로 가득 차, 바울이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살아 있고 거룩하고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실 만한 희생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이지력으로 드리는 신성한 봉사입니다.” (로마 12:1) 그러면 그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어떻게 자신을 하느님께 “희생”으로 바칠 수 있었습니까?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더는 이 사물의 제도를 따라 틀 잡히지 말고, 도리어 여러분의 정신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느님의 선하고 받아들이실 만하고 완전한 뜻이 무엇인지 확인하십시오.” (로마 12:2) 그들은 세상의 영이 자신들의 생각을 틀 잡게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고방식으로 정신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첫째
2:16; 빌립보 2:5) 이러한 원칙은 오늘날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참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매일의 행실에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로마 12:1, 2에 나오는 바울의 설명은 어떻게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까?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는 과거뿐 아니라 현재도 하느님이 매일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계속 동정심을 나타내시는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가득 찬 마음이 있다면 우리의 힘과 자원과 능력을 다해 하느님을 섬기게 됩니다. 또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러한 욕망이 있다면 우리는 세상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고방식을 따르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갖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 다시 말해 동료 신자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 모두를 대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줍니다. (갈라디아
5:25) 예를 들어,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생각한다면 보복하려는 충동을 물리치게 될 것입니다.—베드로 첫째
2:21-23.
“여러분의 사랑에 위선이 없게 하십시오”
우리가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올바른 행로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행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이 사랑이 어떻게 동기가 되는지에 대해 논하는 내용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로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랑”(그리스어 아가페)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하는데, 하느님의 사랑을 언급할 때도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언급할 때도 있습니다. (로마 5:5, 8;
8:35, 39) 하지만 바울은 12장에서 다른 방법으로,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사랑에 관해 말하면서 아가페를 사용합니다. 바울은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선물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언급한 후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배양해야 하는 특성 한 가지를 언급합니다. 그는 “여러분의 사랑에 위선이 없게 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로마 12:4-9) 타인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참그리스도인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기본적인 표입니다. (마가
12:28-31)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진실한 사랑을 나타낼 것을 권고합니다.
더욱이, 바울은 위선이 없는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을 언급하면서 “악한 것을 몹시 싫어하고 선한 것에 고착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로마 12:9) “몹시 싫어하다”나 “고착하다”는 강한 표현입니다. “몹시 싫어하다”라는 말은 “극도로 미워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악의 결과만 아니라 악 자체도 몹시 싫어해야 합니다. (시 97:10) “고착하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달라붙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함이라는 특성이 그의 인간성에서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 될 정도로 단단히 달라붙어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을 나타내는 한 가지 방법을 거듭거듭 언급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박해하는 사람들을 계속 축복하십시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이들이여, 스스로 복수하지 마십시오.” “악에게 지지 말고, 계속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로마
12:14, 17-19, 21) 바울의 말을 보면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심지어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까지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박해하는 사람들을 계속 축복하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박해하는 사람들을 계속 축복하십시오”라는 바울의 권고대로 할 수 있습니까? (로마
12:14)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여러분의 적들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5:44; 누가
6:27, 28) 그러므로 우리가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지로 인해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여시어 진리를 깨닫게 해 달라고 그분께 청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둘째 4:4) 물론, 박해하는 사람을 축복해 달라고 하느님께 요청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방식이 그리스도의 사고방식을 닮을수록 우리는 적들에게까지 사랑을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23:34) 그러한 사랑을 나타낼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까?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 사람들 중에 스데반이 있으며, 그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기원 33년 오순절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스데반은 그리스도인 회중의 반대자들에게 체포되었고 예루살렘 도시 밖으로 끌려 나가 돌로 맞았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여호와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사도
7:58–8:1) 그날 스데반이 기도한 반대자들 중에는 사울이 있었는데, 그는 스데반이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좋게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후에, 부활되신 예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박해하던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사도 바울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로마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필자입니다. (사도 26:12-18) 스데반의 기도와 일치하게, 여호와께서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함으로 죄를 지은 바울을 용서하신 것 같습니다. (디모데 첫째
1:12-16)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하는 사람들을 계속 축복하십시오”라고 권고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는 박해하는 사람들 중에도 결국 하느님의 종이 될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음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박해하던 사람들 중에 평화를 사랑하는 여호와의 종들의 행실을 보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바울은 이어서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이 말은 그가 앞서 “악한 것을 몹시 싫어하십시오”라고 한 권고의 논리적인 결론입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보복하는 수단으로 악을 사용한다면 어떻게 그 사람이 악한 것을 참으로 몹시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위선이 없는” 사랑을 가진 것과는 정반대되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보는 데서 훌륭한 것을 마련해 주십시오.” (로마 12:9, 17) 우리는 어떻게 이 말을 적용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얼마 전에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들이 직면한 박해에 대해 썼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극장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 우리는 욕을 들을 때에 축복하며, 박해를 받을 때에 견디며, 명예를 훼손당할 때에 간청합니다.” (고린도 첫째 4:9-13) 그와 비슷하게, 오늘날 참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 사람들의 주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주위의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불공정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전하는 그리스도교 소식에 더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베드로 첫째
2:12.
