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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악마 (하루 5)
게시물ID : readers_356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낮에나온달
추천 : 1
조회수 : 28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4/20 21: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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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아니 꼴이 왜 그래요?"


후안의 처참한 모습에 제니가 깜짝 놀랐다.


"누가 경운기를 훔쳐 갈까 봐 불안해서 밖에서 밤을 지세워가지고... 

그보다 어제 약속한 경운기 좀 빌려 가도 될까요?"

 

제니는 후안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전에 지금 가족이랑 아침 식사 중인데 

같이 먹고 가시는 게 어때요? 따뜻한 수프도 있어요"


잠시 망설이던 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일을 끝내고 쉬고 싶었지만 몸이 녹초인데다 

제니가 권유하니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따뜻한 수프가 배에 들어가자 후안의 몸에도 활기가 돌았다. 

식사를 끝낸 후안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경운기를 빌려 다시 밭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경운기에 밧줄을 단단히 묶은 후안이 경운기의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새벽 추위로 인해 단단히 굳어버린 땅은 

경운기의 바퀴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결국 후안은 밧줄이 끊어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포기하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안은 집으로 돌아가 삽과 곡괭이를 챙겨들고 다시 밭으로 돌아왔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단단한 땅을 곡괭이로 내리치고 삽으로 퍼내며 

비탈길을 만들기 시작했고

온몸이 물먹은 솜 꼴이 되고 나서야 만족할만한 비탈길이 만들어졌다. 


겨우 경운기를 꺼낸 후안은 제니네에 경운기를 돌려주고 

자신의 경운기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만사가 귀찮았고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제대로 씻지도 않은 채 후안은 집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날 엊그제부터 무리한 피로는 감기몸살을 불러일으켰다. 

초여름이었지만 오한을 견디기 힘들었던 

후안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후안이 걱정됐던 제니가 

틈틈이 방문해 먹을 걸 갖다 주고 간병을 해준 것이었다.


지독한 여름 감기는 오랜만에 발견한 먹잇감을 끈덕지게 붙들고 늘어졌고

후안은 4일이나 고열에 시달리며 고통받다 겨우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후안은 일어나자마자 오랜만에 밭으로 향했다.

그동안 주인의 손길을 받지 못한 밭은 잡초가 무성히 자라나고 있었다.

다행히 제니가 가져다준 식량으로 며칠은 버틸 수 있었기에 

후안은 밭을 돌보기 시작했다.


어찌나 할 일이 많고 바쁜지 까맣게 어두워지고 나서도 

집으로 돌아가는 게 망설여질 지경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며 후안은 기묘한 느낌에 시달렸다.


이상하게 몸이 무거웠다.

감기의 후유증일 수도 있고 오랜만에 일을 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치기에도 피로랑은 다른 느낌이었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해봤지만 후안은 마땅한 걸 떠올릴 수가 없었다.


"뭘까?"


자신이 무언가를 잊고 있단 생각은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후안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버렸다.

지금은 엉망이 된 밭을 신경 써야 할 때였다.

 

그렇게 후안은 며칠 동안 알 수 없는 괴리감에 시달리며 

밭을 가꾸느라 바쁘게 보냈다.


밭도 안정이 되고 제니가 가져다준 식량도 다 떨어질 무렵이 돼서야 

후안은 시장을 가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문득 옷을 집어 들던 후안은 자신의 손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전에 없던 실주름들이 후안의 손에 생겨 있었다. 

원래 밭일을 하느라 투박한 손이긴 했지만 거친 거랑 다르게 늙어버린 것이었다.

후안은 황급히 집안에 방치된 거울을 찾았다.


20대 중반이었던 후안의 얼굴이 마치 40대의 얼굴처럼 변해있었다.

이마엔 굵직한 주름 몇 개가 자리 잡고 있었고 

눈가나 입가에도 실금 같은 잔주름이 생겨 있었다.


