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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의 가녀린 몸이 떨렸다. 그녀를 간호하는 남편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그저 미소를 짓고 있다.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방 안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또 놀라게 하고 말았군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놀라게 할 의도는 없었지만, 언제나 이 모양 이라서 말이죠.
저는 천사와 악마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를 매우 싫어합니다. 우주의 구조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요즘 들어 그런 쓸데없는 사고방식도 도움이 되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맞아요. 바로 이럴 때 말이죠. 제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당신은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도 완벽하게.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것은 제 모습 하나 밖에 없을 텐데 말이죠.
신기하지 않나요? 이건 분명 오감이 쇠퇴하면서 육감이 살아나기 때문일 겁니다. 아. 과학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컬트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고요. 그저 이 일을 오래하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는 직업병 같은 것일 뿐입니다.
아무튼 저는 이런 상황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 소모를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아마 제가 누구인지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굉장히 피곤한 일일 겁니다. 저를 포함해 당신에게도 말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문 밖으로 나가는 당신의 사랑스런 남편에게는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아직 강 저편에 발을 붙이고 있는 인간에게 저는 별로 필요 없는 존재니까요. 이건 오로지 당신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의 축복입니다.
축복이란 말이 이상하다고요? 그건 당신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저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당신이 아직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란 뜻이니까요. 그건 다시 말해 당신에겐 아직 사랑하는 이들의 축복을 받을 기회가 남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내장을 쏟아가며 차갑게 식어가는 군인들에 비하면, 축복이라는 말 외에 어떤 표현도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군요.
뭐, 세상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남들의 불행이 나의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요.
아, 좋은 질문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을 물어주셨군요. 이런 날카로운 질문을 받다니, 오랜만에 느끼는 즐거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여태 나이든 노인들만 만났더니, 스스로도 꽤 지친 것 같군요. 그나저나 어떻게 말해야 잘 전달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굳이 말하자면, 이정표 같은 역할입니다. 여태까지 많은 유명인사들을 안내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라면 역시 히틀러가 되겠군요.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궁금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의 여정은 길고도 머니까요. 아마 우리가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당신은 이 세계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모든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예수는 물론 부처와 마호매트의 이야기까지 말이지요.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을지도 몰라요.
이런. 잠시 작은 문제가 생겼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잠깐이면 되니까요. 이런 일 때문에 우리의 여정이 방해를 받지는 않을 겁니다. 어쩌면 당신에게는 오히려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군요. 말동무가 하나 늘었으니까요. 세상 사람들이 이 일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잠시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으면 됩니다. 남편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곧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요. 그저 지금은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으면 됩니다.
‘옆방에서 작은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여자의 남편이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띤 채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동시에 여자의 심장박동이 멈추었다. 사람들은 그가 어째서 웃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저 조용히 추측만 할 뿐이었다.’
폴 고갱, 죽음의 정령이 지켜본다.
에두아르 마네, 자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