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사는건 다 그런건가 보다...
게시물ID : gomin_14994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익명a2Nqb
추천 : 10
조회수 : 643회
댓글수 : 89개
등록시간 : 2015/08/13 04:28:28
중학교 2학년 어머니가 식칼로 손목을 그었다.
 
'우리 집이 문제가 있다' 라고 인식하기 시작할 때인거 같다.
 
그전엔 그냥 가난해서 그런거겠거니 했는데 가정 자체가 조금씩 틀어져 갔었던 모양이다.
 
식칼로 손목을 그어 자살하는 경우는 성공률이 10% 채 안된다고 알고있다.
 
어머니의 자살기도는 역시나 90%안에 들어 성공하지 못했고 손목엔 장애가 왔다.
 
아버진 건설현장 일용직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집에 밤 9시 전에 들어온적이 없었고, 항상 취해 있었다.
 
한살 터울인 누나는 사춘기 기간이라 집에 거의 없었고, 아픈 어머니와 나는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렸을때부터 나는 감정이입에 서툴렀던거 같다. 난 가족도 친구도 제 3자의 눈으로 보고있다 언제나...
 
 
 
난 그림을 굉장히 좋아했고, 국민학교3학년때는 담임이 내 그림을 보고 학교 대표로 대회에 나가자고 집까지 방문했었다.
 
어머닌 그림을 넣을 액자값 3천원이 아깝다며 반대하셨다.
 
그 해였던가? 학교 신체검사 시간에 색맹조사를 할때 난 적록색약 판정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그림과 멀어지는 계기가 됐다. '불가능'이란 단어는 어렸을적 나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워
 
색약이란게 아주 적절한 핑계가 되었을리라 생각한다.
 
6학년때는 축구부 감독이 축구부에 들어오라 했었다. 지원 받는거와 별게로 반에 1~2명정도 제의가 왔었다.
 
당시 나는 140이 안되는 키에 21kg 인 마치 국민학교 3~4학년의 체구였음에도 말이다.
 
나보다 먼저 축구부에 들어간 친구들을 보았다.
 
축구부에 들어가면서 축구화, 유니폼, 양말, 활동비 등등의 많은 물품비용이 들어간다는 걸 알았다.
 
난 축구부 감독의 제의를 거절했다. 경험에서 나오는 결정이었을 것이다.
 
돈이 많이 드는건 될 수 있으면 피해야한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결정은 탁월했다.
 
1학년때 피아노 학원도 1달치 학원비를 제외하고는 6개월 이상을 학원비를 밀린상태에서 다녔고,
 
3학년때 그림대회 액자, 5학년때는 태권도 학원 역시 2달치 원비를 제외하고는 6학년이 될때까지
 
원비를 밀려가며 다녔었다.
 
내가 다녔던 학원의 선생님들은 그래도 나에게 별다른 압박을 주지 않았던걸로 기억한다.
 
중학교 2학년 그 일이 있기전까지 난 그저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근데 아니었다.
 
 
 
'어머니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성인이 될때까지 이런 의문은 마음속에만 묻어뒀던 모양이다.
 
난 그 전의 어머니나 그 후의 어머니나 내 안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행동했다.
 
 
 
어머니의 병명은 편집증이었다.
 
모든 정신병의 시작은 같다고 한다. 불면증에서 부터 시작해서 우울증, 망상, 의부(처)증, 환청, 환각 등으로 진행된다.
 
편집증이란 이런 증상들을 보이는 정신질환 환자이다. 그리고 이 병으로 인해 자살시도를 하게 된거다.
 
내가 어머니와 있는 시간은 들어주는 시간이었다. 난 남이 나에게 얘기해 주고 싶게 참 집중해서 잘 들어줬다.
 
어머니는 하루에도 수십번 도청이야기, 암살범이야기, 감시카메라이야기, 아버지의 외도 이야기 등을 내게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난 조목조목 그런일들이 일어날 수 없다는 현 상황에 대한걸 어머니에게 납득시켜야했고,
 
혹여 그 납득이 실패하는 날엔 동네 슈퍼나 정육점, 지물포등에서 사장들과 싸우는 어머니를 찾아다녀야 했다.
 
하루는 식칼을 들고 정육점 사장을 죽여야한다며 집을 나섰더랬다.
 
정육점 사장의 죄목은 아버지를 도와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식칼을 쥔 손의 손목을 잡고 집으로 어머니를 끌고 왔다.
 
난 어머니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아니 화가 나진 않았다.
 
어머니는 항상 그 작은 체구의 나에게 이끌려 줬었다.
 
그리고 나는 정육점 사장이 독살을 하려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을 어머니께 2시간 가까이 납득시켜 드렸다.
 
 
 
중학교 3학년 모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새벽에 방문 밖에 재래식 화장실에 다녀오다 다리를 헛디뎌 넘어지셨다.
 