거기다 온통 검은색이었던 머리카락도 

드문드문 흰머리가 나 완전한 중년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노화에 충격을 받은 후안은

그제서야 자신이 시간을 빌렸다는 것과 실브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대신 연체될 모든 이자는 시간으로 받겠습니다.]


황급히 채비를 갖춘 후안은 경운기에 오토바이를 싣고 

도시를 방문해 허겁지겁 시간을 빌렸던 사무실로 찾아갔다.



"오랜만이군요 후안씨 대금을 갚으러 오셨습니까?"


처음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랑 다르게 실브가 자신을 반갑게 맞이했다.

비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 무언갈 기록하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요 내가 왜 이렇게 늙은 겁니까"


후안이 역정을 내질렀지만 실브는 여유 있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대답했다.

 

"당신이 안 갚은 시간의 이자가 늘어나서 그렇습니다. 

저는 단지 그만큼의 시간을 당신에게 뺏은 거뿐이죠"


실브는 그 섬섬옥수 같은 손으로 턱을 바쳤다.

투박한 데다 이제는 실주름까지 자리 잡은 후안의 손과 대비되는 손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실브는 책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서 오늘이 며칠이지?"


달력 쪽으로 시선을 돌린 비서가 대답했다.


"26일입니다." 


실브는 여유를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후안씨가 연체한 이자는 하루에 1시간 다음날은 2시간 그 다음날은 4시간

이런 식으로 배가 되어 늘어납니다. 저는 그만큼의 시간을 당신에게 뺏은 거뿐이고요"

 

"뭐 뭐 그 그런"

 

"계약서를 읽어보셨을 텐데요?"


후안은 당황스럽고 화가 났다.

하지만 시간을 조종하는 실브의 능력을 이미 맛본 터라 함부로 하기는 무서웠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화를 누그러트렸다. 


"그럼 내게 뺏은 시간을 돌려주시오 돈은 지불하겠소 

대략 17일 정도니 85글렌 정도겠군"


그러나 실브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모든 이자는 시간으로 받겠다고 했습니다.

시간을 되돌리는 건 시간을 빌려주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지요. 

원래 당신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무려 14년 정도의 세월이 필요하고 

그 정도면 금액이면..."


후안은 실브가 앞에 말한 두 자리만 듣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정도면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다 팔고 평생을 일해도 낼 수 없을 만큼 

턱없이 비싼 금액이었다.

 

사기꾼이라 소리치며 난동이라도 부리고 싶었지만

후안의 본능은 실브라는 남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했다.


후안은 계속해서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노력했고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겨우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후... 여기 있소 5글렌 이제 갚았으니 더 이상 내 시간을 뺏어가지 마시오"


"감사합니다. 변제 되었으니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실브의 말을 끝으로 후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사무실에서 나왔다.

후안이 빌린 하루가 14년이 되어 돌아온 셈이었다.

 


그 길로 후안은 바로 제니를 찾아갔다.

그리곤 제니를 불러내 

"당신은 나의 평생보다 가치 있는 여자요"

라는 말로 청혼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후안은 며칠을 더 고생했을지 모르고

그 정도면 실브에게 얼마큼의 시간을 뺏겼을지 예측도 가질 않는 시간이었다.


후안의 변해버린 모습과 갑작스러운 청혼에 제니는 당황스러워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며칠 후에 결혼했고 후안은 평생 단 1분도 허투루 쓰지 않은 채 

자신의 남은 인생을 성실히 보냈다.

 

 

후안이 떠난 사무실은 언제 소란이 있었냐는 듯 조용해졌다.

악마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눈사람 같은 모양으로 변해 소파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후안의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던 비서가 문득 궁금증이 생겨 악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번 일은 그동안의 일에 비해 약하네요?"


악마는 알듯 모를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 나는 단지 시간을 빌려줬을 뿐인걸"


악마가 눈을 찡긋하자 비서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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