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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전진 이야기 - 두번째
게시물ID : history_153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8/6
조회수 : 41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4/11 16:57:51

조조로 인해서 관중에 거주하고 있던 저족들 중 악양(略陽)에 거주하고 있던 포씨(蒲氏)의 포홍(蒲洪)은 「영가의 난」[1] 시기를 이용해서 저족들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포홍은 위수 상류에 독립적인 세력을 만들었지만 저족이 완전히 독립하기에 그들의 세력은 너무 미약하였습니다. 그의 세력은 318년에 전조(前趙)에 복속하였습니다. 그러다가 329년에 후조(後趙)의 석호는 전조를 멸망시키면서 지금의 섬서성에 거주하고 있던 저족과 강족(羌族)을 도읍인 업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하남성 북부로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포홍은 후조 정권 하에서 관중(關中)의 호족(豪族)과 강족 대책 등에 관여하였고, 석호가 즉위하면서 그는 용양장군(龍驤將軍) 유인도독(誘人都督)으로써 부락민을 거느리고 방두(枋頭)에 주둔하였습니다. 하지만 349년 2월, 석호 사후 후조가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후조 붕괴 시기에 포홍은 한때 동진(東晉)에 복속하기도 하면서 동진으로부터 정북대장군(征北大將軍) 도독하북제군사(都督河北諸軍事) 기주자사(冀州刺史) 광주군공(廣州郡公)이라는 관직과 작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음해인 350년 2월에 방두에서 스스로 대장군(大將軍) 대선우(大單于) 삼진왕(三秦王)이라고 일컬으며 스스로 자립했습니다. 이 때 그의 세력은 10만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포홍은 자신의 성씨를 부씨(氏)로 바꾸고 장안(長安)으로의 복귀를 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같은 해 3월 옛 석호의 부하였다가 당시에는 부홍의 지배 하에서 저족의 자립을 도모하던 마추(麻秋)에게 독살당했습니다.

 

 

부홍의 사망 이후 셋째 아들인 부건(符健)이 그의 지위를 계승하였습니다. 부건은 삼진왕을 폐지하여 동진에 복속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는 한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꾀하였던 장안 복귀를 시작합니다. 당시 장안에는 관중의 호족(豪族)이었던 두홍(杜洪)이 동진의 옹주자사(雍州刺史)를 일컬으며 사실상 자립하고 있었습니다. 부건은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장안의 두홍을 격파하고 351년 1월 장안에서 천왕(天王) 대선우(大單于)로 즉위하고 황시(皇始)로 연호를 정했습니다. 이것이 전진의 건국이었습니다.

 

 

부건은 다음해인 352년 1월에 황제로 즉위하고 대선우의 지위를 부장(符萇)에게 주었습니다. 이렇게 나라를 건국하고 황제를 칭했지만 당시 전진의 영역은 위수(渭水) 유역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354년에는 동진의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이 강릉을 출발하여 동남쪽에서 관중에 침입하였습니다. 환온의 침공에 전진은 관중 한족들의 배반과 대선우인 부장을 잃는 등 고전했지만 그런대로 환온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동진의 침공을 잘 막은 전진은 이후 관중 전역으로 세력을 확대시키고 지배 체제 확립을 시작합니다. 이 시기 부건은 관중의 경제력을 단기간에 회복하기 위해서 풍양(豊洋)에 관시(關市)를 설치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며 국내 상업을 융성시키면서 동진과의 통상 활동을 실행하여 국고를 충실히 하는데 힘썼습니다. 또 덕망 있는 노인을 우대하고 유학을 존중하는 등 한문화 향상을 도모하고 효렴(孝廉)*수재(秀才) 등의 선거를 통해서 인재를 기용하였습니다.

 

 

355년 6월 부건이 사망하고 셋째 아들인 부생(符生)이 황제로 즉위하였습니다. 부생은 356년 2월에 전량(前凉)을 복속시키고 다음해인 357년 5월에는 관중으로의 이동을 도모했고 정양(定陽)과 북지(北地)의 강족을 규합한 요양(姚襄)과 싸워서 패배시키고 그의 동생인 요장(姚萇)과 요씨(符氏) 집단을 복속시켰습니다. 하지만 부생은 성격과 행동이 잔인[2]했기 때문에 민심이 멀어지고 종형제(從兄弟)인 부견(符堅)이 쿠데타로 357년 6월에 사망하였습니다.

 

 

[1] 서진 말기 회제(懐帝)인 사마치(司馬熾) 영가(永嘉 307년~312년) 연간에 발생한 대규모 이민족의 반란을 말합니다. 


[2] 부생이 어렸을 적에 그는 할어비지인 부홍에게 욕을 하여 채찍질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이 채찍을 맞는 와중에서 부생은 「나의 성격은 칼*창에나 맞지. 채찍은 맞지 않는다. 죽일 테면 죽여라. 채찍으로 사람을 때려 뭣하려는 거야.」라며 대들었다고 합니다. 부홍은 뒤에 서있던 아들 부건을 향해, 이런 아이는 가문을 위할 놈이 아니니 죽이는 편이 좋다고 권하였습니다. 그러자 부건의 동생이자 부견의 아버지인 부웅(符雄)이 아버지인 부홍을 달래며 「성장하면 자연히 온순해져서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라 하고 중지시켰습니다.

 

과연 부생은 성인이 되면서 다른 사람과 비길 데가 없는 힘을 소유하고 빨리 달리는 말도 이보다 미치지 못하였고 맹수와 격투해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장에서는 남보다 갑절이나 잘 싸웠고 단신으로 적중에 깊숙이 들어가 적장을 찔러 죽인 일이 10여 번이나 있었습니다. 제위에 오른 부생은 아버지가 후견인으로 저앻진 대신들과 그 자손들을 죽이며 「세상놈들은 나를 폭군이라고 말하는 모양이지만, 아직 천명까지는 죽이지 않았다.」라고 큰소리쳤다고 합니다. 이 부생이 전진을 다스리는 시기에는 동물들도 성질이 낙포해져서 호랑이와 늑대가 길에 나와서 사람을 덮쳐 잡아먹었다고 합니다. 부생은 부견의 쿠데타에 의해 사망할 때도 만취 상태였다고 합니다.


※ 출처 : 오호십육국(삼기양장), 중국중세사, 위진남북조사(이공범),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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