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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들 - 인간실격(2)
게시물ID : panic_10136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꼬지모
추천 : 1
조회수 : 65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5/04 18:5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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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이야기들 – 인간실격 (2)


by 꼬지모


역사상 어느 시대나 어떤 지역에서도 그림자 같은 인간들이 있는 법이다. 분명 존재하지만 인식되지 않는, 아니 일부러 인식하려 하지 않는 그런 대상들. 냄새나고 더럽고 꺼림칙하고 혐오스러운 그들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아예 없는 걸로 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대개 은연중에 인간이라는 자격이 박탈되고 만다.


우리 동네를 예로 들자면, 주민들은 그들을 ‘봉투’라고 불렀다. 어째서 봉투인 건지 나 나름대로 고민해보았는데 생각보다 꽤 여러 가지 함의가 있는 듯하다. 언제나 쓰레기봉투 안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아다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편의점에서 주는 봉투처럼 별 가치가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면 펄럭이며 날아갈 만큼 소속도 없고 거주지도 뚜렷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에까지 이르자 나 또한 그래도 ‘거지’라고 부르는 것보단 봉투라는 이름이 더 적합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봉투들을 좋아한다거나 그들의 편에 설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상대적으로 내가 그런 위치에 놓였을 뿐이다. 세상만사는 상대적이다. 나보다 다른 인간들이 더 착하면, 내가 나쁜 놈이 되는 것처럼. 그러니까 아무도 봉투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졸지에 내가 그들에게 무척이나 관심이 있는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봉투의 편을 들지 않으니, 마치 내가 봉투의 편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원래 모든 일이 그러하듯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없고, 나라는 개인은 집단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다.


봉투들이 길고양이, 일명 길냥이라고 하는 짐승들의 밥을 빼앗아 먹는단 사실이 공론화되자 주민들은 다른 어떤 때보다 분개한 듯 보였다. 주민들 사이에서 길냥이는 암묵적으로 대접해줘야 하는 야생동물이었다. 인간을 생쥐보듯 하는 길냥이들의 무례함과 야생성은 오히려 그들의 품격을 높여주었다. 그런 그들의 서열이 봉투들보다 높은 것은 물론이다.


그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길냥이는 (나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른 이들의 말에 따르면) 귀엽지 않은가.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서 친구들과 공유하거나 sns에 올리고 심지어 자기 프로필 사진으로 할 정도로. 그와 비교하면 봉투는 혐오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감히 그런 봉투가 길냥이의 밥그릇을 노리다니 얼마나 괴씸한가 이 말이다. 만약 당신이 봉투와 길냥이를 단순히 인간 대 동물로 이해한다면 큰 오해를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입가에 참치 통조림 기름을 줄줄 흘리던 남자 봉투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지금, 그는 동네 사람들의 몽둥이에 맞아서 입가에 기름 대신 시뻘건 피를 흘리고 있는 중이다. 동네에선 봉투 박멸 운동이 한창이다. 남자 봉투가 쓰러져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고, 그 광경을 얼룩 고양이가 새초롬히 내려다보고 있다. 저번에 참치캔을 빼앗겼던 그 고양이다.


이윽고 이 동네의 다른 고양이들도 하나둘씩 모여든다. 그들에게도 대단한 구경거리인 듯 보인다. 그들은 서로 야옹야옹 낮은 음성으로 무슨 말을 주고 받는데, 아마 이런 말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같은 인간들은 저렇게 괴롭히기도 하는구나. 그에 대해 응답이라도 하듯 주민들은 몽둥이를 더 세차게 휘두른다. 그들은 고양이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것 같다. 괜찮아요, 길냥이님들. 이것들은 인간이 아니거든요.


학교에 가니 몇몇 아이들이 동네에 말라버린 길냥이들 사진을 돌려보며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그들의 부류에 섞일 수 없는 난 먼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반면 또 다른 부류의 아이들은 죽은 전 대통령의 사진을 가지고 낄낄거렸다. 난 역시 그들과도 다른 부류였다. 결국 오늘도 학교에서 난 혼자였다. 어쩌면 그 두 부류의 공존이야말로 인간이란 존재의 오묘함일지도 모른다. 오묘함을 이해하려면 난 아직 한참 먼 듯 했다.


주민들의 봉투 박멸 운동에도 봉투는 동네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깊숙한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비닐봉투가 그러하듯 그들도 재활용이 불가능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그들의 (특기이자 본질인) 은폐엄폐는 주민들로 하여금 그들이 완전 박멸되었을 거라고 믿게 하기 충분했다. 나처럼 봉투 편에 서게 된 유별난 인간만이 그들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봉투가 인간들에게서 멀어지자 또다른 위험이 그들에게 닥쳐왔다. 영리한 길냥이들은 알아차린 것이다. 봉투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인간보다 못 하다는 것을.


봉투가 길냥이들의 음식을 빼앗았던 전의 상황은 정확히 반대로 뒤집혀 졌다. 길냥이들이 봉투들을 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캬아아앙, 캬아아앙,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신호로 그들은 전투 개시를 한다. 본래부터 가볍고 유연성 있는데다 주민들에게 영양가 있는 밥을 얻어먹는 그들을, 빈약하고 무기력한 봉투들이 당해낼 수 있을 리 없다. 봉투들의 연약한 살가죽엔 빨간 빗금 모양의 상처가 아로새겨진다. 봉투들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쳐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길냥이들은 기죽거나 도망가지 않는다. 잠시 담벼락 위에 올라서서 상대를 보다가 공격을 이어나간다. 그들은 보통 봉투 하나를 상대할 때 네 다섯이 협동을 한다. 개인 생활을 하는 봉투의 습성을 노린 것이다.


난 몸을 숨긴 채 그들을 관찰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관찰하기 위해 봉투와 길냥이가 나타날만한 지점에서 하염없이 대기를 한다. 아무리 오랫동안 기다린다 해도 원하는 장면을 포착할 수 있다면 괜찮다.


길냥이에게 폭행을 당하는 봉투를 보는 건 이상야릇한 체험이었다. 혐오스러웠고 역겨웠지만 동시에 점점 그 혐오스러움과 역겨움을 욕망하도록 만들었다. 길냥이들은 봉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음식 따위를 빼앗기 위해 습격하는 게 아니었다고 난 확신한다.


이를테면 그건, 순수한 의미에서의 유희였다.


그리고 그 유희의 과정에서 난 관전자였다. 언제나처럼, 누구의 편에도 들지 않았다. 그저 꾸준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돌이켜보면, 난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내가 어떤 편이 되기에 마땅한 시점을 말이다. 마치 100도씨에 달해 물이 끓기 기다리며 온도계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했다.


내가 누구의 편이 되는 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란 인간이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 없다. 둘 사이에 이루어지는 불균형의 양상에 따라 내 위치에 결정되는 거니까.


길냥이가 봉투를 할퀴고 물어뜯으며 희롱하는 모습들을 얼마나 보았을까. 어느 시점부터 난 확신이 들었다. 더 이상 관전자가 아닌 나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길냥이를 죽였다. 온도계는 10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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