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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대 일본의 발전과정
게시물ID : history_1513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KalosAgathos
추천 : 6
조회수 : 241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3/31 02:06:52
밑에 글에 대한 설명으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제가 그나마 제대로 아는 역사가 17세기 일본뿐이긴 하지만 이 경우엔 괜찮네요 ㅎㅎ 술먹어서 횡설수설하지만, 최대한 정리해보겠습니다.

17세기의 이론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도쿠가와 막부 전 일본이라는 나라의 구성 방식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은 천황을 모시는 것을 전제로 실질적 정권은 막부라는 장치를 통해 쇼군이 누렸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천황은 그냥 현세와는 동떨어진 신격화된 대상이라 역사에 거의 관여하지 않지요... 헤이안 이후로 천황이 관여되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난보쿠조 때말고는 기억이 안나네요.

그렇다면 이 막부와 각 다이묘들의 관계를 봐야하는데 이 관계는 참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느슨한 관계이며, 그저 막부의 권위를 인정하는 대가로 다이묘가 관할지역의 왕처럼 행동할 수 있게 되는 그런 관계였습니다.

이건 봉건 관계로 표현이 안 될정도로 느슨한 관계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엄밀히 말해 일본이라는 "나라"는 도쿠가와가 세운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중앙 정부가 전국을 행정구역의 대상으로 놓게 된 시작이며, 도쿠가와가 일본을 "통일"했다고 하죠... 통일이라는 표현을 쓸만큼 다이묘와 쇼군은 분리되어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이 왜 중요하냐면 이렇게 느슨한 관계가 도쿠가와가 집권하면서부터 크게 바뀌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의 모든 정책을 하나로 집약하면 "다이묘의 약화와 중앙정부 강화"라는 슬로건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각 사회 계층마다 입을 수 있는 옷의 종류나 무기의 제한(사무라이들도 패용할 수 있는 칼이 다 정형화되었습니다)을 통해 사회적 변동성을 줄였으며(수학에서 normalize라는 표현이 있죠),

은을 막부의 권한 아래 직접 관리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제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정책을 또 하나 시행했는데 산킨 코타이라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모든 다이묘들을 에도(새로 생긴 수도)에 살게 만드는거였는데요... 다이묘 본인은 격년(2년에 한번씩)으로 자기 영지에 살 수 있지만 가족들은 모두 에도에 살아야 합니다...

이걸 통해 전국의 귀족을 모두 에도에 집어넣은겁니다 ㅎㅎㅎ 상상을 초월하죠... 중국 공산당도 저렇게는 못할겁니다. 북한정도면 하겠네요 ㅋ

이렇기 때문에 에도의 인구가 당시 세계에서 1등이 된거에요... 도시의 내생적 발전을 통해 인구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이 에도에의 인구 집중은 당시 일본 경제를 크게 자극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일본은 당시 은을 통한 자금의 해외 유입이 엄청난 상황이었으며, 해금령때문에 그 자금의 해외 유출이나 밀수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시장의 수요가 한 곳에 집중된거에요...

이러한 엄청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에도 주변으로 경제가 크게 활성화되었고, 같은 시기에 관서의 중심으로 발전한 오사카가 "전국의 식당"이라는 별명과 함께 에도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공급원이 되죠. 반대로 에도에서 오사카로의 거래도 활발해졌구요.

잠깐 오사카에 대해 얘기를 하면, 오사카가 커진 이유는 물론 막부의 정책도 있지만(세금 면제) 지리적 요인이 큽니다.

관서 지방에서 가장 적당한 항구를 가졌으면서 주변에 면 작물이 잘 자라서 면 거래 중심지가 되었지요. 그리고 쌀이 잘자라는 큐슈지방의 쌀도 오사카에 먼저 왔으며, 다이묘들이 녹봉으로 받는 쌀이 오사카에 저장되었습니다. 18세기에는 도지마 시장이라는 세계 최초의 선물(futures) 거래도 생겼지요.

다시 오사카-에도 무역으로 돌아와서 얘기를 하면, 관서지방은 은광산이 많았기에 은이 많이 거래되었습니다. 하지만 정형화된 은화가 없었기에 은은 거래시마다 무게를 달아야했고, 이게 번거롭기 때문에 신용거래가 자주 이루어졌지요.

또한, 에도쪽은 은을 많이 쓰지 않고 정형화된 동전이나 금을 사용했습니다. 이때문에 오사카와 에도간의 무역은 선 물품 지급 후 대금 지급 형태로 이루어졌고 주로 대금 지급은 몇개월씩 걸렸던 것으로 나옵니다.

이 과정에서 환전상들이 활발히 생기기 시작하고, 이탈리아 메디치의 경우처럼 뱅킹 사업으로 접어들게 되죠.

하지만 일본에서는 유럽에서의 경우와는 달리 단순한 레벨의 대출밖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투자를 위한 "기업 대출"은 없었습니다.

유럽의 "회사"와 비슷한 개념의 상인 길드 및 연합(나카마)도 생기고 멤버들끼리 지분을 나눴지만 이는 투자의 개념이 아니라 뭉쳐서 보호받으려는 이유에서 생긴거였습니다.

자... 여기까지가 간략하게 쓴 일본의 17세기 경제 발전과정이었습니다.

역사에 if는 없다지만, 만약에 일본에 은이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선 유럽 상인들이 관심을 그렇게 갖지도 않았을 뿐더러 도쿠가와가 그러한 강력한 정책들을 펼치지도 못했겠죠.

보통 전쟁을 치른 국가는 국력이 약해집니다... 하지만 그러한 약 한 세대동안의 전국시대를 겪으면서도 발전을 이룰 수 있던 것은 은으로부터 유입된 자금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국가의 부흥에는 두가지 중 적어도 한가지 상황이 포함되야 합니다. 내수경제의 발전(주로 기술을 통한 발전이죠), 또는 해외 자금 유입.

여기서 조선은 왜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여 발전하지 못했나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저는 다른 것을 모두 제쳐두고(만약 조선이 유럽 문명을 받아들일 의지가 있었더라도)

 "조선은 내수경제가 작았으며, 해외 자금 또한 유입되지 못하는 환경이었다" 라고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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