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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기숙학원에서 관리 선생님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다. 어느 날 아이들 몇 명이 달려와 다친 고양이가 있다며 호들갑을 떨어대, 이끄는 장소로 가보니 손바닥보다 약간 큰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조심히 들어 상태를 보니 생각보다 아주 심각했다. 왼쪽 눈두덩이 함몰되어 눈알이 튀어나와 있었는데 흘러나온 피와 고름이 눈 주위 털과 엉겨 굳어 섣불리 닦아내다가는 정말로 눈동자가 뽑혀 나올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나는 급한 대로 소독약을 눈 주위에 발라주고 작은 박스에 고양이를 넣어두었다. 그리고 그날 일이 끝나는 즉시 택시를 타고 가까운 동물병원으로 이동했다.
수의사는 뇌진탕의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어딘가 높은 곳에서 고꾸라진 모양인데 아이의 상태를 보아 가망성이 거의 없다고, 실은 아주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추측 같은 확답을 내렸다. 하지만 아직 고양이는 숨을 쉬었고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병원에서는 입원이나 수술을 거부하며 스포이드로 먹일 수 있는 포도당과 소독약을 처방해 주었다. 나는 고양이를 숙소로 다시 데리고 와 박스 안에 푹신한 솜을 깔았다. 그러고는 하루에 세 번씩, 포도당을 먹이고 소독약을 발라주었다.
그렇게 사흘쯤 지났을까? 점심시간에 잠깐 고양이의 상태를 보기 위해 숙소로 들어왔는데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당황했으나 이내 없다는 건 곧 움직였다는 의미임을 알아채고 일말의 기대가 생겼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내 침대 아래 공간에서 아이를 발견했다. 부르자 녀석은 움직였다. 설마, 걸어서 오는 것이 아닌가! 몸의 균형이 맞지 않는지 비틀 걸음이었지만 살아서 걷고 있었다. 순간 마치 생명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녀석은 놀랍게도 내가 누구인지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살아주기만 하면 녀석을 키울 작정이었다. 비록 한쪽 눈이 애꾸인 고양이가 되겠지만 멋진 안대를 씌워 해적 코스튬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몽키. D. 냥이'는 해적왕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 아래에서 발견된 며칠 후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이다.
유년시절,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보았다. 중풍으로 7년을 앓으신 할아버지께서 혼수 상태에 들어 가셨던 어느 날, 한 시간가량 멀쩡한 정신으로 깨어나셔서 죽은 막내 고모를 찾으시다가 벌떡 윗몸을 일으켜 앉으시고는 허공을 향해 손을 저으며 기다리라고 몇 번 애타게 외치신 후, 다시 잠에 들어 다음날 임종하셨던 일이 그것이다. 아기 고양이도 그처럼 작은 몸 밑바닥에 고인 마지막 몇 방울의 생명 불씨를 소진했던 것 같다.
하지만 고양이를 죽인 건 사실 나일지 모른다. 걸음이 곧 회복이라 안도한 나머지 이후 며칠간 바쁘다는 핑계로 포도당 주는 일과 소독약 바르는 일에 소홀했다. 정말이지 바빴다. 하지만 10분 정도 약을 주기 위해 기숙사에 들를 시간은 있었다. 그러니까, 언덕 위 학원 건물에서부터 언덕 아래 기숙사까지 오르락 내리락하는 게 귀찮았던 거다. 살아날 수 있었던 고양이는 희망을 목전에 두고 죽어버렸다, 나의 귀찮음 때문에.
고양이를 묻은 얕은 둔덕 위에 남은 포도당을 모두 뿌렸다. 소주 대신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화 속 장면처럼 무덤 위에 중얼댈 정도의 감성을 보이기엔 내가 지은 죄가 컸다.
아기 고양이를 주워온 후 자꾸만 귓가에 큰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나는 그게 처음엔 환청인 줄 알았다. 왜냐하면 다친 고양이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으니까. 녀석을 묻고 난 후에야 그 울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어딘가로부터 나타나 무덤 주위를 서성이던 성묘 한 마리. 박스 안에 아기 고양이가 있던 날들에 창가로부터 들려오던 울음은 어미의 것이 틀림없었다.
그 일 이후 나는 고양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아직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