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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논문으로 생각해보는 요동정벌.
게시물ID : history_1503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enor.Jay
추천 : 7/4
조회수 : 851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03/26 12: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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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학술논문 좌표) http://kiss.kstudy.com/journal/thesis_name.asp?tname=kiss2002&key=2637494

일반논문) 13,14세기 고려와 요동의 경제적 교류.
  • 위은숙 ( Eun Sook Wee )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민족문화논총> 34권0호 (2006), pp.475-511


결론부분만 두 페이지 발췌했습니다.

요약해보자면,

원 간섭기 당시 요동으로 유입된 고려 유민은 반 자발적, 반 강제적 측면의 이주였으며,
원대에 유독 경제교류가 활성화 된 것은 원나라의 정책적 정치적 통치범위적 판단이
아주 크게 작용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실이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했으면 요동이 우리땅이 되었을 것이다"
라는 주장을 뒷받침하지는 못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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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학술논문 좌표) http://kiss.kstudy.com/journal/thesis_name.asp?tname=kiss2002&key=87435

논문 : 고려말 최영 세력의 형성과 요동공략
유창규 ( Ch'ang Gyu Ryu )
역사학회, <역사학보> 143권0호 (1994), pp.27-65

당시 최영이 처한 정치적 상황입니다.
읽어 보시면 됩니다.

정적이 득실거리고, 자기 세력이 밀어붙이는 개혁은 성과가 별로 없고
돌파구는 찾아야겠고, 정적은 잡아야겠고.

정치적 판단 미스의 전형적인 예시죠.


최영은 사실 이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정적 중 하나인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면서 명과의 관계를 어떻게든 개선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고 고려 왕실의 안위를 명에 의해 보장받는다.

이 계획은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와르르 무너졌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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