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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맛집 기행_ 반고개 무침회의 역사(펌)
게시물ID : cook_15233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탑기어
추천 : 4
조회수 : 128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5/25 20:33:25

반고개 무침회골목중 제가 항상 가는곳의 사진입니다.

중독성 최고, 서울서 가끔 생각나서 대구올일 있으면 꼭 먹는 메뉴입니다.

채소를 무쳐놔도 물이 안나오는게 비법이라함
고춧가루와 사이다 빙초산 사과식초,콩가루혹은 미숫가루가 들어가는것 같긴 한데 ㅎㅎ

다음 블로거
도문대작님글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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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0년대 반고개는 달동네였습니다.
그런 달동네가 어찌하야 경상도를 대표하는 무침회골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그럼 어디 한번 세월따라 맛따라 시간여행을 해 볼까요. 
때는 바야흐로 격동의 60년대
옛 구남여상 인근에 일명 화끈할매라 불리는 여주인이 꾸려가는 허름한 실비집이 있었으니 그 이름하야 '진주식당'
닥치는데로 파는 분식스타일의 실비집이라 술한잔 하러 오는 손님에게는 마땅히 내어줄 안주가 없었더라.
화끈할매 고민에 고민을 고듭하다 경상도 일대에서 잔치집에 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무침회에 주목하게 된다.
할머니 특유의 화끈한 성격으로 매콤하고 새콤한 무침회를 개발하여 떡볶이에 소주한잔 기울이는 주당들에게 내놓으니
집에서 어머니가 무쳐주시는 무침회의 향수가 퍼지며 그 맛이 가히 일품이더라.
소문은 곧장 근처의 공단 일꾼들에게 퍼지고 마땅히 갈 곳 없어하던 그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진주식당을 드나드니
단골은 단골을 만들고 문턱은 문턱데로 달아가더라.
시간은 흘러 70년대초 진주식당의 수많은 단골 중 전라도 광주 출신의 한기석씨가 있었다.
한씨는 거의 매일 진주식당에 와서 화끈할매의 무침회를 맛보다 마침내는 아예 진을 쳐가며 그 비법을 배우니
3년여의 집념과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일까
70년대 중반 반고개 무침회골목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 쏘아지니 
한씨는 파산한 옛 메리야스 공장부지에 무침회 전문식당인 호남식당을 차리게 되는 것이다.
호남식당의 무침회가 맛있다는 소문이 돌자 하나둘 손님들이 늘어나고
호남식당이 잘되니 근처의 식당들도 메뉴에 슬그머니 무침회를 넣더라
이리하야 진주식당의 화끈할매에서 시작된 무침회가 한씨로 인해 반고개 무침회골목의 초석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한씨는 3년정도 영업을 하다 장하현씨에게 가게를 넘기고 홀연히 사라지니
석양의 무법자처럼 홀연히 나타나 홀연히 사라져 이후로 한씨의 소문을 들은자 아무도 없었더라
이 무렵 진주식당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니
후세의 사람들은 화끈할매와 한기석씨를 전설로만 기억할뿐이다.
전설이 떠나간 자리 호남식당을 이어받은 장씨는 3여년간 호남식당을 이어오다 청천벽력 같은 시련이 다가오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80년대 초 온 나라를 강타한 비브리오 파동이 바로 그것이다.
장씨는 비브리오 앞에 황량해지는 골목을 지키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동생 장창현씨에게 가게를 넘겨주니 동생 장씨는 팔달시장에서의 횟집 경험을 바탕으로
무침회 붐이 다시 일어날 것을 확신하고 버티기 모드로 돌입한다.
잠시의 세월이 흐르고 역시나 장씨의 예감대로 무침회를 찾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자
84년 호남식당을 팔고 현재의 구호남식당으로 이전 계속 성업 중이다.
IMF당시까지 20여곳이 넘게 성업하다 지금은 13여곳이 반고개 무침회골목을 지키고 있다. 
절대고수가 떠나간 자리 21세기에 접어 들어 적통 싸움이 치열했던 곳
찬바람이 살을 애는 늦은 겨울밤 사내 셋이 골목으로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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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도문대작 블로거님 글 인용 이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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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문대작 블로거님 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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