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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아시아 최강이였던 일본의 검술
게시물ID : freeboard_19695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검극
추천 : 0
조회수 : 56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8/13 22:21:30

검술은 유래가 오래되어... 수십 번을 안과 밖을 뛰어넘는 것이 마치 금수(禽獸)와 같으며, 더러 늘 경쟁을 시켜 사심(死心)을 앞다투어 발휘케 하는데 칼을 휘둘러 서로 치며 반드시 죽이기를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칼을 휘두르는 사이에 칼등으로 칼날을 받아쳐서 결국 다치지는 않으니 그 교묘하게 피하는 기술과 능숙하게 부딪치는 기술은 완연히 백원(白猿)의 검법(劍法)이 있습니다. 근기(近技)는 신묘하여 사람마다 검객이 아닌 자가 없고 기계의 정밀함도 다 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들이 믿는 것은 장검(長劍)과 철환(鐵丸)인데 철환은 비가 내리듯이 쏟아지고 칼은 숲이 서 있는 것과 같으나, 총을 쓰는 것은 칼을 쓰는 것에 비해 자못 뒤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칼을 가진 자는 천백이고 총을 가진 자는 수십 명이니, 이는 그들의 전술이 근전(近戰)에는 빠르고 원전(遠戰)에는 느립니다. 이런 까닭으로 육전(陸戰)은 좋아하나 수전(水戰)을 싫어합니다.
정탁 『약포집』 1593년 8월 15일 명나라 유생 호환에게 보낸 편지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184A_0030_010_0010

비망기로 일렀다. "우리 나라 습속은 남의 나라의 기예를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더러는 도리어 비굴하게 여긴다. 왜인의 검술은 대적할 자가 없다. 전일 항왜(降倭) 다수가 나왔을 때 그 중에 검술이 극히 묘한 자가 많이 있었으므로 적합한 자를 뽑아 장수로 정하여 교습시키도록 별도로 한 대열을 만들라고 전교를 하기도 하고 친교를 하기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끝내 실시하지 않고 그 항왜들을 모두 흩어 보냈다. 원수의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고 있는데 시속의 습관이 이와 같으니 가탄할 일이다. 지금 이판(吏判)이 도감에 있으니 족히 그 일을 할 만하다. 별도로 한 장수를 뽑고 아이들 약간 명을 선택하여 한 대열을 만들어서 왜인의 검술을 익히되 주야로 권장하여 그 묘법을 완전히 터득한다면, 이는 적국의 기예가 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인데, 어찌 유익하지 않겠는가? 훈련 도감에 이르라."
『선조실록』 1594년 12월 27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12027_005

원에 전교하였다. "아동을 뽑아서 왜인의 검술을 익히게 할 것을 전일에 전교했었다. 경상 감사가 있는 곳에 왜장(倭將)이라고 칭하는 투항 왜인이 있는데, 그 왜인의 능숙한 검술 솜씨는 졸왜(卒倭)에 비할 바가 아니라 한다. 그 왜인을 속히 상경시켜서 직책을 부여하고 후하게 대우하여 그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선조실록』 1595년 1월 24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801024_002
왜노(倭奴)들은 전투시에 멀리 있으면 총을 쏘아 잘 맞히고 가까이 있으면 칼을 뽑아 돌진하니 이 때문에 천하에 그 칼끝을 당할 자가 없었다. (중략) 그래서 척 장군이 왜를 방어함에 있어 총으로 총을 대적하고 검으로 검을 대적하도록 하였으나 여전히 우리의 검이 왜적의 장기(長技)를 대적하기에는 부족함을 걱정하여 반드시 낭선(筅)과 창(槍)으로 방패(牌)와 칼(刀)을 옹호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척 장군의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백승(百戰百勝)인 것이다. 그러나 왜검도 검이고 우리 검도 검이다. 우리 군사들로 하여금 검법의 묘를 다할 수 있게 한다면 번거롭게 낭선과 창을 쓰지 않더라도 그들의 검을 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무예제보번역속집』 발문
https://i.imgur.com/WsA67Bg.jpg
왜적은 실로 상대하기가 어려우니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왜적은 철환(鐵丸)을 비 오듯 퍼붓는데 한번 맞기만 하면 곧바로 쓰러지고 근접해서는 칼을 사용하는데 그 검술이 지극히 기이하니 이들은 참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라고 하겠다.
『포저집』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321A_0230_010_0080

