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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장 의리하나만큼은..
게시물ID : baseball_151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동의물피
추천 : 17
조회수 : 2812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1/11/22 18:06:38
제작년에 폭행사건 때문에 이미지가 안 좋은 감이 있긴 한데

자식입장으로서는 캐든든한 아버지일듯ㅋㅋ

그밖에 알려진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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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3/23/2011032302558.html

"천안함 유족 채용하겠다" 그 후 1년…

지난해 3월 26일 천안함 사건이 터졌다. 방위산업으로 성장한 한화그룹의 김승연 회장은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방위산업체를 경영하는 그룹으로서 유가족이 가장 절실한 부분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유가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테니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짜라."

김 회장 지시를 받은 한화 경영진은 천안함 희생자의 직계 및 배우자 중 1명을 채용하되 희생자가 미혼이거나 부모가 없는 경우에는 형제자매로까지 확대하기로 구체적인 채용 방안을 확정했다.........지난해 입사 희망자 전원이 채용됐다. 한화측은 "2011년에 취업을 원한 유가족과도 희망 근무 지역과 담당 업무 등을 협의할 계획"이라며 "김 회장의 약속대로 유가족들의 채용은 계속 진행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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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역 폭발사고는 창업 이후 가장 심각한 경영위기에 봉착한 상황이었습니다. 
선친은 모든 책임을 지고 그룹 전체를 내놓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정부가 당시 이리시 재건에 총예산 130억원을 잡았는데, 한화가 내놓은 돈이 91억원이었으니 
선친의 책임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선친은 이리 폭발사고가 났을 때 ‘개인재산을 모두 헌납하겠다’고 밝히고 
91억원을 사회에 헌납했습니다. 


91억원을 헌납하고 내가 물려받았기 때문에 사실은 마이너스 상태에서 물려받았습니다. "

 

 

 

"그래서 선친이 돌아가신 상황에서도 울 겨를조차 없었다. 
‘죽기 살기로 3년만 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볼만 하면 계속하고, 아니면 손을 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3년 정도 하니 해봐야겠다는 의지가 생기더라. 
그래서 3년 뒤 어느 비오는 날 선친 묘소로 가서 ‘어려웠던 3년이지만 해보겠습니다’고 신고식을 했다.”


(김승연 회장의 인터뷰 중)

 

 

 


한화 그룹 총수 김승연 회장의 위엄

 

 

1. 우리나라의 국방을 책임지는 군수사업체. 이게 왜 중요한지 알지? 

 


2. 김승연 회장이 자기 회사 내에 난치병 환자 혹은 난치병 환자를 가족으로 두고 있는 사원이 있

으면 수술비 전액 지원해준 사건이 있었음. 


이게 왜 일어났냐면, 한화 경리 한명이 난치병에 걸려서 김승연이 수술비 대줬는데 
이걸 계기로, "우리 그룹의 다른 사원들 중에서도 이런 사람이 있을 것 아니냐"면서 하게되었음. 

 

한화 이글스의 故진정필 투수도 이 사업의 혜택을 받은 사람. 돌아가시기야 했다만. 

 


3. IMF때 한화 에너지를 현대정유에 넘기면서, 
"20-30억 덜 받아도 좋으니, 직원들 정리해고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추진해 달라"고 하는 동시에, 


"한화에 남고 싶은 직원은 최후의 마지막 한명까지도 받아 주겠다. 설령 현대정유에서 해고가 되더라도 받아 주겠다."라고 한 사건. 


그 덕에 한화 에너지의 직원 706명과 한화 에너지 프라자의 직원 456명은 완전 고용 승계가 이루어 졌다.


이 구조조정은 잡음도 없었고, 언론에서 휴머니즘 경영이라며 대서특필했었고


김대중 대통령은 김승연 회장을 청와대로 불러서 '가장 모범적인 구조조정의 사례'라며 칭찬했음.


이 사건으로, 김승연 회장은 '구조조정의 마술사'라고 불리게 된다.


하지만 김승연 회장은 이 별명을 가슴아픈 별명이라고 했다.

 

모든 구조조정을 완전 고용승계로 하는것을 목표로 했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김 회장은 구조조정으로 50∼60명의 직원이 일터를 잃게 되자 

 


사내 방송에서 “선대 김종희 회장이 한화를 창업한 이래 이런 대규모 구조조정은 없었다.”면서 

 

“나는 그들의 가정에 많은 고통을 준 가정파괴범이며, 


만일 내가 경영을 잘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비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4. 김승연 회장과 한화 노조위원장은 늘 대립해왔었다. 
그런데 그 자신을 골치아프게 했었던 한화 노조위원장이 죽자, 
장례식장에서 노조위원장 아들에게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회장실로 오라"고 하며 수표를 주

고 갔던 사건. 

 


5. 4번과 같은 사건때문에, 노사관계가 정말 원활하여 3년 연속 노조가 임금협상을 회사측에 전면 

위임한 기업. 

 


6. 천안함 사건때, "군수사업을 하는 기업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숙고해보자"라는 말을 
회의때 임원진에게 남겨서 적극 검토하게 했음.
그 결과, 천안함 유족들에게 3억의 위로금을 전달하는 한편,
유족관계자들을 전면 우선채용해 준 기업이 한화 그룹이다. 

