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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힘들었을까
게시물ID : gomin_153525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익명aGNpa
추천 : 2
조회수 : 18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10/17 00:37:24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리 가족은
기억도 못할 시절부터 떨어져 살았던 우리는

IMF에 사장이었던 우리 아부지
일용직 노동자가 되시고 
첫 일당으로 사오셨던 붕어싸만코는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 새벽,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일거리를 기다리셨을까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그래도 죽으란법은 없다고 멀리 지방으로 일을 하러 가신 그 날부터 우리 가족은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쭉 지금도 떨어져 살고 있다. 

아픈 오빠 먼저 보내고 도망치듯 이사를 왔을 때 
그제야 함께 할 수 있다 생각 했는데 운명인지 뭔지 아버진 다시 서울로 가시고 엄마와 나, 8년을 둘이 살았다.

조금씩 어긋나는 나를 보며 우리 엄만 얼마나 또 아프셨을까 다 자기 탓인냥 큰소리 한번 못내시고
먼저간 자식 아직 가슴에 다 담지도 못했는데 
날 올바로 키우시려고 몇번을 우셨을까 

다시 또 아버지 일이 안풀리시고 도망치듯 이사, 이사 안가면 고등학교도 못간다고 눈물 흘리시던 어머니, 너만은 나처럼 살게 하고 싶다고 울부짖던 어머니, 그렇게 또 둘이 살았다. 

이사가기 전 그 무렵 맞바람의 사실을 알았지만
난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러면 이 형식적인 가족의 모습조차도 잃을 것 같아서, 그때부터 난 부모님에게 애교를 많이 부리기 시작했다. 나 보고 살라고, 나 보고 힘내라고

대학을 진학하지 세식구 세살림, 그렇게 또 6년이 흘렀다. 지금은 이혼하시어 각자의 삶을 사시지만 
처음엔 적잖이 충격이었다. 그 해 새해, 먼저간 오빠에게 기도했다. 이번 해엔 세 식구 함께 살게 해달라고.. 그동안 너무 외롭게 지냈다고

어머니의 이혼 선언, 그래, 나도 여자지만 내가 엄마였으면 진즉 했겠다 생각이 들다가도 여자이기
전에 내 어미라는 생각이 먼저 들때가 있다. 하지만 놓아드리기로 했다. 그렇다고 내 어미가 안되는 것은 아니니까 

문득 일년에 한번씩 보면 40번도 못보고 엄마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마구 났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일년에 두 번은 보러가겠다고 다짐했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집을 떠난 딸, 자신을 부르지 않은 남편을 생각하며 얼마나 많은 밤을 내색 않고 혼자 눈물 흘리며 보내셨을까.

하나 남은 자식, 돈 걱정 없이 대학 보내려고 많이 일하실땐 90일을 쉬지 않고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일을 하신 아버지는 그 새벽마다, 그 혼자 일어나는 새벽마다, 얼마나 깊은 고독을 느끼셨을까.

못난 딸이라, 가족을 지키지 못한 딸이라 오늘 밤은 너무 슬프다. 

나만 외로웠던게 아닌데 아빠여서, 엄마여서, 얼마나 많은 외로움을 참고 사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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