오랑캐(후금) 군사는 돌격전을 벌여 마구 덤비는(馳突亂戰) 데만 능할 뿐이고 예리한 검을 활용하는(銳利劍之妙用) 데는 도저히 왜놈만 못하다. 더구나 왜놈의 변사(變詐)와 흉계란 실로 추측할 수 없었지만 그 예리한 장검도 우리의 굳센 화살을 못 당했고 그 변사와 흉계도 우리의 임기응변 앞에는 소용이 없었다. 다만 인심이 해이하여 힘껏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왜놈에게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속잡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33A_0020_000_0060

병조가 아뢰기를, "어느 전투이건 간에 승부는 모두 단병(短兵)으로 육박전을 벌이는 데에서 결판이 납니다. 그래서 사자(射者)·창자(槍者)·총자(銃者)·기자(騎者)가 모두 칼을 차고 있는데, 칼을 차고서도 그 기술을 모른다면 되겠습니까. 절강병(浙江兵), 왜병 그리고 호병을 보면 모두 검법을 알고 있는데, 육박전을 벌일 즈음에 네 가지 기예가 모두 쓸모 없어지게 되면 반드시 차고 있는 칼을 가지고 사생을 결단하려 덤빕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군령이 엄하지 못하여 접전해 볼 겨를도 없이 먼저 저절로 무너져버리고 말았으니, 검술이 전진(戰陣)에 그다지 관계가 없다고 여기게 된 것도 진정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선조(宣祖)께서는 그런 점을 아셨기 때문에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 및 선전관들 모두에게 검술을 익히게 하고 그 성적을 고과하여 상과 벌을 내렸으므로 그 당시의 연소한 무인들은 모두 용병(用兵)하는 법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군(諸軍)이 검법을 모를 뿐만이 아니라 칼을 차고 다니는 자도 적고, 각 고을에서 군기(軍器)를 월과(月課) 할 때에도 조총만 비치해 놓았을 뿐 창이나 칼은 폐지하고 만들지 않으니, 지극히 애석한 일입니다."
『인조실록』 1628년 9월 29일 병조가 진법과 군졸의 기예에 대해 아뢰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609029_003

병조가 아뢰기를, "칼을 잘 쓰는 것이 단병전(短兵戰)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일본과 절강(浙江)은 이것으로써 천하의 강병(强兵)을 만들었습니다. 선조조(宣祖朝)에는 당상들도 숙달시켰는데, 이는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조실록』 1630년 1월 6일 병조가 군관들이 칼을 잘 쓰도록 과정을 정해 시험보는 방안을 세울 것을 아뢰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801006_001

산 위로 올라가 진을 치고 있는 것이 수만 명이 되니, 모든 군사들이 보고는 겁을 냈으나, 이미 칼을 빼들고 접전해 와서 갑자기 헤어날 수가 없었다. 이때 제독이 인솔하던 군사는 모두 북방의 기마병으로 화기가 없고, 짧고 무딘 칼을 가지고 있었다. 적의 보병들은 모두 3, 4척이나 되는 긴 칼을 가졌는데 날카롭기가 비길 데 없었다. 그들과 충돌하여 싸울 적에 좌우로 후려치니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져 그들의 예봉을 감당할 자가 없었다.
『서애집』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224B_0170_010_0010