새벽에 한바탕 난리가 났고, 그 소리에 깨어 할아버지를 보러갔다.
 
이불위로 옮겨진 할아버지는 누워있는 그대로 숨이 멎어 있었다.
 
난 할아버지에게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가족들은 그런 나를 그냥 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옆에서 연신
 
"아이고, 이 양반 그냥 숨을 놓았어. 생을 놓은거야. 그냥..." 하며 울먹이셨다.
 
내 손으로 눌려진 할아버지의 가슴은 그저 딱딱했고,
 
내가 가슴을 누를때 마다 벌어진 입 사이로 식식 거리며 바람새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얼마 안있어 119 엘블런스가 왔다. 할아버지를 태우고 집근처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보호자 동행을 하지 못한 나는 엠블러스를 따라 뛰었다. 집에서 차로 5분거였다.
 
택시를 타고온 가족들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보호자로 엘블런스에 탑승하신 아버지가 날 안아주었다. 그리고 삼베쌓여 누워있던게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난 아직까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당시 왜 인공호흡을 하려 하지 않았을까 후회된다.
 
아마도 무서움과 두려움 속에 할아버지 특유의 입냄새에 대한 더러움도 조금 섞여있어 죄책감이 드는거라 생각된다.
 
 
 
다시 1년이 흘러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어머니는 2년중 1년은 손목재활로 보내고 또 나머지 1년은 정신질환 약에 취해 하루종일 잠을 자거나 혹은 싸우러 다녔다.
 
중간고사를 보고 중학교 동창들이 교실로 찾아와 내 성적을 확인했다.
 
중학교때부터 해왔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 학기 기말고사 성적 확인때는 그 중학교 동창중 한명이
 
"넌 왜 쓰레기가 됐냐?" 라며 놀란 듯 얘기하고 자신의 교실로 돌아갔다.
 
중학교때 나와 고등학교때 나는 변한것이 없었다. 난 사춘기도 겪지 않았다.
 
단지 성적 게시용지의 첫번째장 윗줄에서 찾아야 빨랐던 내 이름이 두번째장으로 중간쯤으로 옮겨진거 뿐이었다.
 
그 친구의 발언은 그닥 충격적이진 않았다. 그냥 '내가 뭐?' 라는 생각뿐이었고
 
나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레기'란 단어가 쓰였다는게 좀 임팩트 있어서 뇌리에 남아 있다.
 
고등학교 3학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사람들은 호상이라고 했다. 자식들을 그다지 고생시키지 않고 돌아가셨다 했다.
 
'호상' 이해할 수 없는 단어였다. 그리고 받아들이기 싫은 단어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단어를 받아들인 내 자신이 놀랍진 않다.
 
할머니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피자를 좋아하셨다.
(그 당시 주변사람들의 말을 인용했지만, 피자를 좋아하는게 나이랑 무슨 상관인지는 아직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피자는 고가 였다. 그리고 체인점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빈대떡에 피자치즈를 뿌려서 드셨었다.
 
삼베옷을 입고 누워 있는 할머니를 보고, 할아버지께 흘려드리지 못한 눈물까지 모두 쏟아 드렸다.
 
난 여전히 여러모로 할아버지에게 죄책감과 미안한 감정이 남아있다.
 
 
 
수능을 봤다. 결과는 노력에 비해 잘나온 편이지만 썩 좋은 점수는 아니었다.
 
그래도 학과선택만 잘 한다면 서울 구석에 있는 4년재 대학 어디쯤의 출석부에 내 이름이 올라갈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대학원서를 쓰기 직전, 술에 취한 누나가 친구네 집에 누워있어 처치곤란이라는 전화가 왔다.
 
아버지와 누나를 데리러 갔고, 인사불성이 된 누나는 택시를 타고 오면서 대학에 가고싶다고 통곡을 하며 울었다.
 
누나는 어려서 부터 공부하는걸 굉장히 좋아했다.
 
국민학교  1학년때는 올백점을 맞았는데 1등이 되지 못한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학교에 방문하고 나서야 1등 상장이 누나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고학년이 돼서는 성적이 썩 잘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공부하는걸 좋아했다.
 
중학교때도 마찬가지로 중위권이었지만 항상 시험 며칠전부터 밤을 새워 공부를 하곤 했었다.
 
누나는 고등학교를 상고를 선택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국가자격증 외 자격증을 9개 정도 땄다.
 
그리고 졸업 후 바로 취직을 하였다.
 
하지만 누나는 공부를 진짜 좋아했다.
 
그리고 그 해 누나는 수원여자 대학에 근로자특례로 입학하였고, 나는 재수를 하게 되었다.
 
그사이 어머니는 정신병원을 1년에 6개월씩 3차례 입원하였다.
 
 
 
노량진으로 재수 학원을 끊어 다녔었다.
 
모의고사 성적은 항상 굉장히 잘 나왔다.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중위권 대학은 붙을 수 있는 점수 였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난 친구들 사이에서 운동신경이 있는 편이었다. 축구는 학급대표로는 언제나 뛰었으며 가끔 학교 대표로도 뛰었었다.
 
