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출생주의 이론 내부에 프로모르탈리즘(친죽음주의:promortalism)적인 암시가 있다고 오해하거나, 그런 의심을 함. 심지어는 반출생주의 지지자라고 해도 정확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선 그런 결론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듯함. 그래서 올려봄. (철학 서술 특유의 이중 부정문이 골때려서 좀더 평이한 문장으로 첨삭했음. 다른 곳에 공유 금지. 문제가 될 경우엔 삭제)
better never to have been 7
결론: 소주제
죽음과 자사
많은 사람들은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이라는 견해가 계속 살기 보다는 죽기가 선호할 많다는 함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몇몇 사람들은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이란 견해는 죽음의 바람직한 뿐만 아니라 자사의 바람직함까지도 암시한다고까지 말한다.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이라는 견해와 일단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존재를 중단하는 것이 계속 존재하는 것보다는 더 낫다는 견해 사이에는 모순점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소포클레스가 인용한 다음 문구에서 표현된 견해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태어날 수밖에 없다면, 그 다음으로 좋은 것은 우리가 왔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는 것이다.
젊음이 그 모든 어리석음과 함께 세상을 떠날 때
누가 악 아래에서 비틀거리지 않는가?
누가 그 악에서 탈출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사람은 그들의 죽음이 아니라 출생에 애통해 해야 한다"는 몽테스키외의 견해에도 암묵적으로 깔려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항상 해악이라는 견해는 죽음이 계속 존재하는 것보다 낫다는 점을 암시하지는 않으며, 한층 더 강력한 이유로 자사가 (항상)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주석12: 자신의 존재를 유감스러워 하면서도 여전히 삶에 매달리는 일상의 외관상 기이함을 논평하면서 우디 앨런은 캐츠킬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두 유대인 이야기를 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 "여기 음식 맛이 너무 형편없군." 다른 사람이 답한다. "응. 거기에다 양도 너무 적어." 한 수준에서는 음식의 질이 싫어하면서도 다른 수준에서는 그 양이 적다는 것을 불평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다. 충분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 -배고프게 되는 것-은 설사 그 대안이 질이 낮은 음식으로 배를 채워야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쁘다. 우디 앨런의 이미지가 기이하고 웃긴 이유는 우리가 그 두 사람이 추가로 음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식사는 노력에 가깝거나 이미 차려진 음식이 충분히 많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아우슈비츠에 갇힌 두 유대인 사이에 오고 간 동일한 대화라면 전혀 웃기지 않을 것이다. 그 경우에는 음식의질과 양을 모두 불평하는 것이 전혀 기이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삶은 이미 충분히 나빠 존재하게 되지 않는 것이 더 낫지만, 존재를 중단하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나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2장에서 논의한 내용을 생각한다면, 현재 삶 경우와 미래 삶 경우 사이에 상이한 평가를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는 그 장에서 지속할 가치가 있는 삶의 질 문턱보다 시작할 가치가 있는 삶의 질 문턱을 더 높게 설정해야 한다는 좋은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존재하는 이는 존재를 계속하는 것에 이익을 가질 수 있으며, 그래서 삶을 지속할 가치가 없도록 만드는 해악은 이 이익을 무효화 시킬 만큼 혹독하게 가혹해야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존재를 갖는다는 것은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훨씬 덜한 해악을 - 또는 어떤 조그만 해악이라도 - 피하는 것이 훨씬 더 결정적인 장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존재 계속에 보통 이익을 갖고 있기 때문에, 태어나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이라 할지라도 죽음도 역시 해악이라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죽음이 해악인 이유는 태어나게 되는 것이 해악인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존재하게 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존재를 중단하게 되는 해악에 이르기 때문에 나쁘다. 그것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불멸의 관점에서 매우 나쁜 전조다."라는 조지 산타야나의 주장 뒤에 놓여 있는 발상일 것이다. 이 견해에서는 우리가 죽을 운명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거대한 해악이다.
