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긴 글)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1.
게시물ID : readers_1512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메앓
추천 : 2
조회수 : 27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8/22 06:47:22
옵션
  • 본인삭제금지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모든 글을 시작하는 첫 문장을 꼽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단 하나의 문장을 고르라면 나는 이 문장을 택하고자 한다.

참으로 무료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거듭되는 인간관계의 실패(특히, 지독하게도 갈구한 연애 문제를 포함해서)는 나를 날이 갈수록 위축되게 만들었고, 그렇게 생긴 자격지심을 메꾸기 위해 스스로의 계발에 나섰지만 내가 그렇게도 자신 있다 큰소리 치고 다녔던 이 에 있어서는 일 보의 전진도 없어 보였다.

방학이 시작하기 전 호언장담했던 한 편의 극본도 (주관적으로) 힘든 아르바이트와 나의 나태함 사이에서 서서히 흐려져 갔고결과적으로 개강에 이르러서는 아무리 돌이켜봐도 얻은 것이 RPG 게임의 무의미한 숫자들밖에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런 나를 더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그럼에도 나에게는 미약한 자기계발의 의지가 남아있다는 점과, 더불어 내게 그 자기계발의 성대한 계획의 첫 단추를 꿰맬 실천력조차도 없어 보인다는 데에 있었다. 아니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나름대로혹은 나 스스로가 너무 깊은 절망에 빠지는 걸 막기 위한 마지노선이라면 나는 나 스스로의 글솜씨에 퍽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 정도였다. 그것 또한 쓸쓸한 자기 위안의 반찬거리로밖엔 전락하지 않았으나그래, 마치 내가 지금은 하고 있지 않지만 마음만 먹으면 백 편이든 천 편이든 시대를 아우를 걸작을 쓸 수 있다는 식의 허풍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쓴 글(어젯밤의 글이 아니라면)을 보고서 퍽 괜찮은 문장이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또 며칠 밤을 새가며 쓴 장편 소설의 첫 장을 보면서 퍽 괜찮은 짜임새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역시 방법과 의지의 부족으로 인해 중간에 펜을, 키보드를 놓아버렸고 그렇게 4부작, 대략 1700페이지에 이를 수 있었던 하나의 장대한 서사시는 그대로 A4 64페이지의 분량에서 그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나의 그 의지 부족은 어쩌면 신의 뜻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마치 시적으로 쓰인 첫 페이지와다음 페이지가 태어나지 못해 수없이 버려지는 수백 개의 소재들을 생각해보면기이하리만치 뚝 사라져버리는 이 의지의 고갈이 혹시 좋은 소재가 나로 인해 신선하지 않은소재가 되어버리는 사태를 걱정한 신의 고고한 계시는 아닐까하는 생각 말이다.

의지 부족을 무마하려는 하찮은 변명이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내 삶을 아무리 돌이켜봐도 나는 신의 장난감은 아닐까? 혹시 신은 인간의 밑바닥을 살살 긁으며 그 좌절감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디스트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신에게 의지했던 순간조차도 나는 그의 관심 섞인 무관심 속에서 서서히 말라 비틀어져 가고 있었기에

 

집어 치우도록 하자.

모든 것을 내 잘못으로 돌리는 편이 속 편하다.

처음부터 내 잘못이었던 모든 문제들을그걸 굳이 말하자면 내 탓은 아니다라고 변명하는 데에는 원래보다 갑절은 많은 힘이 들어간다.

장장 한 페이지에 이르는 자기 성찰에 두고팠던 의미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기에, 심지어 나 스스로 돌이키기에도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는 삶에 대한 사소한 변명과 당위성의 보충 정도였다.

이를테면, 내 인생은 이토록 안쓰럽습니다하는 이야기.

그러나 변명거리를 붙여가며 하나씩 하나씩 돌이켜본 나의 삶은 오히려 그 변명거리가 나의 나태와 무능력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꼴이 되어 쓰는 나를 더욱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기에, 나는 짐짓 쿨한 척 모든 걸 집어 치우면서 이 이야기의 두 번째 시작을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이라는 제목으로 생각해보면 본격적인 시작을 고하고자 한다.

그래, 지금까지는 라는 무명의 작가(이 글을 접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흔해 빠진 중2병 환자로 보이겠으나)가 앞으로 펼쳐나갈 이야기의 허무하고 우울한 패턴에 대한 일종의 예방접종이었다. 나의 삶에 이러이러한 배경이 있다는 것을 알리지 못한다면앞으로 펼쳐질 한 단편의 이야기는 너무도 당황스럽게 느껴질 테니까 말이다.

 

0.

 

모든 것의 시작은글쎄, 사실 난 아직 이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가 될지조차 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글을 시작하고 첫 페이지도 완성되기 전에 hwp 파일을 삭제해버린 것이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고.

하지만 이토록이나 스스로에 대해 솔직하게 접근한 것도, 솔직히 말해 처음인 것은 맞다.