赫然曰, 劍術, 天下皆有之, 日本爲最, 我國獨無傳習之人, 心常慨然也。臣欲送一人於東萊, 使之傳習, 府使李瑞雨處, 以劍術可學與否, 觀勢相通之意, 言送矣, 今見其所答, 則以爲似有可傳之路云。臣管下, 有一可學之人, 下送此人, 學劍, 何如? 上曰, 送之, 好矣。
훈련대장 유혁연이 말하기를, "검술은 천하 어디에도 있지만 일본 것이 최고입니다. 우리나라 홀로 전하고 익히는 자가 없어 신의 마음이 항상 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중략) 신의 아랫사람 중에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을 보내 검을 배우게 하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이 말하기를, "보내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숙종 5년(1679) 7월 27일
http://sjw.history.go.kr/id/SJW-D05070270-02100

그들의 무기는 칼과 총을 제일로 친다. 칼을 찬 자는 반드시 길고 짧은 두 개의 칼을 차서 긴 것은 치거나 찌를 때 사용하고, 짧은 것은 던져서 남이 뜻하지 않는 사이에 맞히면 당장 죽지 않는 자가 없다.
『해유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79A_0030_040_0010

강 위에 왕래하는 자들이 혹 한둘 혹 서넛이 큰 칼을 메고 작은 칼을 끼고 있는데 햇빛이 내리쏘아 빛나는 번개와 같았다. ... 칼날은 매우 예리하고 알몸으로 나가 싸우며 쌍도(雙刀)를 잘 쓴다. 재빠르게 몸을 날려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기며 보전(步戰)에 능하고 수전(水戰)에 겁을 먹는다. 칼을 쓰고 총을 쏘는 데는 정밀하나 활과 창을 사용하는 데 서투르며, 진영을 겁박(劫迫)하고 복병을 설치하면 중국인도 그 꾀에 빠진다.
『재조번방지』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35A_0010_000_0010

칼을 쓰는 묘리는 왜인들이 최고이다. 그러므로 일향수(日向守) 애주이향(愛洲移香)은 "꿈에 신(神)이 원숭이 모양으로 나타나 칼쓰는 비결을 가르쳐 주었는데, 이름을 음류(陰流)라고 한다." 하였다. 우리나라 군교(軍校)인 김체건이 일찍이 사신을 따라 일본에 들어갔다가 그 방법을 배워 와서 지금까지 유전하니, 이른바 왜도(倭刀)라는 검술이다.
『병학지남연의』
https://i.imgur.com/O8YLZUY.jpg

대개 우리나라 사람들은 글 읽는 자는 공허한 것만 따르고 명물(名物)에는 소략하며, 기계를 만드는 자는 견문(見聞)에만 빠지고 도수(度數)에는 어두워서 백예(百藝)가 폐이(廢弛)되어도 옛것을 본받으려 하지 않으니 비록 충지(忠智)하고 강력한 신하가 있을지라도 빈손을 들고 준마를 달려가본들 무슨 일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
백공(百工)의 일은 대저 다 성인의 지혜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기계를 보면 옛것일수록 더욱 교묘합니다. 그리고 옛날의 명장(名將)들은 다 교묘한 생각이 있었으므로 사기(史記)에 일컫기를 ‘제갈양(諸葛亮)의 통수개(筩袖鎧)는 오석뢰(五石弩)로 쏘아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였고, 도목(都穆)이 한(漢) 나라 창(槍)의 정교함을 평하여 ‘예나 이제나 한 가지 기계를 만들어도 일찍이 구차한 것이 없다.’고 감탄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방(地方)이 수천 리에 산과 바다의 이로움을 의지했으니 땅이 부족하지도 않으며, 왜인(倭人)들이 진주(晉州)의 철(鐵)을 사다가 달구어 보도(寶刀)를 만들고 가서(哥舒)의 2년생 나무를 북사(北使)가 얻으매 보배로 삼으니, 병기의 재료도 달리 구할 것이 없습니다.
낙상지(駱尙志)가 말하기를, “한 사람으로 열 사람을 가르치며 열 사람으로 백 사람을 가르치면 수년 안에 정병 수만(數萬)을 얻을 수 있다.” 하였으니, 백성이 옛날의 백성과 다르지 않은데 진실로 백공(百工)을 감독하여 그 병기를 만들고, 좋은 스승을 모집하여 그 기예를 익히게 하고, 무릇 장수(將帥)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무기를 가진 무리들이 다 도(圖)를 보고 보(譜)를 참고하여 그 방술을 통하고 그 용법을 찾을 수 있게 되면, 전승(全勝)을 싸우기 전에 책정하고 큰 공을 무궁한 데에 드리울 수 있으며, 나라에는 정간(楨幹)의 인재가 풍부할 것이며 가정에는 간성(干城)의 노래가 울려퍼질 것입니다.
저 사자가 공(毬)을 희롱할 때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자빠지고 엎어지면서 온종일 쉬지 않습니다. 그 사자가 코끼리를 치고 토끼를 잡을 때에 미쳐 전력(專力)을 쓸 수 있는 것은 공놀이에서 얻어진 기술이며, 왜인(倭人)들이 한가하게 있을 때에 앞에다 짚베개(藁枕)를 만들어 놓고 손에는 나무로 만든 칼(木刀)을 쥐고 한만(閒漫)히 그 짚베개를 치면서 그 자세를 연습하는데 그들의 기예가 어찌 신묘하지 않겠습니까?
『청장관전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부진설(附進說)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577A_0270_010_0020

