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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깨달음, 돈오, 과정과 노력..
게시물ID : phil_1734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amel010
추천 : 0
조회수 : 881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21/03/06 16:08:21

불교에서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돈오'라고  말하죠.

자유로운 경지가 갑자기 왔다는 건데, 

그 경지가 목적이고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이 있다고 할때, 

'돈오'는 그 과정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갈고 닦는 과정이 없는 자유.

 

우리가 사는 과정이 사실은 찰나의 끝지점인 순간의 연속이며 삶의 자리는 그 순간의 정점에만 한정되 있슴.

과정이라 불리는 것 역시 실상은 모든 주변의 지나간 과정의 끝일 뿐, 

존재했던것 실체는 모두 각각이 과정이 아닌 결과였고 

현재의 존재 역시 지나온 과정이라불리는 결과인 과거들의 최종의 목적지 임.

결국 과정은 현재에 없다는 것이고, 과거의 정점을 과정이라 이르러 부를 뿐이죠.

 

그렇다면 "현재 자유롭지 못하면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처럼..

자유로운 경지가 되는 방법은 갑작스럽게 현재에 과정없는 자유의 경지가 되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 '돈오'가 아니면 방법이 없슴. 지금 이순간 가능하지 않으면 가능한 것이 없다는 게 되는데.

 

그런데 진짜로 살아보면 가능한 경지에 도달하려면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원하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현재에, 원하는 그 자세만은 유지하는 노력이라는 과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거 이상하죠. 뭔가 말이 안되는 설정을 세워둔 것 같은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은 과정이 없지만 결과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네요.

그냥 어떠한 목적지, 결과적으로 목적할만한 경지가 없슴. 뭐든 달성이 불가능하다..

깨달음의 경지에는 도달 할수 없슴니다~ '돈오'도 역시 없슴.

아 조금 자유로워 졌습니다.. 다 때려치워서 상관없어진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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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9 12:34:58추천 0
제가 부족하여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얼추 돈오에 관련한 논리적인 분석인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이해도 못한 상황에서 뭐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돈오라는 개념이 단박에 해탈한다는 뜻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지눌이 돈오점수를 말할 때 돈오는 단순한 지적이해를 말합니다. 해탈이 아닌 어떤 개념에 대한 지적 이해 즉 돈오는 교종관점의 이론 학습을 말합니다. 점수는 선불교적인 자기수양 즉 참선을 말하는 것이죠.

지눌은 돈오돈수도 말합니다. 돈오돈수는 깨닫는 즉시 수행도 끝난다는 뜻으로 돈오돈수에서 말하는 돈오는 단순한 지적이해라기 보다는 궁극적인 깨달음, 자유를 말하죠. 그러니까 돈오라는 개념이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위에 쓰신 돈오가 해탈과 교환가능한 개념이라고 한다면, 해탈은 끊임없는 자기수양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런 과정없이 갑자기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겠죠.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는 아무것도 안하고 갑자기 깨달음이 온다는 것 보다는 불립문자에 그 뜻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불교에는 근기라고 하여 원래 불성을 가진자(상근기), 불성을 갖지 못한자(하근기)로 나누어 대체로 학습능력이 떨어지면 하근기로 판단하여 성불하지 못할 것이라는 관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종에서는 문해력에 상관없이 누구나 성불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기 위하여 돈오라는 개념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문자에 매달린다는 것이 결국 석가세존이나 고승들의 말에 매달리는 것과 같아 문자에 집착하면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불립문자를 주장하는 것이죠. 어느 수준까지 이르는 것에는 스승들의 말씀이 도움이 되지만 그 스승을 이겨내야 당당히 부처가 될 수 있으니까요.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라는 것은 문자를 통해 지적인 이해를 하는 것에 대비되는 개념 같습니다.
댓글 0개 ▲
2021-03-09 13:49:27추천 0
불교는 브라만교의 본질, 아트만에 대한 반발로 일체의 본질, 아트만을 거부합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사물이든, 사람이든, 동물이든 영원히 변치 않는 본질, 영혼 따위는 없다는 것이죠. 목적론적으로 바라보는 세계관을 부정합니다. 재떨이는 담뱃재를 담는 것이지만 필요하다면 물받이로 쓰거나 무기로 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재떨이의 본질이 있다면 그러면 안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과라는 것도 궁극적인 결과는 없습니다. 모든 사물은 인과 연이 만나 생성이 되고 생성된 결과물도 어떠한 사물을 위한 인과 연이 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끊임없이 변화는 과정의 하나인 것입니다. 과정과 결과라는 단순한 인과관계가 아닌 인연론 혹은 연기론으로 바라보는 것이죠.