삶의 질이 지속할 가치가 있는 수준의 최저 문턱 아래로 떨어지기 전까지는, 삶을 지속하는 것이 이익이라는 견해는 상식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오래된, 그리고 계속해서 제기되는 반대를 받아오고 있다. 에피쿠로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논증을 했다. 죽음은 죽는 이에게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한 그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며, 일단 죽음에 이르게 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죽어가는 것과는 대비되는 의미에서) 내가 죽어 있음은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위치할 수 있는 어떤 조건도 아니다. 대신 그것은 내가 위치할 수가 없는 어떤 조건이다. 따라서 나의 죽음은 나에게 나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제자이자 에피쿠로스주의자인 루크레티우스는 죽음이 해악이라는 견해를 반대하는 더 강한 주장을 햇다. 그는 우리가 존재하게 되기 전의 비존재 기간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삶의 뒤에 따라오는 비존재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피쿠로스적 논증은 죽음이 존재의 돌이킬 수 없는 중단이라고 가정한다. 죽음 이후에 삶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 가정을 거부한다. 죽음이 이 대안적 견해에 나쁜지 아닌지는 죽음 이후의 삶이 얼마나 좋은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죽음 이후의 삶이란 것은 매우 사변적인 주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여 어떤 종류의 유의미한 테스트가 가능한 수단도 가지고 있 지 않으므로, 그에 대해서는 더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단지 내가 하고 있는 주장이, 죽음이 지속되는 삶보다 선호할 만하다는 결론을 동반하고 있는 지를 살펴보는데 있어 우선 나는 죽음이 존재의 돌이킬 수 없는 중단이라는 에피쿠로스의 논증을 참이라고 받아들이겠다.
죽음이 죽는 사람에게 나쁘지 않다는 견해는 깊이 견지되는 몇 가지 견해와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 가운데는 살인이 피해자에게 해를 입힌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그것은 모든 사정이 동일하다면, 더 긴 삶이 더 짧은 삶보다 낫다는 견해와도 양립 불가능하다. 우리가 죽은 사람의 소망을 (그렇게 존중하는 것이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과는 별개로 보더라도) 존중해야 한다는 견해와도 충돌한다. 이는 만약 죽음이 해가 아니라면, 죽음 이후에 벌어진 어떤 일도 해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논했듯이 반직관성은 그 자체로는 어떤 견해가 틀렸다는 점을 보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적 논증의 반직관성과 나의 반출생주의 논증의 반직관성 사이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첫째, 에피쿠로스적 결론은 내 결론보다 훨씬 더 근본적으로 반직관적이다. 존재하게 됨을 해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살인이 피해를 입힌다고 생각하는 것을 더 자연스럽게 느끼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실제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이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코 적지 않다. 그것이 해악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득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훨씬 더 많다. 반면 살인이 피해자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고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일 뿐이다. 설사 피해자의 삶이 나쁜 수준의 삶이었다고 해도, - 동의가 얻어질 수 있다고 가정에서- 아무런 동의도 구하지 않고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에게 그릇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널리 생각한다.
둘째, ‘조심성의 원리(precaytionary pronciple)’는 이 두 견해에 비대칭적으로 적용된다. 만약 에피쿠로스가 틀렸다면, (어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죽임으로) 에피쿠로스의 논증을 따르는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해악을 가하게 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내 견해가 틀렸다고 해도 내 견해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은,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는다. 그저 그들은 재생산을 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적 견해와 반출생주의 견해의 반직관성의 차이는 에피쿠로스적 논증을 곧바로 기각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비록 간략하게나마 두 가지 에피쿠로스적 논증에 대한 대응을 살펴보겠다.
