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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빈 자리가 가렵다
게시물ID : lovestory_899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2
조회수 : 29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5/14 08:32:19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김수엽유리창

 

 

 

이 아침내 뜰 안을 팽팽하게 채운 안개

닦으면 닦을수록 일어서는 투명한 벽

잊고 산 얼굴 하나가 물방울로 흘러내리고

 

밖은갓 헹구어 낸 빨래 같은 풍경들

바람 따라 도막도막 박음질로 수런대고

눈 끝엔 절단된 산맥 성큼성큼 매달린다

 

빗물 또는폭설에도 지워지지 않은 문신

갈아 끼운 계절 따라 왜 혹처럼 돋아나는지

아직도 등을 맞대고 선 왼손과 오른손

 

차라리 내 몸에 걸친 불을 꺼 보았다

길은 사방으로 더 선명하게 뻗어 있고

마침내 무너진 벽으로 달빛 가득 차온다







2.jpg

이가림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 번도 더 입 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부재(不在)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3.jpg

이재무빈 자리가 가렵다

 

 

 

새해 벽두 누군가가 전하는

한 선배 암선고 소식 앞에서 망연자실

그의 굴곡 많은 이력을 안주로 술을 마시며

새삼스레 서로의 건강 챙기다 돌아왔지만

타인의 슬픔이 내 사소한 슬픔 덮지 못하는

이기의 나날을 살다가 불쑥 휴대폰 액정화면

날아온 부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벌떡 일어나 창 밖 하늘을 응시하는 것도 잠시

책상 서랍의 묵은 수첩 꺼내 익숙하게

또 한 사람의 주소와 전화 번호 빨간 줄을 긋겠지

죽음은 잠시 살아온 시간을 복기하고

남아 있는 시간 혜량하게 할 것이지만

몸에 밴 버릇까지 바꾸어 놓지는 못할 것이다

화제의 팔할을 건강에 걸고 사는 슬픈 나이

내 축축한 삶을 건너간 마르고 창백한 얼굴들

자꾸만 눈에 밟힌다 십 년을 앓아오느라

웃음 잃은 아내도 그러하지만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죽음을 사는 것인데

생의 종점에 다다를수록 바닥 더 깊어지는 욕망

죽음도 이제 진부한 일상뿐이어서

상투적인 너무나 상투적인 표정을 짓고 우리

품앗이하듯 부의봉투를 내밀고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죽음의 세포가 맹렬히 증식하는 밤

빈 자리가 가려워 전전반측 잠 못 이룬다







4.jpg

손남주흙발

 

 

 

변두리 비탈밭이 가뭄에 탄다

아프게 껍질을 깨는 씨앗

물조로의 물도 목이 마르고

덮었던 마른 풀 걷어내자후끈

숨 막히는 흙냄새 사이 노란 떡잎

무거운 흙덩이 이고

푸른 뜻 굽히지 않는다

힘겨운 고개

세상이 아무리 짓눌러 와도

하늘 보고 꼿꼿이 일어서는

흙발 지그시 디디고 섰다







5.jpg

안도현둘레

 

 

 

이 술잔에 둘레가 없었다면

나는 입술을 갖다 대고 술을 마실 수 없었겠지

그래입술에 둘레가 없었다면

나는 너를 사랑할 수도 없었을 테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하고 같이 술 마실 일도 없겠고

술잔 속에 보름달이 뜨지도 않겠지

 

저 보름달에 둘레가 없었다면

아무도 찐빵을 만들어 먹겠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그래찐빵에 둘레가 없었다면

그 뜨거운 찜통 속에서 부풀어 오르다가

멈추어야 할 때를 잊어버렸을 걸

 

그렇다면

보름달이란 무엇인가

찐빵이 하늘로 솟아올라 둘레를 갖게 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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