이러한 관점이 극으로 달할 때 세상 무엇이든 본질은 없고 항상 변하는 것이라 찰나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으로 말미암아 불교가 허무주의라는 오해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질을 찾는 것이 한 끝이라면 모든 것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한 끝입니다. 양 극단의 중간적인 것을 지향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시초인 나가르주나가 말하는 중론입니다.

모든 것의 본질이 있고 영원하다고 보는 것이 상견, 모든것은 찰나에 불과하여 부질없다는 것이 단견이라고 부르며 그 사이의 중간을 택하는 것이죠. 영원히 변치 않는 벚꽃은 없으며, 피자마자 찰나에 없어지는 벚꽃도 없습니다. 벚꽃은 인연이 만나 피어나고 인연이 다하면 사라집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 벛꽃은 부질없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음 꽃피울 순간을 기약하며 새로운 씨앗이라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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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9 16:45:24추천 0
전지하지 않는한 깨달음은 모두 우물안 개구리의 관(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물이 좁고 비루해도 그안에서 자유롭게 하니.

두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한계적인 깨달음이지만,
첫째는 깨달음의 과정은 있다는 것 이지요. 인이 없으면 과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을 어디서 구하느냐에 따라 선종과 교종이 나뉘는 것 같아요.
둘째는 깨달음은 모두 우물안 깨달음 입니다. 전지한 깨달음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다만 그 한계안에서의 깨달음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지요.
댓글 1개 ▲
2021-03-09 17:10:47추천 0
예컨대 원효의 해골수 일화는 한계적 깨달음 입니다.
본질은 물을 마신 것인데,  물을 담은 그릇이 해골이라해서 그 물이 물이 아닌것은 아니지요. 마시지 못 할 정도의 물이라면 그릇이 무엇이냐를 떠나서 물을 마시지 못하고 물을 뱉을 것 입니다. 물은 마실 수 있는 물이었는데, 다만 자고 나서 보니 그릇이 해골이라서 모두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어떤 일종의 깨달음이 있었겠지요. 따지고 보면 마음에서 비롯되기 이전에 물 자체는 물질적으로 이상이 없었던거지요. 그러므로 본질이 타당한 형상은 때론 마음먹기에 달렸음이지요.
이 일화가 주는 것은 과에는 인이 있음이고(평소 수행이란 인이 불현듯 어떤 계기로 과를 줌),  그 깨달음 역시 저만의 깨달음이며, 그러하던라도 그 깨달음이 의미 있다는 것 이지요.
2021-03-10 13:58:38추천 0
두분 댓글 잘 봤습니다.
제가 쓴 본문이 아몰랑으로 되 있어서 딱히 주장하는 바가 없긴한데,
구지 말하자면 깨달음은 결국 돈오 밖에 없지 않느냐, 노오력 해서 얻는게 아니다.
그런데 인과의 과정이 있다는걸 인정 한다면 이거 돈오든 뭐든 그 깨달음의 경지도 그냥 없는거 아니냐는 주장입니다.
그냥 '이게 뭐냐'는 말임.
댓글 0개 ▲
2021-03-14 16:20:40추천 0
소승불교 대승불교를 거쳐서 발전해온 불교사상은 이후 금강승이란 개념이 나오지만
이 모든것을 통으로 엮는 붓다의 진의는 - 불교 사상 전체를 관통하는 것 -
즉 부분이 아닌 전체속에 있다라고 선지식들은 전해옵니다

초발심 햇을 때가 부처를 이룬때요
번뇌가 곧 열반이요
사바세계가 곧 극락정토이다

무었을 추구 기도하고 쫏아가서 이루는것이 아니라
모든것이 저절로 그러함을 알며
저절로 그러함이 지은 바 없이 드러날때  곧
대 자유는 얻어진다

진여   여여즉여
굉장히 어려운 개념이자, 어떤 뜻이 이므로 여전히 체득해 보아야 할 의문부호이자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여전히 눈이 어두어
참으로 어렵습니다
댓글 1개 ▲
2021-03-14 16:40:52추천 0
여여즉여의 무한대 적인 의문이 머리에 쥐가나므로
좀더 한계지어진 개념으로 접근하며
한시를 다시 읽어보고 있습니다

樂夫天命復奚疑(낙부천명부해의)   천명을 알고 즐기면 그뿐 무었을 망설이랴  - 귀거래사 마지막 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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