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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먼 훗날
내 손길을 기억하는 이 있다면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떨리는 목소리로 들려줄
시 한 수 미리 적으며
좀 울어볼까 한다
햇살의 손길에 몸 맡기고
한결 뽀얘진 사과꽃 아래서
실컷 좀 울어볼까 한다
사랑한다는 단어가 묵음으로 발음되도록
언어의 율법을 고쳐놓고 싶어 청춘을 다 썼던
지난 노래를 들춰보며
좀 울어볼까 한다
도화선으로 박음질한 남색 치맛단이
불붙으며 큰절하는 해질 녘
창문 앞에 앉아
녹슨 문고리가 부서진 채 손에 잡히는
낯선 방
너무 늦어 너무 늙어
몸 가누기 고달픈 어떤 때에
사랑을 안다 하고
허공에 새겨 넣은 후
남은 눈물은 그때에 보내볼까 한다
햇살의 손길에 몸 맡기고
한결 뽀얘진 사과꽃 세상을
베고 누워서
박완호, 황홀한 저녁
네가 되게 그리워지는 저녁이다
어둠이 밀려오는 속도를 따라
너의 자리가 조금씩 흐릿해진다
잔고를 다 털어낸 은행 너머
두 줄기 연기가 꽈배기를 틀고 있다
서녘을 물들이는 건 노을만이 아니었음을
12월 저녁을 지나는 새들은
제 이름을 모르는 이에게도
쓸쓸하게 빛나는 음악을 남긴다
저들이 가는 쪽이 네가 있는 곳이다
가으내 번민하던 나뭇가지가 가리키는 곳
갑자기 바람이 세어지고
나무들은 일제히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한다
그쪽 어디엔가 네가 서 있는 까닭이리라
무슨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고개가 젖혀진다
곧 세상이 다 어두워지고
서로의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게 되면
형형색색의 눈을 치켜뜨고
네가 사방에서 다가올 것이다
최문자, 빨강과 노랑 사이
사랑은 어느 쪽으로 걸어가도 깜박거렸다
깜박거릴 때마다 그 각을 재어보고 싶었지만
깜박거림은 살아 있는 것이라고
따뜻한 것이라고 빨강과 노랑 사이라고
거기 점멸하는 주황 그것들을 그냥 이해하는 거라고 그는 말했다
'이해'라는 말, 하루 종일 만지작거려도 아무 이해도 돋아나지 않았다
사랑의 대부분은 비명,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불꽃이 직각으로 서 있다
넘어지는지 어느 쪽으로 눕혀놔도
빨강과 노랑 사이는 가지도 오지도 말라고 깜박거릴 뿐 각이 없었다
아프고 멍한 발들이 찌르르 저려오는 곳
사랑은 이상한 눈빛과 툭툭 부러지는 이별을 가진 주황색 점멸등
뒤집어놔도 깜박거렸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밤
나는 가장 캄캄한 순간에 오래 깜박거리던 그의 손목을 놓았다
뒤쪽 허술한 어느 한 층에 불이 나갔다
사랑은 더 무서울 것이다
여러 번 혼절했다가 언제쯤 깨어날 것인가
윤성택, 밤의 숙박계
가방을 비우자 여행이 투명해졌다
기약하지 않지만 이별에는 소읍이 있다
퇴색하고 칠이 벗겨진 간판은 한때
누군가의 빛나는 계절이었으므로 내일은
오늘 밖에 없다 친구여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아직도 여인숙에서 기침을
쏟고 싸늘히 죽어가는 꿈을 꾸기 때문이네
수첩이 필체를 혹독히 가둘 때
말의 오지에서 조용히 순교하는 글자들
나는 망루에 올라 심장의 박동으로 타오르는
소각장을 본다네
신발을 돌려 놓으면 퇴실이요
이곳 숫자는 주홍 글씨라네
이불을 쥐는 손으로 만지는
전구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호실을 밝힌다
아름답다, 라고 슬프게 발음해보는 날들이
좀체 돌아오지 않아도, 빈 집은 제 스스로
별을 투숙시키고 싶다
적막은 밤의 숙박계
치열이 고른 지퍼에 밤기차가 지나면
어느 역에서 가방이 나를 두고 내린다
김언, 방
너는 대체 무슨 방을 원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나는 원했다
아무도 없는 방과 혼자 있는 방과 같이 있는 방을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너는 물을 것이다
이 방은 이미 실현됐다고 말할 것이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나 혼자 너와 얘기하고 있으니
심심하고 무료하고 떠들썩하기까지 한 이 방에서
누가 먼저 나갈 것인가
나는 아니다
너도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