 

 

7. 영업이익이 1조가 넘는 우리나라 몇 안되는 기업. 
60년대 재벌 10위 안에 들었던 기업들 중, 현재도 10위 이내인 그룹은 한화와 삼성 뿐이다.

 


8. 화약 팔아먹던 시절에, 임직원의 사고를 늘 걱정해서 공장에 기도실을 설치했던 기업.

 


9. 김승연 회장은 2002년 만성적자에 시달렸던 대한생명을 인수 후,
대한생명의 현금흐름을 흑자로 돌리기 위해 3년간 대표이사를 하면서 월급 한 푼 받지 않았고, 
누적적자 2조 3천 억원을 다 갚는 동안 배당도 받지 않았다. 

회사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회계를 조작한 대우와는 대조되는 사례다.

 


10. 매년 사회공헌 우수기업 시상과, 준법우수 기업 시상때마다 단골으로 불려나가는 기업
한화그룹은 직원 뿐만 아니라, 김승연 회장 또한 사무실에만 앉아있지 않고

일반 직원과 똑같이 직접 연탄 나르면서 땀흘리며 

빈자를 돕는 봉사활동을 매년 해 오고 있다.

 


11. 29세의 젊은 나이에, 최연소 재벌 회장으로 취임하여 아버지뻘 되는 쟁쟁한 이사들을 휘어잡

은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 

 

모두가 '젊어서 안된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을 때,
김승연은 '젊기 때문에 가능하다'며 대형 M&A를 잇따라 성사시키는 기염을 토했음.

 

 

 

12. 신입사원이 김승연 회장과 단둘이 앞에서 멋 모르고 대놓고 담배를 피자
그 자리에서 신입사원에게 귓방망이를 날리면서 "어디서 어른 앞에서 그러는 버릇을 배웠느냐"고 일갈. 그 사원은 그 다음날 사표를 내어, 예의를 지키는 기업문화를 만듬.

 

존나불쌍

 


13. 국가 기밀 유출 혐의로 로버트 김이 미국에서 감옥살이를 할 때 가족에게 수년간 생활비를 지원


14.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기관지 파열로 복싱 8강전을 포기한 백종섭 선수에게 위로금 3000만원을 직접 전달함.



15. 북창동 삐끼 양아치의 문란하고 폭력적인 유흥문화를 일소하시기 위해 친히 금장 리볼버를 들고 경호원 30여명을 끌고 가셔서 처리하시고 사회적 책임을 홀로 떠 맡으시어 건전한 유흥문화를 조성하는데 힘쓰신 분이 김승연 회장.

 

 

16. 김승연 회장의 아들 셋 모두 병역문제에 대해 깨끗함.

첫째 아들은 하버드 졸업 후 공군 장교로 복무(공군사관후보생 117기)

둘째도 장교복무 중

막내 아들은 승마 금메달리스트(미국국적 아님. 미국국적이면 한국대표로 금메달 따는게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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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책이 많다는 서울대 도서관 (국회도서관은 논문까지 포함하면 서울대가 더 많음)과 관려해서..
한화그룹 김승연(金升淵) 회장은 1990년부터 1993년까지 250억 원의 기금을 서울대에 지원했다. 김 회장은 미국 멘로 대학교와 드폴대 대학원 출신이고 부인 서영민씨는 서울대 출신(약대 수석졸업)이다. 김 회장은 유학 시절 겪은 방대한 규모의 미국의 도서관이 국가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하면서 서울대 도서관에 대한 지원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는 이 기금의 이자 333억 원으로 지금까지 단행본 11만4000여권, 4만7811종의 잡지 등을 샀다. 대학 관계자는 “이 돈으로 서울대도서관 학술 관련 서적 구입 비용의 40~50%를 충당한 셈”이라며 “이바지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코너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최고액 기부자의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죠. 2000년대에도 한화 계열사에서 꾸준히 1억에서 2억씩 내서 총 11억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예전에 들은 이야기를 간단히 적어보면, 90년대 초반에 200억이 넘는 돈을 도서관에 기부하는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도서관 건물을 짓는 기금도 아니고 장서 구입 기금으로는 유례가 없어서 언론에서도 큰 관심을 가지기도 했구요. 당시 우리학교 중도는 장서목록 전산화 작업을 하고 있어서 관련한 예산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산화 비용에 김 회장이 기부한 기금 일부를 사용해도 되는지 문의를 했더니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책사는 것 이외에 한푼이라도 다른 곳에 쓰면 당장 취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셨답니다. 그 뒤로 중도에서는 군말없이 책 구입에만 이 기금을 써야했다고ㅎㅎㅎ 다른 사람들처럼 건물 짓는 곳에 돈을 낸건 아니라 표는 잘 안나지만 지금까지 이 기금으로 책 사는걸 보면 대단하긴 한듯...




글만 올리기 심심해서 기부 당시에 조완규 총장한테 감사패 받는 젊은 김회장님(당시 나이 40세, 올백머리는 어려보이기 싫어서라는 후문이...) 사진도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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