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박 교수는 결심했다.
게시물ID : humorbest_1509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차녕이
추천 : 29
조회수 : 1534회
댓글수 : 0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6/11/30 12:19:05
원본글 작성시간 : 2006/11/12 16:27:24
펀드매니저 접고 ‘타조의 제왕’ [조선일보 2006-11-07 ] 글로벌 인생 [2] 뉴질랜드 배효섭씨 … 97년 이민 웰빙음식에 승부수 뉴질랜드 타조 고기 99% 공급 … 가죽 등 관광상품화 고기 수입보다 많아 “타조(駝鳥) 주세요!” 뉴질랜드 사람들은 수퍼마켓이나 식당에서 타조 고기를 주문할 때 ‘오스트리치(ostrich·타조)’라는 영어 대신 ‘타조(Tajo)’라는 한국말을 쓴다. 순전히 배효섭(48)씨 덕분이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소비되는 타조고기의 99%를 공급하는 ‘타조 왕’이다. 뉴질랜드 북섬 유레웨라 국립공원 부근. 광활한 숲이 병풍처럼 초원을 둘러싸고 있는 곳에 배씨의 타조농장 30만평이 자리잡고 있다. 한가롭게 풀을 뜯던 타조들은 관광객이 탄 코끼리 열차가 지나가면 울타리 쪽으로 몰려나와 모이를 받아 먹는다. 뉴질랜드 전역에서 관광객 수천명이 해마다 배씨의 타조농장을 찾는다. 한국에서 채권펀드 매니저로 활약했던 배씨가 뉴질랜드로 이민간 것은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1990년대 중반 한국 기업들이 무분별하게 해외투자를 하더군요. 머지않아 위기가 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남은 인생은 외국에서 승부를 보자고 결심했습니다.” 고감도 센서와 같은 감각이었다. IMF환란이 올 줄 미리 감지하고 뉴질랜드로 떠났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캐나다를 놔두고 뉴질랜드를 찍은 이유는 자연환경이 좋고 경쟁이 덜하다는 것, 즉 블루오션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그대로 적중했다. 이민가방을 푼 뒤 8년 만에 뉴질랜드 타조사육업계의 대부(현재 뉴질랜드 타조협회장)가 됐다. 왜 하필 타조였을까. 전 재산을 처분해 뉴질랜드로 날아간 배씨는 주력 산업 분야에서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목축, 관광 분야 박람회장을 쫓아다녔다. 그 중 ‘타조 박람회’가 있었다. 아이디어가 솟구쳤다. 광우병, 구제역으로 소고기, 돼지고기가 주춤하면 웰빙음식인 타조 고기가 히트를 칠 것이란 확신이 섰다. 타조 고기는 소고기와 맛이 비슷하면서도 지방성분은 거의 없고, 먹는 사료량에 비해 배설물은 적어 사업성이 괜찮아 보였다. 우선 뉴질랜드의 대도시 오클랜드에서 20㎞ 떨어진 곳에 1만5000평 규모의 농장을 3억원에 샀다. 혈통이 좋은 타조를 번식시키는 일종의 ‘씨 농장’이다. 여기서 키운 타조를 유레웨라국립공원 인근 농장(갈라티아 타조농장)으로 옮겨 대량 사육해 고기를 생산한다. 자금은 현지 은행 부동산담보 대출로 조달했다. 처음엔 판로개척이 힘들었다. “뉴질랜드 국민스포츠인 럭비 경기장에 찾아가 ‘타조고기 시식회’를 열었습니다. 햄버거 형태로 만든 ‘타조 버거’를 공짜로 나눠주고, 초등학교에 급식용으로도 제공했죠.” 초기엔 주문이 없어 거의 전량을 수출에 의존했지만, 타조고기가 고급육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주문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현재 뉴질랜드에선 배씨의 타조고기(1㎏ 가격 한화 약 3만원)가 소고기(1㎏ 1만8000원 선)보다 훨씬 비싸게 팔린다. 