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들 – 인간실격 (完)
by 꼬지모
나는 봉투들이 어떻게 여태껏 그런 탁월한 완력을 숨겨올 수 있었는지 감탄했다. 정말이지 그들은 다시 태어난 것 같이 보일 정도였다. 그들의 몸 안에서 잠들어 있던 본능이 적절한 계기를 맞아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곤 몸 구석구석으로 빠르게 퍼져나간 듯 했다. 그리고 그 적절한 계기란 게 바로 나의 작품인 것 같아, 난 괜시리 뿌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봉투들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그건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반격이기도 했다.
그들은 대개 어두운 밤 혼자서 귀가하는 주민들을 노렸다. 그들은 주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몽둥이 따위를 쓰지 않았다. 대신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걷어차며, 손으로 꼬집고, 이빨로 물어뜯고, 손톱으로 할퀴었다. 말 그대로, 육탄전인 셈이었다. 자신의 육체를 아끼지 않고 알뜰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봉투들이야말로 몽둥이나 공권력을 이용하는 주민들보다 훨씬 인간적이었다. 봉투들의 습격을 받은 주민들은 죽지는 않았지만 딱 인간 같지 않은 몰골이 되어 쓰러진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쩌면 봉투들은 주민들을 그들 본래의 모습으로 만들어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봉투들이 연일 승전보를 울릴 수 있었던 또다른 전략은 바로 그들이 연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봉투는 한낱 굶주리는 배를 채우기 위해 헐떡이며 골목을 헤매는 부랑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봉투들’로 모이는 순간 그들의 눈빛은 달라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이 모이기 시작한 그 시점의 전후에 이르러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봉투’라고 불린다는 걸 알아차렸다고 한다. 원래 호명의 원리는 불공정한 위계 위에서 작동하는 법이다. 스스로가 호명의 대상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이 그들의 각성을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렇게 집단을 이뤘다는 것만으로 그들은 혁명군이라도 된 양 하나의 기치 아래에서 연합했다. 그 기치는 이름하야 통조림 박멸.
통조림? 갑자기 웬 통조림인지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봉투들이 주민들을 ‘통조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째서 통조림인지 그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그럴 듯하게 들리긴 하지 않은가.
봉투들의 통조림 사냥은 삽시간에 동네를 공포로 물들였다. 통조림들의 공포는 길냥이의 시체가 길에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종류였다. 통조림들은 온몸이 껍질이 벗겨져 붉은 수액을 내뿜고 있는 나무토막처럼 버려진 이들을 마주하며 그게 자신이 될 수도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그러고 보면 봉투들의 분노나 통조림들의 공포나 모두 공감과 이해라는 지극히 아름답게 들리는 감정에서 비롯되나 보다. 애초부터 공감와 이해라는 게 부재했다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통조림들이 봉투들을 막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봉투들은 그야말로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었다. 대부분 오래 전 사망신고 처리가 되어 행정적인 절차로는 그들의 꽁무니를 좇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그들을 관찰한 것이 아닌 이상 그들이 어디에 살고 어떻게 몸을 숨기는지 알지 못했다. 나처럼 유별난 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통조림과 봉투의 세력다툼은 전적으로 통조림의 승리로 기울어지는 듯 했다. 하루가 다르게 엉망진창이 된 통조림들의 수가 늘었다. 이제 우리 동네에 인간이란 종은 없어졌다. 통조림 아니면 봉투만이 있을 뿐.
그리고 이 지점에서 나의 모순이 출발되었다. 그렇다면, 난 무엇일까. 통조림이라고 해야 할까, 봉투라고 해야 할까. 애초부터 인간으로서 자격이 박탈된 존재로 스스로를 정의내렸던 나였는데 이처럼 인간이 사라진 시점에 이르르니 그런 정의도 무의미해져 버린 것이다. 봉투의 편에 서서 길냥이들을 죽였으니 나도 봉투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문제는 이제는 봉투의 편이라고도 당당하게 확신할 수 없었다. 하얀색이 이 세상에서 우세했을 땐 난 자연스레 까만색에 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 하얀색에 맞서 까만색이 득세를 이루자 더는 까만색에도 포함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난 다시 회색이 된 셈이다.
회색이 설 자리는 없었다. 그건 내게 견딜 수 없는 초조함과 불안함을 안겨주었다. 처음부터 난 회색이긴 했다. 세상에서 유일한 회색. 그 어느 명암의 스펙트럼에도 쉽게 안길 수 없는. 그러나 난 느껴버리고 만 것이다.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것이 얼마나 따듯한 평온함을 안겨주는지 말이다. 그건 이를테면 거대한 둥지였다. 날 뒤흔드는 의심과 불안을 일순간에 잊게 만드는 그런 둥지.
한번 둥지를 맛본 이상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경찰에게 먼저 제보를 한 건 그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보고 들은 봉투에 대한 모든 건 나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고급 정보였다. 경찰은 고맙다며, 큰 도움이 될 거라며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 통조림들이 날 보는 눈빛이 이상했다. 그들은 전까지 내가 의심의 여지 없는 통조림이라고 여겼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 제보 내용에 대해 알게 된 그들의 눈에 난 같은 통조림이 아니었다. 통조림의 눈에 통조림이 아니라면, 난 통조림이 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족들이나 반 아이들의 눈도 예외는 아니었다. 난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있을 수 없었다.
정처 없이 걸었다. 골목 안쪽으로 길냥이가 날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길냥이에게 주춤주춤 다가가자 그 녀석은 캬오오오, 날카롭게 울고는 담벼락 너머로 사라졌다. 분명 했다. 그 녀석도 날 혐오하고 있었다.
난 길냥이가 사라진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홀로 멍하니 캬오오오, 그 녀석의 울음을 흉내 내보았다. 하지만 나도 알고 있다. 난 그들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때 갑자기 뒷통수가 불길이 치솟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시야가 흔들리더니 급기야 위아래가 반전되듯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다. 뒷통수로부터 시작된 뜨거움은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육중한 무언가가 내 배에 꽂히고 날카로운 것이 내 가슴을 파고든다. 벌컥 벌컥, 빨간 수액이 내 몸에서 경쾌한 포물선을 그리며 뿜어져 나온다.
뒤집힌 시야로 길쭉한 게 보인다. 누군가의 다리다. 다리는 하나 둘 늘어나더니 다리들이 된다. 난 그 다리의 주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봉투들이 내 주위로 몰려 들고 있다. 난 고개를 들어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싶나 보고 싶다. 그러나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숨이 가빠지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이 점점 감긴다.
이제 생각해보니 봉투들이 왜 통조림들을 습격하면서도 죽이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 봉투들은 그들을 인간 같지 않는 몰골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그러니까, 그들이 인간이 아닌 존재로 살도록 만들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그나마 남아있던 감각도 휘발되어 어디론가 날아가버린다. 그들은 날 정녕 인간으로 만들려나보다. 시야가 깜깜해진다. 인간이 된 나는 어쩔 수 없이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 끝 -
ps. 그 동안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더 좋은 글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