루크레티우스 논증부터 살펴보겠다. 이 논증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생 전의 비존재와 죽음 후의 비존재 사이에 대칭성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외 없이 일단 존재한다면 더 오래 살아갈 수 있음에 반해, 우리 중 예외 없이 더 일찍 태어나 존재하게 될 수는 없다. 이 논증은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종류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면 매우 명백해진다.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종류의 존재는 어떤 `형이상학적 본질이 아니라 훨씬 더 두껍고 풍부한 관념의 차이이다. 이 차이는 그 사람의 구체적인 추억, 신념, 헌신, 욕구, 열망 등을 구현한다. 이 더 두꺼운 의미의 정체성은 그 사람의 구체적인 역사에서 구성된다. 그러나 설사 어떤 사람의 형이상학적 본질이 더 일찍 존재하게 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존재의 역사는 너무나 달라서 지금의 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일 것이다. 이에 반해 삶의 다른 끝에서는 완전히 사정이 달라진다. 개인적 역사 -傳記-는 더 일찍 죽지 않음으로 더 길어진다. 일단 존재하게 되면 더 오래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더 일찍 존재하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 -거의 아무런 공통점도 갖지 않은 사람- 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 논증을 논박하는 가장 흔한 대응은 죽음은 죽는 사람에게 미래의 삶과 그 미래 삶의 긍정적인 특성을 박탈하기 때문에 나쁘다는 것이다. 죽음의 나쁨에 관한 그 박탈 해명은 죽음이 죽는 사람에게 항상 나쁘다는 결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박탈되는 추가적인 삶이 충분히 나쁜 수준일 경우에는 죽음은 그 사람에게 나쁘지 않다. 대신 그것은 좋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적 주장은 죽음이 죽는 사람에게 결코 나쁘지 안다고 주장한다. 박탈 이론은 이 주장에 대한 대응이며, 죽음이 죽는 사람에게 때때로 나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박탈 이론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죽음 이후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의 죽음이 죽기 전의 그 사람에 그가 향유할 수 있었던 추가적인 삶을 박탈하는 것은 여전히 참이다.
에피쿠로스의 지지자들은 박탈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하나의 반론은 박탈 이론의 지지자들은 죽음의 해악이 언제 발생하는지를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즉 해악의 시점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해악의 시점은 죽음이 발생할 때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시점에는 이미 비에피쿠로스주의자가 해를 입는다고 말하는 그 사람은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해를 입는 사람이 죽기 전의 사람이라면, 그가 해를 입은 시점이 그가 죽은 시점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꾸로 된 인과관계를 포함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 그보다 앞선 해악을 야기하였다고 말하는 식이 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 도전에 대한 하나의 대응은 죽음이 해악을 가하는 시점은 `항상' 그리고 `영원히'라고 말하는 것이다. 조지 피처는 유용한 유비를 제시한다. 그는 만일 "세상이 다음 대통령이 임기 중에 산산조각이 난다면... 이것은 그 사실 때문에 지금에도 현재 대통령의 임기 중에..., 그가 끝에서 두 번째 미국 대통령이라는 것을 참으로 만들 것이다"고 말하였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나중의 죽음은 지금에서도 그가 살게 된 수명보다는 더 살지 못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는 것을 참으로 만든다. 끝에서 두 번째 대통령의 사안에서 아무런 거꾸로 된 인과관계가 없듯이 주체에 해를 입히는 죽음에도 시종일관 아무런 거꾸로 된 인과관계란 없다.