그는 고기를 파는 데만 만족하지 않고 타조 가죽, 타조 오일 등 가공품을 개발하고 최근엔 타조농장 견학코스를 팜 투어(farm tour) 관광상품으로 개발, 짭짤한 가외소득까지 올리고 있다. 지금까지 배씨의 타조 농장을 다녀간 관광객은 무려 2만여명. [ 김홍수기자] ---------------------------------------------- "얼굴도 못뵌 양어머니의 사랑 양아버지 돼 50년만에 갚아요” [조선일보 2006-11-06 ] 해외 어린이 후원하는 연세대 박영필 교수 [박수찬기자] 연세대 기계공학부 박영필(58) 교수의 연구실 책상에는 사진이 두 장 있다. 한복 차림인 친어머니 사진 옆에서 곱슬머리에 체크무늬 정장을 입은 백인 여성이 환히 웃는다. 낡은 흑백사진에 사랑의 글을 담은 사람. 50여 년 전 인연을 맺은 양어머니다. 박 교수가 여섯 살이던 1954년, 박 교수는 ‘사랑하는 내 첫 양아들 영필이에게, 사랑하는 너의 엄마 어니스트 헤이그로부터’로 시작하는 편지를 받았다. 미국인인 양어머니는 영국에 본부를 둔 국제구호단체 ‘양친회’(Foster Parents Plan)를 통해 15년 동안 매달 편지와 함께 10달러를 보내왔다. “서울 상도동에 살았을 때였는데,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나무를 하고 형들은 종이봉투를 붙여서 8남매의 생계를 꾸렸죠. 정기적인 수입이 있다는 게 큰 힘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나 생일이면 양어머니는 옷이며 연필, 시계를 보냈다. 그 연필로 공부한 덕분일까? “사진에 있는 양어머니 글씨체 보이시죠? 제 영어 글씨체가 그분 글씨를 닮았어요.” 아쉽게도 한번도 뵙지는 못했다. 연세대 공대에 입학하던 해, 교모(校帽)를 쓰고 찍은 사진을 보낸 것이 마지막이었다. 미국 유학 시절 뉴욕 어머니 집을 찾았지만 이미 이사를 한 뒤였다. ‘뉴욕 웨스트 23번가….’ 매달 양어머니가 편지를 보내던 주소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여섯 살 아이는 연세대 대학원장을 지내고 과학기술훈장을 받은 저명한 공학자가 됐다. 하지만 뵙지 못한 양어머니를 떠올리면 죄송함과 고마움이 엇갈려 스쳐간다. 그래서 박 교수는 결심했다. 50년 전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어린이들을 돕는 것. 그는 6년 전부터 국제구호단체인 ‘플랜코리아’를 통해 인도네시아와 아프리카 기니아에 사는 두 아이에게 각각 매달 3만원을 보내고 있다. 플랜코리아는 50년 전 박 교수가 지원을 받았던 ‘양친회’의 후신이다. 양친회는 1979년까지 매년 2만5000명의 한국 아이들을 후원하다가 철수했다. 그리고 17년 뒤인 1996년 돌아왔다. 한국은 수혜국가에서 후원국가가 됐다. 박 교수의 아들(26)도 벌써 한 아이의 양아버지가 됐다. 그와 같은 층 연구실을 쓰는 동료 교수들도 예외 없이 후원자가 됐다. 제자들에게 주례 부탁을 받을 때도 “버는 돈의 3%는 어려운 사람을 위해 쓰겠다”고 다짐을 받는다. “처음에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겁부터 나죠. 하지만 일단 시작만 하면 그때부터 놀라운 기쁨을 줍니다.” 양어머니 사진 옆에는 그가 후원하는 아이들 사진도 있다. “그땐 어려서 몰랐지만 제가 공부를 하는데 양어머니의 존재가 큰 힘이 됐습니다. 작은 후원이지만 50년 전의 저를 닮은 이 아이들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해외 결연 문의 플랜코리아 (02)790-5436, www.plankorea.or.kr (박수찬기자 [ soochan.chosun.com]) 이상3장 - 새벽을 나는 새들( 한국 어느 곳) 한국 어느 곳 경기도 수원 화성 [사진출처-디시인사이드] BGM 전수연 / Sentimental Green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