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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전진 이야기 - 다섯번째
게시물ID : history_153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6/7
조회수 : 40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4/12 17:58:45

「비수의 대전」에서 동진에게 크게 패배한 전진은 이후 급속도록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384년 정월에 모용수는 모용농, 장양 등과 함께 전진을 평정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같은해 2월에 업성을 공격합니다. 모용수가 이끄는 군대는 업성의 외곽을 빼앗게 되고 업성을 지키고 있던 장락공 부비는 중성(中城)으로 물러났습니다. 비록 모용수는 업성을 빼앗는데는 실패했지만 이 공격으로 모용수의 연(燕) 부흥계획은 구체화되고 모용수의 뜻에 호응해 모용수 휘하에는 순식간에 20만에 이르는 병력이 집결했습니다. 게다가 관동의 6주 여러 군현들도 모용수에게 항복의 의사를 밝히며 모용수 휘하로 들어갔습니다. 모용수는 이들 세력을 바탕으로 훗날 후연(後燕)이라고 불리는 나라의 기반을 잡아갑니다.  

 

모용수는 업성의 부비를 맹공격하며 부비의 목을 죄고 있었습니다. 모용수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포위된 업성 안에 있던 부비의 군대는 말 먹이로 소나무를 깎아 먹일 지경으로 어려운 처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넘어가기 직전이었는데 다행히 정령족이 반란을 일으켜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업성의 포위를 풀었습니다.  


모용수가 이렇게 일어나고 있을 때 과거 전연의 초대 군주였던 모용황의 소자(少子)인 모용덕도 전진의 흔들림을 기회로 삼아 군을 일으켜 방두를 빼앗고 이곳에 치술(置戌)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당시 북지장사(北地長史)였던 모용홍도 모용수의 업성 공격을 소식을 듣고 당시 평양태수인 모용충과 함께 관동으로 달려가 선비족들을 모집하여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화음에 주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주둔하며 전진의 장군인 강영과 요장 등을 격퇴하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이런 모용홍의 선전에 모용홍의 세력은 순식간에 성장하기 시작했고 모용홍은 그 세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도독합서제군사(都督陜西諸軍事) 대장군(大將軍) 옹주목(雍州牧) 제북왕(濟北王)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용수를 승상(丞相) 도독합동제군사(都督陜東諸軍事) 영대사마(領大司馬) 기주목(冀州牧) 오왕(吳王)에 추재하였습니다. 부견은 이러한 것을 막기 위해 군사를 보내 이들을 토벌하려고 했지만 모용홍에게 부예가 패배하고, 좌장군 보형이 그의 무리 8천 명을 이끌고 모용홍에게 투항하면서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연의 마지막 군주였던 모용위는 부견에게는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 등 겉으로는 연의 부흥을 부정하면서도 뒤로는 모용홍에게 자신의 뜻을 전합니다. 「진서 부견재기」에는 모용위가 모용홍에게 전하는 내용을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그러나 모용위는 몰래 사람을 파견하여 모용홍에게 하는 말이 지금 진(전진)은 운수가 끝났고 장안에 기괴한 현상들이 나타나 진나라가 얼마 유지하지 못할 것을 예시하는 조짐이 있다. 나는 이미 새장 안의 새가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과거에 나는 국가를 보위하지 못하여 지금의 처지에 이르게한 즉, 나는 죄인이다. 따라서 너희들은 나의 생사를 고려하지 말라. 국가를 중요하게 여기어 너희들은 노력하여 나라를 세우는 일에 공을 세워야 한다. 국력을 회복하는 것이현재로는 제일 급한 일이다. 오왕(모용수)을 상국으로, 중산왕을 태재, 영대사마로 너는 대장군 영사도로 될 수 있으며, 나의 명령대로 각 사람에게 벼슬을 주어라.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너는 그 즉시 황제가 될 수 있다.」

 


이런 모용위의 결단에 모용홍은 연호를 연흥으로 하고 모용위를 황제로 추대하기 위해 10만 병력을 이끌고 장안으로 진격하였습니다. 부견은 부휘에게 낙양과 합성의 병사 7만을 거느리고 장안으로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부견의 대책에도 불구하고 모용홍의 10만 대군 진격을 막기에는 무리였습니다. 384년 5월에 부정이 신도(信都)에서 부소가 고성(高城)에서 모용홍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모용홍 세력 내부에서 모반이 일어납니다. 모용홍이 부하인 고개에게 죽임을 당하고 모용충을 우두머리로 추대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장안 진격은 모용충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한편 부견은 무군장군 부방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모용충을 막게 하고, 후속조치로 하간공 부림으로 하여금 부휘의 후속부대 장군으로 임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견의 조치도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부방은 모용충에게 패배하였고, 하간공 부림은 전장군 강우와 함께 3만의 병력을 이끌고 패상(沛上)에서 모용충과 싸웠지만, 패배하여 부림과 강우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윽고 모용충의 군대는 장안을 포위합니다.

 

모용충의 군대가 장안을 포위했을 때, 모용위도 부견 암살 계획을 세웁니다. 모용위는 부견에게 「나의 동생 모용충은 좋고 나쁨을 모르는 상태에서 당신의 은혜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저는 실로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너그러우셨기 때문에 저는 재생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의 두 아이가 어제 결혼을 하였는데, 내일이 세 번째 되는 날이 옵니다. 그래서 저는 폐하를 저의 집으로 모실까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부견은 이에 응했습니다. 하지만 모용위의 이러한 계획은 북부인 돌현의 누이가 이 소식을 듣고 부견의 좌장군 보충을에게 고함으로 실패하였습니다. 부견은 분노하여 모용위의 부자의 그의 종족들 그리고 성내의 선비족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습니다. 이 때가 384년 12월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385년 모용충은 장안을 차지하고 부견은 간신히 장안을 탈출합니다.

 

장안을 탈출한 부견은 곧 요장에게 붙잡혔으며 요장은 그에게 선양을 요구했지만 부견은 거부하여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요장은 그에게 장렬천왕(壯烈天王)이라 시호를 내렸으며, 부비는 세조(世祖) 선소제(宣昭帝)로 추증하였습니다.

 

이렇게 전연의 잔존 세력이었던 모용씨들이 크게 군사를 일으키며 부흥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 384년 4월에 요장도 모용홍 진압에 실패하여 부견의 성냄을 두려워하며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장목(長牧)에 근거하여 대선우 만년진왕을 일컫으며 백작(白雀)으로 연호를 정하고 자립하였습니다. 후진(後秦)의 시작이었습니다. 요장은 자신의 일족인 강족과 천수의 윤씨, 안남의 방씨 등의 한인 호족들 그리고 흉노 세력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정권 기반을 다졌습니다.

 

 

※ 출처 : 중국 중세사 연구 「모용연과 북연사」, 오호십육국(삼기양장),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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