박탈 이론에 대하여 더 근본적이지만, 더 강력한 점인지는 분명하지 않은 반론이 있다. 에피쿠로스의 지지자들은 존재하기를 중단한 사람들에게 있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박탈당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점을 간단히 부인한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수츠는 죽음 이전의 사람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처했을 바보다는 더 나쁜 있으나, 이 순수 관계적인 방식으로 더 나빠지게 되는 것은 그가 해를 입었다는 점을 입증해 보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그는 더 나아가 박탈을 당한 누군가가 남아 있지 않다면 진정한 박탈은 있을 수 없다고 논한다. 존재해야만 박탈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교착 상태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박탈 해명의 옹호자들은 죽음은 다르며 존재하기 없이도 누군가는 박탈당할 수 있는 종류의 한 사안이라고 본다. 이와는 반대로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죽음은 다를 수 없으며 우리는 박탈을 다른 모든 사안들에서 그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루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어떤 사안에서도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서는 박탈당할 수 없으니, 죽음이 그의 존재를 끝낸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사람은 죽음에 의해 박탈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교착 상태를 뚫고 나갈 방법이 잇을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 그걸 다루지는 않겠다. 나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이라는 견해가 존재 지속보다 존재 중단이 더 낫다는 견해를 암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존재하게 되는 것과 존재를 중단하는 것 모두 (내게는) 해악이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존재를 중단하는 것이 해악이 된다는 주장을 부인한다. 또한 그들은 그 사람의 삶이 얼마나 나쁜 수준에 이르렀는가와는 별개로 죽음이 죽는 사람에게 결코 좋음이 될 수도 없다는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피쿠로스적 추론을 따르면 그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없고, 죽음이 그이에게 도달하면 그이는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결코 이득이 될 수 없다. 죽음은 어느 누구에게나 어떤 것도 박탈하지 못하지만 또한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도 어떤 것을 줄 수도 없다.
에피쿠로스적 견해를 거부하는 이들은 다음 몇 가지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
ㄱ. 죽음은 항상 해악이다
ㄴ. 죽음은 항상 이득이다
ㄷ. 죽음은 때로는 해악이고 때로는 이득이다.
첫 번째 선택지는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삶이 너무나 나빠서 죽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있다.(*뀨: 비대칭성 논증에서 고통의 부재는 향유하는 주체가 없더라도 선이다)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항상 해악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이들은 명백히 ㄴ.를 거부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존재하게 되는 것은 나쁘지 않으며 심지어 좋을 수도 있으며, 존재를 계속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질이 충분히 높은 수준인 한 언제나 좋다. 나는 앞서 존재하게 되는 것을 항상 해악이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역시 ㄴ.을 거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는 존재를 부여받는 것에 아무런 이익도 갖고 있지 않은 반면, 일단 존재하게 되면 존재를 계속하는 데 이익을 가진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이 이익이 삶의 나쁜 질에 의해 항상 무효화 되는 것은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죽음은 항상 이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주 심각한 해악이라고 말한 것을 고려할 때 이것은 합당한 가정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합당하다고 해서 매우 강한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삶의 질은 존재를 중단하는 것이 곧 이득이 될 정도로,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할 뿐이다.
이것은 내가 답해야 할 질문이 아니다. 자율성의 원리에 따라 우리는 개인의 삶의 질에 관한 결정을 내릴 권위를 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귀속시킨다. 출산에 관한 자율적인 결정과는 달리 삶을 지속할지 죽을지에 관한 자율적인 결정은 문제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 의해 내려진다. 내가 3장에서 논했듯이 사람들의 삶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못하다는 것이 참이라면, 그들의 삶이 지속할 가치가 있는지에 관한 그들의 평가는 잘못되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런 종류의 잘못된 판단은 사람들이 범하더라도 널리 허용할 수 있는 종류의 판단이다. 그 잘못된 판단은 그들이 오롯이 감수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이, 자신의 후손이 생각하는 것보다 후손의 삶이 더 나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실수와는 다르다. 마찬가지로 계속 살고자 하는 욕구는 비합리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설사 비합리적이라 해도 이런 종류의 비합리성은 존재하게 되는 것을 선호하는 것과는 달리, - 이론상으로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실질적으로는 - 결정적이어야 한다.
삶을 끝내고자 하는 결정은, 자율적인 존재 스스로 내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을 내릴 능력이 없는(그리고 미리 지시를 남기지도 또는 대리인을 선임할 능력도 귀속되지 않은) 존재를 대신하여 내리는 경우와는 사태가 다른 것이다. 이런 경우가 가장 어려운 사안이다. 삶을 창조할지 말지의 사안에 대한 결정은 새로운 삶을 창조하지 않는 안전한 편으로 가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다. 이와 달리 삶을 끝내는 문제에서는 고를 수 있는 안전한 편의 선택지가 전혀 없다.
