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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악마 (하루2)
게시물ID : readers_356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낮에나온달
추천 : 1
조회수 : 25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4/14 21: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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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이렇게 하죠 

제가 당신에게 하루를 빌려드리겠습니다."

 

후안이 눈동자를 크게 뜨며 되물었다.

 

"하루를 빌려준다고요?"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실브는 잠시 말을 끊고는

비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서 오늘이 며칠이지?"

 

물을 끓이고 있던 비서는 황급히 책상으로 다가갔다.

악마랑 지내면서 그녀 역시 시간관념이 무뎌진 상태였고

몇 달째 넘기지 않은 달력은 여전히 1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애꿎은 달력만 넘기던 비서는 겨우 오늘이 며칠인지 기억해냈다.

 

"정확히 4월 1일입니다."

 

실브는 시선을 다시 후안에게로 돌렸다.

 

"후안씨 제가 당신에게 시간을 빌려드리면 

당신은 내일도 다시 1일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오늘 하루가 리셋되는 거죠"

 

후안은 팔을 들어 이마를 쓸어내렸다. 

땀이 나는 줄 알았는데 소매에 묻어나는 건 없었다.

뒤늦게야 자신이 대답을 안 했다는 걸 깨달은 후안이 입을 열었다.

 

"그게 가능한 건가요?"

 

실브는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당연하죠 금액만 지불하신다면요"

 

투박한 손으로 턱을 짚은 후안은 눈알을 굴리다 되물었다.

 

"어... 그럼 제 기억도 리셋되는 건가요?"

 

"아니요 당신의 기억은 그대로입니다. 

다만 시간만 돌아가는 거죠"

 

복잡하게 돌아가는 머리 때문에 후안의 몸은 방치되었다.

그는 멍하니 악마를 보고 있었고 실브는 그 시선의 의미를 깨달았다. 

잠시 고민하던 실브는 테이블에 놓인 오렌지를 보며 임기응변을 떠올렸다.

 

"후안씨 당신에겐 오늘도 1일이지만 내일도 1일입니다. 

오늘 겪었던 일은 전부 리셋되겠지만 그 기억은 머릿속에 남아있게 되죠"

 

손으로 오렌지를 가리키며 실브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만약 오늘 시장에서 산 이 오렌지를 먹어보고 맛이 없다면 내일은 안사면 됩니다. 

오렌지를 먹었던 기억은 당신의 머릿속에만 남을 테니까요"

 

이야기를 들으며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고 있던 후안은

실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 그거 흥미롭군요 당장 계약하겠습니다. 근데..."

 

잠시 빵모자를 만지작거리던 후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금액은 얼마인가요?"

 

"특별히 10글렌에 해드리죠 어떻습니까?"

 

후안의 고개는 흔쾌히 끄덕여지지 않았다. 

그는 대답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계속 손을 꼼지락거리며 빵모자만 만지고 있었다.

 

실브는 미소를 지었다. 

보통 장사꾼이라면 여기서 하루를 되돌린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에 대해서 어필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프로였다. 

 

"좋습니다. 그럼 5글렌에 해드리겠습니다. 

대신 연체될 경우 모든 이자는 시간으로 받는 걸로 하고요 어떻습니까?" 

 

"시간으로 받는다고요? 그게 무슨 소리죠?"

 

"원래 이런 거래의 경우 이자는 무조건 단리로 받습니다. 

후안씨가 3일 밀릴 경우 하루당 1글렌, 즉 3글렌을 받죠 

하지만 시간의 이자는 복리입니다."

 

그러나 후안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 사이 물을 다 끓인 비서가 차 두 잔을 실브와 후안의 앞에 내려놓았다.

잠시 차를 홀짝이며 시간을 번 실브는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룬다면 그 시간만큼 내일에 투자해야 합니다.

만약 내일이 됐을 때 상태가 안 좋아졌다면 시간을 더 투자해야 할지도 모르죠

시간의 이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밀리면 밀릴수록 시간을 많이 뺏기게 되죠."

 

잠시 빵모자를 만지작거리던 후안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제가 못 갚을 리는 없으니까요 근데..."

 

실브를 흘끔 쳐다본 후안이 입을 열었다.

 

"사기 치시는 건 아니겠죠?"

 

실브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걱정 마십시오 금액은 겪어보고 나서 받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언제 지불할지만 알려주시지요 그 기한을 넘으면 그때부터 이자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후안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다음 주에 지불하겠습니다. 그때도 시장에 올 일이 있거든요"

 

실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치를 보고 있던 비서가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보던 후안은 한 항목에서 잠시 시선을 멈추었다.

 

[금액을 변제하지 않을 경우 이자는 복리로 받으며 시간으로 계산한다는 항목이었다.]

 

'내가 못 갚을 리가 없지'

 

후안은 확신하며 흔쾌히 계약서에 사인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후안씨

그럼 당신에게 새로 생긴 하루를 모쪼록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둘은 악수를 나누었고 후안이 인사를 하며 사무실에서 나갔다.

 

사무실이 다시 적막해졌다.

창문으로 들어오던 오후의 햇빛이 점점 시들고 있었다.


계속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써 내려가던 비서는 잠시 펜을 멈추고 악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악마는 어느새 눈사람 같은 동글동글한 형태로 변해 소파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오늘 손님이 올 줄 알고 계셨나요?"

악마가 짓궂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

비서 역시 미소 지었다.
수첩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비서는 이태까지 시간을 빌렸던 
사람들의 말로가 별로 좋지 않았다는 걸 떠올리곤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어떤 일을 꾸미신 건가요?"

비서의 말에 뒹굴거리던 악마는 거꾸로 누운 형태로 멈춰 울상을 지었다.

"그렇게 말하면 억울한걸 
나는 단지 정직하게 시간을 사고팔았을 뿐이야 "

악마가 눈을 찡긋하자 보고 있던 비서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사무실에서 나온 후안은 혹시 몰라 몇 번이나 시장 상인들에게 오늘 날짜를 확인받았다.

 

오죽했으면 짜증을 내거나 재정신이 아닌 취급하는 상인까지 있을 정도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 돌아오며 

후안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오렌지를 샀던 것, 사무실에 방문했던 것, 

그리고 시장 상인에게 욕을 먹었던 것까지 떠올리자 후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상관없겠지 어차피 내일도 1일이니까 다른 사람들은 전부 기억을 잊어버릴 테고 말이야'

 

집에 돌아온 후안은 저녁을 대충 때우고 오늘 사온 오렌지를 바구니에서 꺼냈다.

위에 거는 상태가 괜찮았는데 밑에 깔려있던 오렌지 2개가 약간 물러진 상태였다.


"이딴 걸 2.5실렌이나 받다니"

투덜투덜 대며 후안이 오렌지를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새콤하고 단맛이 그의 입맛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이거 상당히 맛있군 내일도 사야겠어 대신 금액은 더 깎아야겠지만"

오렌지 2개를 단숨에 비워버린 후안은 침대에 누워 팔베개를 했다.
반복되는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생각하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었고 
후안의 입에선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몇 번이나 침대에서 뒤척이던 후안은 뒤늦게야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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