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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전진 이야기 - 첫번째
게시물ID : history_1529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10/6
조회수 : 986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4/04/10 17:33:01

전진을 세운 일파는 오호(五胡) 중에서도 저족(低族)이라고 불리는 일족입니다. 저족은 기원전 2세기경부터 청해(靑海)를 중심으로 현재의 감숙성과 섬서성 남서부를 거쳐 사천성에 살고 있던 티벳*미얀마어계 일족입니다. 초창기에 이들은 이웃인 강족(羌族)들 처럼 유목생활을 하였지만 점점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농경생활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이들 저족은 전한(前漢) 시대에 이르러서는 농업이 그들 산업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전한 무제 시대의 무도군(武都郡) 설치 등의 정책에 의해서 농서(隴西), 남안(南安), 천수(天水), 약양(略陽), 무도(武都), 음평(陰平) 등의 위수(渭水) 상류 일대의 군(郡)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후한(後漢) 시대에 이르러서는 정부는 강족에 대해 실행했던 것과 같은 대규모 정복과 강제 이주는 시행하지 않고 보호정책을 채택하였기 때문에 양자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습니다.

 

 

한동안 조용히 살던 그들에게도 폭풍우가 밀려오는데 그것은 바로 후한 말기의 대 혼란이었습니다. 저족 주변의 여러 세력들은 저족을 인적*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이 와중에 저족에서도 그동안 없었던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214년 아귀(阿貴)와 천만(千萬)은 군웅의 한 명인 마초(馬超)와 연합하여 조조에게 대항하였습니다. 이것에 대해 조조는 하후연(夏候淵)에게 저족을 정벌하게 하고 또 강제 이주를 실행하였습니다. 조조의 이러한 정책으로 국경지대의 저족들의 상당수가 관중과 천수 등으로 유입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조는 오두미도(五斗米道) 세력 하의 저족도 관중으로 유입시켰습니다. 한편 촉(蜀)은 229년에 무도와 음평을 점령하고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저족들을 정권 내부로 편입시켰습니다. 조조와 촉의 정책으로 인해 저족은 두 개의 세력으로 찢어지는데 촉의 세력 하에 들어간 저족은 훗날 성한(成漢)을 세우고 조위(曺魏)의 세력 하로 이주한 저족들은 전진(前秦) 등 그 밖의 나라들을 세웁니다.

 

 

이들 저족들 중에서 촉땅, 즉 현재의 사천성 방면에 있던 저족들은 파(巴)라든지 종(賨)이라는 명칭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성한국을 세운 이웅(李雄)은 종인(賨人)이었다고 합니다. 이들 저(低)*파(巴)*종(賨)은 '늠군'[1]이라고 하는 선조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전설도 있습니다. 저족은 서남이(西南夷)의 범주에 속하는 만족과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실제로 저족은 판순만(板揗蠻)이라고 불리는 만족등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1] 늠군은 파족(巴族)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전설상의 인물입니다. 전설상의 늠군은 복희(伏犧 또는 복희宓犧, 포희包犧)의 후손입니다. 이 늠군에 대한 전설은 이러합니다. 

 

고대에 서남방에서 강대한 세력을 떨쳤던 파(巴) 민족도 있다. 옛날에 무락종리산(武落鍾離山)이라는 큰산이 무너지자 석굴 두 개가 생겼는데 하나는 붉기가 주사(朱砂) 같았고 하나는 검기가 옻칠 같았다.

붉은 석굴에서 태어난 사람은 이름을 무상(務相)이라 하고 성을 파씨(巴氏)라 했다. 검은 석굴에서도 역씨(譯氏) 번씨(樊氏) 백씨(柏氏) 정씨(鄭氏)의 네 성(姓) 사람이 태어나 모두 다섯 성씨가 패권을 겨루었다. 그리하여 석굴을 칼로 찔러 들어가는 사람을 임금으로 삼기로 했는데 네 사람의 칼이 모두 떨어졌으나 무상의 칼만 붙어 있었다.

다음에는 흙으로 만든 배를 물 위에 띄워 그 배가 떠 있으면 임금으로 삼기로 했는데 무상의 배만 떠 있었다. 마침내 그가 파족의 말로 임금을 뜻하는 늠군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늠군은 그 흙배에 무리를 태우고 이수(夷水)를 따라 내려가다 염양(鹽陽)에 이르렀다.

염양의 여신이 늠군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이곳은 물고기와 소금이 풍부하고 땅도 넓으니 나와 함께 살고 가지 마옵소서”라고 하였다. 늠군이 대답하기를 “나는 임금이 된 이상 땅을 구해야 하오. 머무를 수가 없소이다”라고 하였다.

여신은 매일밤 늠군과 함께 자고 아침이면 날벌레로 변하였는데 다른 신들도 함께 변하여 해를 가릴 정도였다. 늠군은 떠나고자 해도 방향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열흘이 지난 후 늠군은 푸른 실을 여신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몸에 두르면 함께 살고 그렇지 않으면 떠날 것이오.” 여신은 그것을 받고 몸에 둘렀다. 늠군이 바위 위에 서서 푸른 실이 있는 날벌레를 찾아 활로 쏘니 여신의 몸에 적중하였다. 여신이 죽자 모든 날벌레들이 흩어지고 하늘이 밝아졌다. 늠군은 다시 흙배를 타고 강을 내려가 이성(夷城)에 이르렀다.

이성은 지형이 좁고 구불구불하였다. 늠군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동굴에서 나와 지금 또 다시 이런 곳에 들어왔으니 이 일을 어찌할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양쪽 기슭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넓어졌다. 그곳에성을 건설하고 살게 되니 이후 종족이 번성하였다.

 

 

 

※ 출처 :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오호십육국(삼기양장), 위진남북조사(이공범), 위키백과

한국일보 [동양의 신화] (7) 「동방 서방 북방의 신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0140769)

한국일보 [동양의 신화] (20) 「소수민족 시조의 탄생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8&aid=0000152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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