그래서 나는 앞에서 열거한 세 번째 선택지의 한 판본을 지지한다. 즉 죽음은 때로는 해악이고 때로는 이익이라는 선택지 말이다. 이 세 번째 선택지는 상식적인 견해지만, 나의 판본은 보통의 해석과는 다르다. 즉 나의 판본은 보통 견해보다는 죽음이 이득이 되는 경우를 더 자주 고려한다. 예를 들어 나의 견해에서는 보통 견해보다 합리적인 자사에 대해 더 넓은 범위의 고려 사안을 넣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보통 견해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자사가 합리적이게 될 경우가 많다는 주장을 허용한다. 대부분의 서구 문화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문화에서는 자사를 반대하는 어마어마한 편견이 있다. 자사는 정신 질환의 결과로 곧바로 배척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흔히 겁쟁이 같은 짓으로 여긴다. 나의 견해는 자사가 합리적으로 되는 경우가 더 흔할 수 있으며, 계속 존재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이는 그들의 삶이 실제로 너무 나빠져서 존재를 중단하는 것이 더 나은 데도 삶에 대한 비합리적인 애착 때문에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볼테르가 캉디드에서 노파를 통해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수백번 자사하기를 바랐다오. 그러나 삶에 대한 애착이 집요하게 계속되었다오. 이 바보 같은 약점이 아마도 우리의 결함 중 가장 치명적인 것 중 하나일 것이도. 왜냐하면 우리가 내려놓기를 늘 갈망하는 짐을 계속 지고 가는 것보다 더 멍청한 짓이 또 어디 있단 말이오? 존재를 역겨워하면서도 거기에 매달리는 것보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심장을 먹어치울 때까지 우리를 집어삼키는 뱀을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그렇다고 자사를 일반적 선택으로 권고하는 것은 아니다. 자사는 다른 원인에 의한 죽음과 마찬가지로 사별당한 사람들의 삶을 나쁜 것으로 만든다. 서둘러 자사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가까운 사람들의 삶에 심대한 부정적인 추가 고통을 줄 수 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그이의 사후에 벌어지는 일은 신경쓰지 않아야 한다는 견해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고인이 해악을 겪지 않는다고 해도 사별당한 사람들이 해악을 겪는다는 것은 참이다. 자사가 그로 인해 사별당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힌다는 것은 존재가 경험하는 비극 중의 일부이다. 우리는 일종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미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의 존재를 끝내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배려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다. 잠재적인 출산자들은 후손들을 낳을 때 그들이 놓는 이 덫을 고려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들이 존재하게 된 것에 기뻐하지 않는다면 얼마든 자사를 해도 된다고 가정을 미리 해놓고, 새로운 사람에 대한 창조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거짓이다. 일단 누군가가 존재하게 되고 그 사람과의 애착이 형성되면, 처음부터 자식이 없었던 것과의 고통에 비교한다면, 자사는 후자의 고통은 상대적으로 약하게 만들 정도로 아주 큰 고통을 야기한다. 이것은 자사의 길에 중대한 장애물을 놓는다.
어떤 이의 삶은 아주 나쁠 수 있지만, 그 삶을 끝내는 것은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고려해야 한다. 삶이 너무나 나빠져서 계속 살아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는 이익이, 그 사람의 존재를 중단하는 이익을 넘어서기에는 비합당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어느 때가 그런 경우인가는 지속된 삶이 부가하는 짐이 그 사람의 구체적인 특성과 관계되는 부분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 상이한 사람들은 상이한 무게의 짐을 견뎌낸다. 그 사람에게 계속 살라고 가족들이 기대하는 것이 부당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람의 삶 자체는 나쁠 수 있지만, 자사를 결행하여 그이의 가족이나 친구들의 삶을 이미 충분히 나쁜 것보다 한층 더 나쁘게는 만들지는 못할 만큼, 나쁜 정도가 아닐 경우도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