그러면 우리는 평화를 증진하기 위해 어느 정도로 노력해야 합니까?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다면, 가능한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로마
12:18) “할 수 있다면”이나 “가능한 대로”라는 수식어는 다른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단지 사람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하느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태
10:34-36; 히브리
12:14) 하지만 우리는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의로운 원칙들을 타협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합니다.
“스스로 복수하지 마십시오”
바울은 우리가 보복하지 않아야 하는 또 다른 강력한 이유를 알려 주는데, 그것이 겸허한 행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진노에 맡겨 두십시오.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겠다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
12:19) 복수하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은 주제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하실 일을 자신이 떠맡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마태 7:1) 더욱이, 그는 문제를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려고 함으로써 “내가 갚겠다”는 여호와의 보증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참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께서 ‘택함받은 자들을 위해서 공의가 시행되게 하실’ 것임을 확신합니다. (누가 18:7, 8; 데살로니가 둘째 1:6-8) 그들은 부당한 일을 겪은 것에 대한 복수를 겸허하게 하느님의 손에 맡깁니다.—예레미야 30:23, 24; 로마
1:18.
적에게 복수하는 것은 필시 그의 마음을 완고해지게 하겠지만, 적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이러한 말에 유의하십시오. “너의 적이 굶주리거든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이렇게 함으로 너는 그의 머리 위에 불타는 숯을 쌓을 것이다.” (로마
12:20; 잠언 25:21, 22)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머리 위에 불타는 숯을 쌓는다’는 말은 성서 시대에 광석을 제련하는 방법에서 유래한 비유적 표현입니다. 용광로에 광석을 넣을 때 광석 아래만 아니라 위에도 숯을 쌓아 두었던 것입니다. 위에 쌓여 있는 불타는 숯은 열의 온도를 더욱 높였으며, 그리하여 단단한 광석을 녹여 광석에서 불순물을 분리시켰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우리도 반대자에게 친절한 행동을 함으로 그의 완고함을 “녹여” 그에게서 좋은 특성들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열왕 둘째
6:14-23) 사실, 그리스도인 회중의 많은 성원들은 처음에는 여호와의 종들이 자기들을 위해 한 친절한 행동으로 인해 참숭배에 이끌렸습니다.
