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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과 오렌지
게시물ID : readers_356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낮에나온달
추천 : 5
조회수 : 328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21/04/09 20:5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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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나는 77번 일개미다.
아니 정확히는 78번이었던가? 언제부터인가 나조차도 내 이름을 잊어버렸다.
우리 여왕님은 99번 개미까지는 이름을 모두 붙여주셨지만 숫자가 3자리로 넘어가자 
그다음부터는 외우기 귀찮아졌는지 모두 뭉뚱그려 개미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어이 개미"

하고 부르면

"네?" "저요?" "저 말인가요?"

하며 전부 뒤돌아보는 해프닝을 항상 벌이곤 한다. 
우리는 모두 그냥 개미일 뿐이다.

여왕님이 처음 이 단칸방에 터를 잡았을 때는 먹을게 하나도 없어 허리띠를 졸라맸다고 한다.
그때 어찌나 허리띠를 졸라맸는지 개미허리가 됐다는 농담을 여왕님은 자주 던지시곤 했다.

더 이상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여왕님이 다른 곳으로 떠나려고 마음먹은 날 
신기하게도 방구석, 우리구멍 가까운 곳에 수북이 쌓여있는 설탕산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여왕님은 설탕을 먹이 삼아 이 단칸방에 살기 시작했다.

이 단칸방엔 인간 한 명이 우리랑 공존하고 있다. 
그 인간은 늘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거나 가끔 우리가 일하는 걸 관찰하는 게 하루의 전부였고 
우리랑 공존하는 게 마음에 드는지 가끔 설탕산이 줄어들면 채워주곤 했다. 
우리처럼이나 그 인간의 하루 역시 단조로운 편이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그 인간은 매일 저녁때 나가 오렌지 하나를 사들고 와서 먹는다. 
처음엔 설탕처럼 인간이 우리에게 오렌지를 나눠주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했었지만
인간은 절대 우리에게 오렌지 한 알갱이조차 주지 않는다. 
몇몇 무모한 우리들이 오렌지를 가져오려고 시도해봤지만 인간에게 전부 끔찍하게 살해당해버렸다.

문제는 여왕님의 귀에 인간이 오렌지를 들고 온다라는 소문이 들어가게 된 뒤부터였다.
여왕님은 이제 설탕은 물렸다며 오렌지를 가지고 오라 독촉했고 
그렇기에 우리들은 매일 목숨을 걸고 도전했지만 
결과는 지금까지 오렌지 한 알갱이조차 얻지 못하고 전부 인간에게 죽고 말았다.

갑자기 머리 위로 거대한 산 그림자 하나가 드리웠다. 
어느새 다가온 인간이 우리가 일하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죽음을 체험한 것처럼 가슴이 서늘했다. 
저 인간이 발로 살짝 누르기만 해도 우리들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나와 동료 우리들이 설탕 나르는 작업을 멍하니 구경할 뿐이었다. 

그러다 인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혹시 찍어누를까 봐 나는 움찔했다.

"하나 둘 셋..."

하지만 허무하게도 인간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우리의 수를 셀 뿐이었다.
다행히 인간이 구경만 할 모양이라 생각한 나는
잠시 놀라서 멈췄던 발걸음을 황급히 놀리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대열이 망가진다면 우리들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과 기묘한 동거를 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오렌지에 대한 여왕님의 히스테리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인간은 저녁때면 나가서 약 올리듯이 꼭 오렌지를 하나씩 사들고 왔고
절대로 우리에게 오렌지 한 알갱이조차 주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인간이 우리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그런 것도 없었다.
인간은 성실하게 설탕을 제공했고 오렌지를 가지러 도전하는 우리를 제외하면 
그 외엔 죽이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마치 오렌지만 건들지 말라 경고하는 것처럼...

"작업 보고 설탕 작업조는 어떻게 되었나"

감독관이 말하자 총괄자가 앞에 나가 보고했다.

"설탕 작업조는 오늘 치 작업을 모두 완료하고 휴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음 그래 수고했다."

작업관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한쪽 다리를 두 개나 잃어버린 채 자꾸 옆으로 쓰러지면서 
꽁무니를 질질 끌고 오는 우리 한 마리가 있었다.

"오렌지 작업조는..."

감독관의 말이 끊겼다. 
그는 이미 걸어오는 우리의 상태를 보며 사태를 파악했을 게 틀림없다. 
더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잠시 망설이던 감독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길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어떻게 됐나"

그 우리는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한 글자씩 내뱉었다.

"저 전멸했습니다. 인간이 우리를 전부 죽여버린 뒤 태워..."

그 우리는 그대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감독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늘도 여왕님이 난리를 치게 생겼군"

골치가 아픈지 더듬이를 흔들어 대던 감독관은 곧 가버렸고 
나는 내 좁은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방 안에서 인간에 대해 떠올렸다.

그 인간에게 우리는 뭘까? 
왜 우리에게 설탕을 주는 걸까?
왜 설탕은 되면서 오렌지는 안되는 걸까?
대체 그 인간에게 오렌지란 무슨 존재일까?

많은 의문이 내 머릿속을 스쳤지만 해결되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인간이랑 대화할 방법이 없었고 
인간 역시 우리랑 대화하고 싶어 할 거 같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내일도 제발 설탕 작업조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다음날 
감독관은 잠이 덜 깨서 더듬이를 비비고 있는 우리들을 걷어차며 작업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또렷한 표정을 지으며 감독관의 입을 바라보았다.

'제발 제발 제발 오늘도 설탕조가 되길'

감독관이 날 가리켰을 때 나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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