그런 난 한번도 아버지에게 탁구나 배드민턴을 이겨본적 없다. 운동신경은 아버지에게 물려 받았다 생각이 든다.
 
쓰러진 아버지는 오른쪽 몸을 쓰지 못했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밥을 먹을때는 항상 누군가 떠 먹여 줘야했고, 오른쪽 입으로 흘러내리는 음식물들을 닦아 줘야했다.
(아버지 본인은 음식물이 흐르는지도 잘 못느끼는 듯 했다.)
 
복도를 걸을때는 항상 왼쪽에 서서 당겨 드려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마를 계속 오른쪽 벽에 부딪치셨다. 어깨가 아닌 이마를 말이다...
 
화장실 소변을 볼때는 뒤에서 바지춤을 잡아 드려야 했으며, 대변을 볼때 뒷처리도 대신 해드려야 했다.
 
아마 내가 아버지였다면 굉장히 버티기 힘들었으리라 생각한다.
 
난 내 몸에 대한 자부심이 어느정도 있다. 운동신경 있고 민첩하며 영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그런 내가 한순간에 몸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대 소변도 혼자 처리하지 못해 나보다 30년이나 어린 아들을 손을 빌리고 있다 생각하면 그것만큼 비참한건 없을 거 같다.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는 아버지 답게 한달 반만에 약물치료만으로 병을 이기고 퇴원하셨다.
 
그리고 그날로 35년간 피웠던 담배를 끊으셨다.
 
아버지는 가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면 당시 병문안을 한번도 오지 않은 누나에게 서운함을 한껏 표현하셨다.
 
어렸을적 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누나를 찾았었다. 요즘말로는 딸바보라고 하는 흔하디 흔한 그런 아버지였다.
 
내가 옆에 있음에도 넌 필요없고 "우리 민지(가명)어디 있니~" 하며 누나를 찾아 뽀뽀세레를 주곤 하셨다.
 
누나도 이해는 간다. 아마 항상 슈퍼맨 같던 아버지가 누워있는 모습을 보기 두려웠으리라 생각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린 해... 나는 대학에 입학했고, 적응하지 못하고 알바에만 열중했다.
 
한일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속에 나도 있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리라.
 
그 해는 여러모로 특별한 잊을수 없는 해다.
 
집에는 아침 9부터 저녁 9시까지 시도때도 없이 빚 독촉 전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어머니가 가족들 몰래 카드를 돌려 막다 점점 액수를 감당하기 힘들어져 고름이 터진것이다.
 
어머니는 가계 경제권을 쥐고있지 않으면 정신질환 발작을 하였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이길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항상 재벌집 아들인데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가난한척 하는거라 생각했으며,
 
그 생각을 반증이라도 하듯 언제나 씀씀이가 컸다.
 
친구 생일에 음식점을 빌려 대접한다던가,
 
가족들은 구경도 못해볼 고가의 옷을 사서 입는다던가,
 
하루가 멀다고 친구들을 모아놓고 식사를 대접하는 등
 
그리고 결정적으로 막내이모의 망해가던 술집을 인수해서 더 크게 망했던 일이있었다.
 
고통은 순서를 기다리지않고 한번에 온다고 하던가? 그 해 누나도 그 고통에 한손 거들었다.
 
고등학교때부터 연애를 시작해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친구가 누나를 배신했다.
 
남자친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사업을 해서 집안을 세우겠다고 하며 누나의 명의를 빌려갔다.
 
그 남자친구가 한다던 사업은 카드깡이었다.
 
판사의 재산 압류 딱지가 붙기 3개월전 경고문이 우리집으로 배송될때까지
 
아무도(누나조차) 그 사실을 몰랐으며, 금액은 5천만원 가까이 되었다.
 
누나는 대인기피증에 걸렸고, 밖에 나가길 거부했다.
 
그래도 손은 어머니가 더 컸다. 어머니의 카드 빚은 1억 5천이 넘었으며,
 
나 모르게 내 명의로 학자금 대출을 받아 1억 5천을 더 받았었다.
 
어머니는 밤낮없이 걸려오는 독촉전화에 노이로제가 걸려있었고,
 
그래도 그나마 생활이 가능한 정신상태가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막내이모가 살고있는 부천으로 가족모두를 도피 시킬 계획을 세웠다.
 
2002년 월드컵 4강신화를 이뤄 냈던 잊을 수 없는 여름날을 보냈고,
 
다음해 21년동안 살았던 고향을 버리고 부천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리고 난 휴학을 하였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정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게 더 클듯)도 있어 시작했는데
내용이 상당히 길어지네요. 추린다고 추리며 쓰는건데..
 
혹여나 읽어주신분들은 길기만한 재미없는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심주시는 분 있으면 나머지 글은 시간 나면 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