우리가 보복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
로마 12장을 간략히 고려하면서 우리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 몇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보복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따라야 할 올바른 행로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신 동정심을 생각해 볼 때, 여호와께 우리 자신을 바치고 또한 적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포함하여 그분의 계명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 올바르고 합리적입니다. 둘째로,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려 하는 것은 우리가 따라야 할 사랑의 행로입니다. 보복하지 않고 평화를 증진함으로, 우리는 사랑에서 우러나와 일부 격렬한 반대자들까지 [하느님을 알도록] 돕기를 원합니다. 셋째로, 악으로 갚지 않으려 하는 것은 우리가 따라야 할 겸허한 행로입니다. 우리 스스로 복수하는 것은 주제넘은 행동인데, [최종 심판자 께서]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또한 이렇게 경고합니다. “주제넘음이 왔는가? 그렇다면 불명예가 올 것이다. 그러나 겸허한 자들에게는 지혜가 있다.” (잠언 11:2) 부당한 일을 겪더라도 복수하는 것을 지혜롭게 하느님의 손에 맡기는 것은 우리가 겸허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한 내용을 요약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계속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로마
12:21)
* 출처: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저작권이 있는 출판물과 사전에서 옮겨온 것임을 밝혀둡니다
★ 산신령 (2013-08-29 19:31:20) (가입:2011-07-02 방문:783) 추천:0 / 반대:0 IP:221.139.***.86
{{{예수 실존 증명은 없군요. 실존이라도 신성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만, 여증은 예수를 좀 다르게 보는거같아서 여쭤 봅니다. ★ 산신령 (2013-08-29 21:18:43) (가입:2011-07-02 방문:783) 추천:3 / 반대:0 IP:221.139.***.82 예전 공자의 황금률 관련 글에 달았던 댓글입니다. 그대로 가져 옵니다. 뺨 이야기가 같이 들어 있습니다.--------------예수 직전 사람인 바리새파이며 산헤드린의 수장이었던 랍반 힐렐(BCE 110 ~ CE 10 경. 모세와 같이 120세를 살았다는 전승을 가짐)도 같은 얘기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이방인이 토라를 배우겠다면서 당시 두 거물인 랍비 샴마이와 랍비 힐렐을 찾아가서, "내가 한 쪽 다리로 서 있는 동안 토라를 설명해 주시요"라고 하니, 랍비 샴마이는 "이런 미친놈이 !" 하고 쫓아 버렸지만, 랍비 힐렐은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마시요. 그게 전부요. 나머지는 나머지는 전부 이를 설명하는 것들이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샴마이는 율법을 아주 엄격하게, 힐렐은 리버럴하게 해석한지라, 같은 바리새파지만 두 파는 나뉘어 율법 해석에 대해 사사건건 부딪혔다고 합니다. 예수는 이런 율법 논쟁이 극심한 시대에 태어났으며, 힐렐 쪽에 가깝게 율법을 해석한 사람입니다. 마태
5:39 "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누가에는 어느쪽 뺨을 치고 어느쪽을 대는지 나와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일반적인 교회의 해석은 '비폭력 무저항'이라고 하는걸로 들었습니다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여기에도 예수의 '율법 해석과 그 준수'를 엿볼수도 있습니다. 오른뺨을 때리는건 상대방이 왼손으로 쳤을 경우입니다.(어떤 목사들은 오른손등으로 쳤을 경우라고 주장하는 것도 봤습니다). 당시 관습상 왼손으로 사람을 때리는 것은 그냥 일반적인 폭행이 아니라, 아주 경멸적인 행동이며, 율법을 깨트리는 행동이라고 합니다.(어떤 목사들의 주장인 손등으로 치는 행위도 같은 의미).
그러니 왼손으로 뺨을 때린 사람은 율법을 깨트리는 큰 죄를 진 것입니다. 이 경우 이 사람을 다시 율법안에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왼 뺨을 내밀어서 오른손으로 때리게 하여 정화 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런 율법을 깨트린 죄를 지은 사람을 되돌아 오게 하기 위해 왼 뺨을 내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깨트린 사람을 다시 율법안에 돌아오게 하기 위한 방법 vs 비폭력 무저항.
어느쪽이 더 맞는 해석일까요? 전자의 해석은 조철수의 '예수평전'에 나오는 당시 랍비들의 어록인 '선조들의 어록', 미쉬나, 미드라쉬, 탈무드등 방대한 자료를 첨부하여 해석한 내용입니다.}}}
==> 진지한 의견 감사합니다.
