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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현상의 역설들/ 진중권
게시물ID : sisa_1525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adiajun
추천 : 3/5
조회수 : 358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1/12/23 20:21:37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1/12/23/6607366.html?cloc=olink%7Carticle%7Cdefault

안철수 현상의 역설들

‘올해의 인물’이 아니라 차라리 ‘내년의 인물’이라 해야 할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안철수는 전혀 정치적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서울시장 출마선언과 더불어 갑자기 한국정치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가 출마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시장이 되어 있을 게다. 하지만 압도적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그는 박원순 후보에게 자리를 양보했고, 이 시민운동의 대명사는 아름다운 양보에 멋진 승리로 보답했다.

가장 비정치적인 인물이 외려 가장 정치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는 흥미로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역설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유력한 후보의 자리를 턱 없이 낮은 지지율을 가진 후보에게 양보했고, 그 행동을 통해 박근혜 대세론을 무너뜨리며 일거에 유력한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 그에 대한 열광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지금, 여론조사에서 그는 여전히 박근혜 후보에게 10% 포인트 정도 앞서고 있다.

흔히 김영삼, 김대중을 “정치 9단“이라 부르나, 안철수의 행보는 이 노회한 이들의 계산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정치적으론 어리숙해 보이는 그에게서 어떻게 그런 묘수가 나올 수 있었을까? 아마 안철수는 자신의 후보 사퇴가 가져올 효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사퇴는 그야말로 아무 계산이 없는 순수한 희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수함이 정치9단의 노회함을 뛰어넘는 정치적 효과를 낳았다.

꼰대와 멘토 

안철수 현상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정치 패러다임의 변화다. 한국은 이미 산업화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변모했다. 하지만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낡은 산업사회의 삽질 경제 리더십. ‘CEO 대통령’을 자처하는 그 분은 사실 공사판 현장감독에 가깝다. 이를 시대착오라고 느끼는 대중은 정보화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영웅을 원한다. 그리고 그 영웅을 IT산업에서 배출된 디지털 유형의 CEO에서 찾았다.

‘롤 모델‘이라는 말이 있다. 이념의 시대에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롤 모델이 사회주의적 ’전사’였다면, 탈이념의 시대에 젊은이들의 롤 모델은 자본주의적 영웅이다. 안철수는 IT 분야에서 성공한 CEO이고, 그와 단짝을 이루는 시골의사 박경철은 주식투자의 전문가다. 한 마디로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삶의 목표는 곧 안철수 혹은 박경철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이들을 존경하며 그들의 형상을 닮으려 한다.

취업난의 시대에 가장 불안과 절망을 느끼는 것은 젊은 세대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고민을 들어줄 사람을 원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베스트셀러의 제목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고민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낡은 산업사회의 ‘꼰대’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아이들은 에어컨 바람 쐬며 일하려고만 한다.” 이와 달리 안철수는 젊은이들에게 귀를 기울이며 기꺼이 그들의 ‘멘토’가 되어 준다.

복지에서 시장개혁으로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메시지는 나쁘게 보면 허무한 위로의 제스처에 불과하다. 철수는 다르다. 그는 지금 젊은이들이 겪는 고통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짚어주며, 추상적으로나마 문제의 해결방향을 지시한다. 대기업 위주의 경제 그 속에서는 거대기업의 횡포로 인해 중소기업이 발전할 수가 없다. 하지만 고용의 대부분을 창출하는 것은 중소기업. 이러니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있겠는가?

현 정권은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펼쳤다. 덕분에 대기업들은 하나 같이 잘 나가고 있으나, 현 정권이 약속했던 떡고물(이른바 ‘낙수효과’)은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떡을 먹으면서 고물 하나 안 흘리나?” 성장에 대한 기대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희망을 걸었으나, 성장도 제대로 안 되고, 성장이 고용으로 이어지지도 않는,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 찾아 왔다. 그럼 이제 방향 전환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성장정책에서 비롯된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저마다 ‘복지’를 떠든다. 복지를 늘리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나, 그보다 시급한 것은 시장개혁, 즉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안철수가 던지는 메시지다. 이는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문제다. 안철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시장주의자, 이 사회에서 보기 드문 상식적 보수주의자다.

대안정당이냐 정당대안이냐 

역설은 그의 보수적 메시지가 이 사회에선 졸지에 급진적 목소리가 된다는 것. 시장개혁을 하려면 대기업에 칼을 대야 하는데, 그 일을 누가 맡겠는가? 대기업이라는 고양이 앞에서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은 그저 겁먹은 쥐에 불과하다.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에 대한 대중의 혐오는 그저 그들이 보여주는 구태에 대한 불신이 아니다. 두 정당이 결코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주제가 못 된다는, 근원적 절망이다.

일찍이 진보정당은 그 절망에서 만들어졌으나, 그들은 제 존재의 의의를 증명하는 데에 실패했다. 한때는 그들도 참신하여 10석의 의석과 14%의 지지율을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산업혁명시대의 이념을 정체성으로 가진 진보정당은 정보화 사회 속에서 유의미한 정보를 산출하지 못했다. 그것은 대중에게 접근할 적합한 소통(채널)의 문제 이전에 그들에게 던질 메시지(콘텐츠) 자체의 한계다.

한때 안철수를 중심으로 한 대안정당(“제3정당”) 얘기가 떠돌았으나, 안철수 자신이 부정함으로써 논의는 짧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안철수는 ‘대안의 정당’이 아니라, ‘정당의 대안’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당 없이 통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현실정치의 맥락에서 안철수는 아직 신기루에 불과하다. 정치를 하려 한다면, 그 역시 어떤 식으로든 정당과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역설 

제대로 된 보수가 없고, 진보마저 ‘대안’이 못 되는 상황에서 ‘정당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안철수라는 이름의 상식적 보수다. 그는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환원했다. 이 역시 대중이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보고 싶어 했으나, 그들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보수의 미덕(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주’)이다. ‘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하고, 정당하게 획득한 재산을 정의롭게 환원한다.’ 이처럼 비정치적이면서 고도로 정치적인 메시지가 또 있을까?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은 안철수를 즐겨 ‘또 다른 이명박’이라 부른다. 그들의 말대로 안철수 열풍은 디지털 버전으로 진화한 이명박 신화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안철수의 ‘상식’은 그 어떤 진보적 구호보다 급진적이다. ‘시장의 개혁.’ 거기에는 엄청난 저항과 반발이 따르지 않겠는가? 물론 그가 이 일을 제대로 해낼 것이라 믿기는 힘들다. 하지만 보수주의자의 관점에서 적어도 그는 ‘시대정신’을 제대로 짚었다.

안철수가 진보적이지 않다는 진보주의자들의 지적은 옳다. ‘분배’의 정의로움이 아니라 ‘시장’의 공정함을 요구하며 재산을 ‘기부’하는 것. 이는 철저히 보수주의의 스탠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그것은 보수의 승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엉터리 보수가 미덕과 가치를 가진 합리적 보수로 변모하는 것. 한국 사회에서 그처럼 커다란 진보가 또 있을까? 이것이 안철수 현상의 마지막 역설이다.

진중권(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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