당시 일본과 직접 싸운 조선도 일본의 칼의 용도에 따라서 여러 종류의 칼들을 차고 다니고 검술실력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이라고 호평함. 
그리고 당시 조선이 싸워서 승리했던 진주성 전투나, 이치전투, 행주전투같은 전투들도 보통 성벽을 끼고 싸우거나 아니면 유리한 고지에서 미리 방어시설을 갖춘 다음에 싸우는 등 지형빨을 많이 이용했고 특히 당시 조선은 방어하는데 탁월한 고화력 무기인 각종 총통이나,비격진천뢰 그밖에 신기전등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행주전투는 유리한 고지에서 각종 총통이나, 신기전으로 도배를 해서 싸워 이겼으니 사실상 무기빨에 지형빨로 승리한 것이고. (사실 조총같은 경우도 때당시 조총은 시대적인 한계로 그때당시 기계기술이 굉장히 조잡해서 숙련된 병사가 장전하는데도 시간이 한참 걸렸고(삼단 사격으로 어느정도 극복은 가능하지만 일단 조총자체가 워낙 장전시간이 걸리니 기술적인 한계로 그런 전법들로만으로는 완전히 커버가 안되었고) 거기다가 당시 날씨에도 영향을 받아서 습도가 높으면 고장나기 일수인데다가 기본적으로 불을 붙여서 발사하는 구조다 보니 바람불거나 비오면 그냥 쓰지도 못하고 거기다가 조총이 대포보다 기본적인 사거리도 훨씬 짧을 뿐더라 파괴력도 약하고(특히 조총은 사거리가 겨우 100m인 반면 조선의 천자총통 같은 경우는 사거리가 무려 1.4km에 달하고)거기다가 총알도 직선으로 날아가서 활처럼 곡사도 불가능하고 거기다가 당시 장전을 할때 화약가루를 넣어야 하기 때문에 여러명이 한번 쏘고나면 연기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서 그 이후에는 제대로 장전하거나 조준하기도 어려웠는게 현실 즉 조선이 일본에게 가장 털렸던 이유는 창술이나, 검술같은 기본 실력 자체가 일본에게 안되었기 때문임.) 오히려 사실 무기는 조선수군의 판옥선부터 시작해서 고 화력 성능을 발휘하는 승자총통,천차총통, 비격진천뢰, 신기전등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이 오히려 무기빨은 더 좋았고.
그리고 명나라의 척계광 역시 왜구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왜구들의 검술을 연구한 끝에 원앙진법이라는 새로운 전법까지 만들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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