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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조금 뜸해지는 평일 자정 무렵 응급실이었다. 구급대원한테서 길가에 술에 취해 쓰러져 있던 신원 미상의 남자를 데려오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고 또 술 취한 사람 한 명 데려오는구나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후 도착한 환자는 노숙자 같은 행색에 신원 확인 가능한 지갑도 없었고 오래된 3g 핸드폰 하나만 전원이 꺼진 채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원무과에서 싫어하겠지만 그렇다고 환자를 거부할 순 없으니 무명남1 로 접수시키고 진료를 시작했다.
근처에만 가도 느껴지는 심한 술 냄새. 의식상태 확인을 위해 꼬집어 봐도 신음소리만 내면서 손을 내저을 뿐 크게 반응이 없었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것일수도 있곘지만 혹시 모르니 알콜 수치를 포함한 기본 피검사를 하고 머리 CT를 찍었다. 결과는 소주 3병 정도 마신 정도의 피검사 수치에 머리 CT는 특별히 뇌출혈은 보이지 않았고, 이 정도면 기본적인 검사에서는 이상이 없으니 술이 깰 때까지 구석에 눕혀놓으면 되겠구나 싶었다. 간호사에게 퇴원처방 미리 내놓을 테니 아침에 술 깨서 가겠다고 하면 보내주라 하고는 이내 몰려드는 다른 환자들 때문에 그 환자는 잊고 있었다.
아침이 되고 해가 떠오를 무렵 간호사로부터 아까 그 환자가 술이 좀 깬 것 같기는 한데 제대로 움직이질 못한다는 보고가 왔다. 뭔가 낌새가 묘해서 다시 가보니 말도 어버버거리고 팔다리 모두 힘도 똑바로 못쓰는 채로 허우적대는게 아닌가. 아, 이건 뭔가 이상하다. 부랴부랴 머리 MRI를 찍어보니 뇌간 부근에서 뇌경색이 확인되었다. 이 남자는 술에 취한 채로 걸어가던 중 뇌경색이 와서 쓰러졌던 것이었다. 이미 골든타임은 다 지났기 때문에 응급으로 쓰는 약들은 쓰지 못하는 상태였고 이후 신경과로 입원하였다. 후에 신경과 의사에게 듣기로는 보호자가 없는 사람이었고 며칠정도 치료를 하다가 요양병원으로 전원을 갔다고 한다.
이건 또 다른 사례이다.
일하던 병원 근처에 사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는데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응급실에 자주 오는 사람이었다. 보호자는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처음에는 연락하면 얼굴을 비추더니 술에 취해 응급실에 실려오는 일이 반복되자 나중에는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라며 전화를 끊어버리곤 했다. 처음 인사불성으로 실려왔을 때는 검사도 몇 번 했었는데 이후 아들이 찾아와 술 취한 사람에게 돈 뜯어내려고 검사를 했다며 난리를 피운 이후로는 대충 수액 하나 달아 놓고 응급실 구석에서 술이 깰 때까지 내버려두었다. 그러면 몇 시간 푹 자고 일어나서 계산도 없이 그냥 가버리고 원무과에서는 아들에게 전화로 진료비를 청구하곤 했다. 응급실 입장에서는 아주 짜증나는 환자이지만 그렇다고 술 마시고 아파서 왔다는데 진료 거부를 할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봐주고 있었다.
아주 바쁜 날 오전이었다. 중환자도 많고 응급실이 북새통인데 그 와중에 그 할아버지가 또 술을 마시고 넘어져서 이마가 찢어진 채로 119 구급차에 실려왔네. 안그래도 바빠죽겠는데 또 술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서 실려온 할아버지를 보니 나도, 옆에 있던 간호사도 짜증이 솟구쳤다. 그래서 그냥 남는 침대에 눕혀놨다가 술 깨면 꿰매줘야지 하곤 어디 구석으로 보내놓았다.
한참 정신없이 일하는데 원무과에서 연락을 했는지 웬일로 아들이 응급실로 들어왔고 난 할아버지가 또 술을 드시고 이마가 찢어져서 왔다며 아들을 환자가 누워있는 침대로 안내했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있는 할아버지의 안색이 어딘가 이상했다. 입가에는 거품이 있었고 낯빛이 시커멓게 죽어있었다. 급하게 뛰어가 맥박을 확인하니 맥은 느껴지지 않았고 이미 몸은 차가워진 상태였다. 부랴부랴 심폐소생술을 진행했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했고 사망선언을 해야했다.
보호자인 아들은 화를 내지는 않았었다. 사실 이건 명백한 의료진의 잘못이라 소송까지도 각오하고 있었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매일같이 술 마시고 병원을 들락거리더니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오히려 덤덤한 모습을 보였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사람들이 오면 어디까지 검사를 해야 할까? 기본적인 피검사 정도는 그렇게 비싸지는 않지만 알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이다. 그렇다고 머리 MRI 같이 좀 더 많은 검사를 하는 것은 진료비가 늘어나는 것도 물론이고 다른 응급환자의 검사 골든타임을 놓치게 될 위험이 있다. 의료자원을 낭비하겠지만 좀 더 많은 검사를 하는 것과 효율성을 위해 최소한의 검사만 하는 것. 이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 하는 것이 응급의학과 의사의 연륜이 아닐까 한다.
여담이지만 난 이 사건들 이후로 술에 취해서 정신 못차리는 사람들이 오면 기본적인 피검사와 머리 CT 검사는 무조건 했다. 술에서 깬 환자들이 동의도 없이 검사를 했다고 욕하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 안하고 문제 생기는 것보다는 하고 욕먹는게 낫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