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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중국 남조 정권의 주진제도 - 첫번째
게시물ID : history_153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8/4
조회수 : 52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4/12 22:48:59

동진에서는 주의 장관인 자사는 평소에는 주의 백성들을 다스리자만 전시에는 장군호나 기타 군호(軍號)를 가진 무장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행정관인 동시에 무장인 자사가 거느리는 주진에서는 필두 부관(府官)인 장사(長史)가 부(府)*주(州) 두 곳의 차관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장사 이하의 부관으로는 관할 내의 군태수나 현령을 겸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또 부관 중 장사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부와 주의 차관임과 동시에 스스로 부의 문사(文事)를 총괄하고 사마(司馬)는 부의 무사(武事)를 총괄했습니다. 또 녹사참군(錄事參軍)은 장사의 경우와는 달리 하지만 군무를 총괄하고 또 규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별가(別駕)는 주관의 인사를 담당하면서 주청(州廳)의 전반적 책임자로서의 직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진의 주진 관료 기구는 자율적*독립적 경향을 띠는데 이는 주장(州將)과 부하와의 은혜와 보은 관계에 기반하였습니다. 우선 주장은 인사권으로 부계통 관리 중 장사, 사마, 자의참군(諮議參軍) 등은 원칙은 중앙 정부에서 직접 임명이었지만 주장이 희망하는 피주청자가 대신 칙허의 형식으로 허가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계통 관리는 별가 이하는 통상적으로 주장에게 재량권이 인정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내관(內官)에서는 친족회피제(조선시대의 상피제와 비슷합니다.)가 행해지고 있었지만 주진에서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장은 종종 전임을 하였는데 이에 따라 부관의 경우에도 주장을 따라 전임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1]. 이러한 경우는 종종 있었고 이를 통해 은혜와 보은 관계가 형성되고 이는 주진의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성격 강화를 지탱하였습니다. 또한 주장은 훈부(勳簿)의 결정권을 지니고 있어 이 훈부의 결정을 통해 주장이 일반 병사를 포함한 하급 부하에 이르기까지 은혜와 보은의 관계는 일반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진의 자율적*독립적 성격을 지탱한 다른 요인으로는 그 임지의 호족층과의 결속이었습니다. 주장은 주의 유력자층을 주의 중요한 직에 임명했는데 이는 그들이 갖는 치안 유지력과 군사력을 이용하기 위해서도 불가결한 일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재지 세력을 보유한 호족층은 별가 이하의 주의 중요한 관직을 거의 독점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2]. 호족층은 그들의 이해와 동향에 일치하는 한, 주장의 협력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적대시하는 경우도 낳았습니다[3].

 


제(濟)나라 말기까지도 이러한 호족들은 주의 중심세력을 이루었습니다. 양나라로 넘어오면서 이들 이들 호족들은 주의 관인보다는 중앙의 관인이 되는 것을 간절히 바라게 되어 생활의 본거지를 수도로 옮기고 했습니다만 이들 호족세력은 여전히 주의 요직에 임명되어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매우 독립적인 성격을 지닌 주진은 그들만의 독립정권을 수립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유력 주진(가령 파촉이나 장강 중류 등)들은 국경 근처에 많았고 주진 세력만으로는 북방 민족의 침공에 대처하기에 어려웠다는 것도 있었고, 또 타지역 출신자가 많은 부관들이 주진의 완전 독립을 막은 것도 있었습니다.

 


[1] 양 말기에 진나라를 세운 진패선과 함께 「후경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왕승변의 경우 양의 상동왕(湘東王) 소역(蕭繹 : 훗날 양원제)를 따라 전임지를 따라서 그 부관으로 전임하기를 20여 년에 달했다고 합니다.

 

[2] 동진 건국 무렵에 사마예를 비롯한 왕도와 왕돈 등을 중심으로 한 북래 귀족들은 오주(塢主) 집단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여 강남에 자신들의 지배 기구를 구축하였고, 지방의 군부와 주진의 장은 북래귀족으로 임명하고 휘하의 참군, 사마 등 기타 연속(椽屬)들은 그 지역의 토호들을 충용하여 정권의 기초를 지역적 사회적으로 넓은 계층에 두려고 하였습니다. 이는 두가지 효과를 발생시켰습니다. 첫번째는 지지기반이 미약하였던 북래귀족들의 지지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고, 두번째는 강남의 토착 세력들이 지방의 주진과 군부의 연속으로 진출함으로서 이것을 계기로 지방 정계나 중앙 관계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토착적인 향촌 질서 체제가 국가권력으로부터 공인과 비호를 받아 명분상으로도 정당성을 확보한 것이었습니다.


[3] 훗날 양(梁)을 건국하고 남조 정권 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양무제(梁武帝) 소연(蕭淵)이 옹주(雍州)의 주장으로 거병했을 때 임지의 호족층은 그를 강력하게 지원해주었다고 합니다.


 

※ 출처 : 세미나 위진남북조사, 위진남북조사 (이공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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