때리는 목적은 화를 돋구려한 행동이 맞구요^^ 성서에 기록된 율법에 흐르는 기본원칙은 이미 무고한 사람을 때리는 것 자체가 율법을 범하는 거죠 그렇다고 예수의 말씀은 죄지은 상대를 구하는 의식상 수법으로 문자그대로 왼뺨을 내밀라는게 아닙니다. 율법에 대한 그분의 사고방식은 그 율법을 마련하신 그분의 아버지의 목적과 항 상 부합된 것이었습니다. 의식상의 율법을 자신의 생명의 희생으로 폐("폐"하다는 말에 성경귀절의 어설픈 비교상으로 일부 독자들의 오해가 있을수 있으나 율법의 주어진 목적이 "마감"되고 "완성"되었다는 의미로)하신 분이었고 성서 율법을 존중하신 그분은 본래의 율법에 흐르는 원칙과 그 진정성에 초점을 마추신 분입니다. 율법을 매우 짐스럽게 만들어 버린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소위 그들에 의해 부가되고 변질된 "율법의 전통과 의식"을 타파하신 분입니다. 그점에 비추어 볼때 저는 조철수의 ('예수평전'에 나오는 당시 랍비들의 어록인 '선조들의 어록', 미쉬나, 미드라쉬, 탈무드등 방대한 자료를 첨부하여 해석한 내용이라 하신) 해석(율법을 깨트린 사람을 다시 율법안에 돌아오게 하기 위한 방법)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 하와의첫날밤 (2013-08-29 23:56:15) (가입:2012-01-16 방문:1263) 추천:1 / 반대:0 IP:1.228.***.181
예수님이 미리 예언하신바 있는 배교한 거짓 그리스도교(형태만 그리스도교일뿐 예수께서 예고하신 거대 종교로 발전할 종교조직과 그 지도자들)의 조직의 역사와 관련된 부분일 수 있습니다.
{{{결국 카더라? ㅋㅋ 역시 무능한 것들이란.. 카더라로 대충 땜빵}}}
==> ㅋ다소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가려 했을 뿐입니다^^
예수께서 전혀 의도하시지 않은 오늘날의 상업화되고 세속화되고 정치적이 되기까지한 위선적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모든 거짓 종교들의 행태에 대한 예수의 예언과 그에대한 하느님의 심판집행의 예고는 명백하고 준엄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성경적 대답이 진정 궁금하신가요? 혹시 진실로 알고 싶으셔서 물으시는 것이라면 그 분야에대한 상세 답변의 기회가 있길 희망합니다 - 맛보기 성구 마태
7:21 계시 17:5; 18:4, 8
★ 布稈先生 (2013-08-30 12:37:54) (가입:2012-07-23 방문:358) 추천:0 / 반대:0 IP:115.161.***.38
{{{"ㅋ 형주에 달려 죽기까지 체포와 고문의 과정이 있을 것을 알고도 그것을 감수하신 그분의 의연한 태도 말과 행적을 입체적으로 고려해 볼때..."
ㅋㅋㅋ 왜 필요한 부분만 입체적 고려?? 신이라면서요?
자신의 희생으로 인류를 대신 구원함을 이루러 오셨다면서 그것도 모두 알고있었다는 신 그 자체인분이 왜 여기서는 인간적인 부분을 끌고 나옵니까?
평상시는 신성강조 불리할때는 인간성강조. 다중잣대를 들이대는게 전공인가요?}}}
★ 布稈先生 (2013-08-30 13:30:20) (가입:2012-07-23 방문:358) 추천:1 / 반대:0 IP:175.223.***.78
{{{일개 인간인 순교자들이 순교할때 웃으면서 희생하고 찬양을 그치지 않을정도로 확신에 찼다는데 삼위일체의 신 그자체인 교주는 왜 그래요?
아버지 날 버리시나이까... 3일후 부활과 아버지의 약속을 못믿었나보죠?}}}
==> 布稈先生님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공부를 할수 있는 질문입니다
널리 알려진 그러나 알고보면 오도된 기독교 교리때문에 생기는 의문이 내포되 있는 질문이군요. 그 분야와 관련하여 저도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습니다 관련된 자료도 많구요
별개의 성서연구 주제로 얘기 할만큼 매우 중요한 성서질문과 답을 고려 해 볼 수있는 분야입니다. 시간나는대로 별도로 다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사람의 댓글에 응답하다 보니 충실한 자료 보강 없이 쓴 부분들이 많아서 성의없어 보일지 모르나 우선 상기 댓글 답변 참고하는 정도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추후 다시 방문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