여태껏 써왔던 수많은 단편의 도입에서는 주제를 모르는 비유와 은유그리고 마음 한구석 이 글을 내 주변의 누군가에게 읽힐지도 모른다는 얼토당토않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나 자신의 글에서 스스로를 묘사하는 부분에서조차 솔직해지지 못하고 나의 이야기를 마치 남의 이야기인 양 조금씩 뒤틀고 왜곡했는데, 이번에는 내 주변의 누가 보더라도 대번에 나임을 알아채버리지는 않을까싶을 정도로 개인적인 신상까지 상세하게 적어버렸다.

이런, 소설을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삼천포로 이야기가 빠져버렸다.

요는 아직까지도 나는 당분간 집필할 소설의 뼈대조차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이 단편마저도 하드디스크 깊숙한 곳의 한 티끌로 사라져버리도록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이야기는 작가인 로부터의 접근성이 용이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쓰기 쉬워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아마추어 작가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어떨까.

나와 같이 소설의 첫 장만 썼다 지웠다를 무수히 반복하는어쩌면 이 세상에 넘쳐날지도 모를 한 아마추어 작가 말이다.

1.

 

우선,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이건 좀 아닌데…….”

물론 그걸 들을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부모님의 등골에 빨대를 꼽고 살아가던 스물아홉 백수건달의 집에, 그것도 한낮에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 또한 누가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닌 듯 알아듣기 힘들게 웅얼거릴 따름이었다.

세상에 차고 넘치는 잉여 인간들 중 하나인 그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사람은 뇌 속에서 그를 상정하고 묘사하는 작가인 나밖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수염이 무성한 턱을 이따금씩 어루만지고, 빨지도 않아 꾀죄죄한 러닝셔츠 밑으로 툭 삐져나온 뱃가죽을 이따금씩 찰싹 때리는 그의 모습은 단순히 머릿속에서 상정할 따름인데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 들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작가인 나를 그가 인지하고 있을 리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저 자신의 눈앞에서 건조하게 빛나고 있는 모니터에 대고 못마땅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기는 하였으나, 이내 백스페이스 키를 요란하게 눌러대며 괜히 무고한 책상만 뻥뻥 때려대는 게 전부였다.

그의 글버릇을 짐작할 수 있는 점은 바로 그 백스페이스 키에 있었다. 제법 말끔한 기계식 키보드사고자 하면 20만원 후반에서야 구할 수 있는 고급 키보드의 자판은 유독 새것 같은 상태에 비해 백스페이스 키의 인쇄만 닳아 있었다. 게다가 얼마나 성이 나서 그걸 눌러댔는지 오른손의 약지 끝엔 굳은살까지 배겨 있었다.

이를테면, 그는 지우는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기에 그의 손은 너무도 빈출했고, 그에 반해 그의 눈이 원하는 기준은 지나치게 높았다. 그는 스스로의 산물에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그는 자신의 높은 안목을 원망하는 대신 애꿎은 자신의 손에 화풀이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런 정체 상태는 그에게 있어 일종의 콤플렉스로 남아, 부모님을 뵐 때마다 그를 위축되게 만들었고 사회 바깥의 유능한 사람들로부터 그 스스로를 격리되게 만들었다. 그의 높은 안목이 쓰이는 곳은 고작해야 유능한 사람들(부모님을 포함한)과 자신의 격차가 얼마나 커다란지를 통감하는 용도밖에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가 그런 재주를 살려 출판사에라도 취직했다면 아마도 그 또한 유능한 사람에 속하는 편집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나, 혹시는 그저 혹시일 뿐,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에게 있어서 IFIF일 뿐이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구원의 여지라면 오로지 하나의 장편을하다못해 단편이라도 완성해내는 것이었고, 비로소 그가 그 스스로의 자격지심을 털어내고 한 편의 소설을 써낸 작가로써(그것이 아마추어인지 프로인지에는 관계없이) 발돋움할 때야말로 그가 세상 밖으로 다시 걸음할 자격이 주어지는 순간이었다.

라는 자기 위로를 해가며 그는 다시 키보드를 잡았다.

화풀이를 하긴 해야겠으나 비싼 키보드에는 차마 하기가 어려워 책상을 펑펑 때려가며, 그는 다시금 좋은 소재의 이야기를 갖고 장편의 도입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그 스스로를 그렇게나 채찍질하면서 쓰는 소설은 보통의 작가하면 떠오르는 순수 문학이 아닌이상이나 황순원의 그것이 아닌말하자면 퇴마록과 드래곤 라자로 대표되는 판타지 소설이었다.

물론 그것은 장르가 그렇다는 이야기고, 그의 소설은 범람하는 불쏘시개들의 그것과도 비교가 부끄러울 정도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야 물론, 완성되지도 못하지 않았는가.

어쨌든 태초에 용과 사람이 있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그의 여든아홉 번째 장편 소설은 두어 시간 후 과격한 화풀이와 함께 컴퓨터의 전원 코드를 뽑아버리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