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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준, 왼손이 오른손을
저녁이 온다
저녁이 온다고 적었으니까
숲속에서 너와 나의 한가운데로 길은 뻗어 있고
돌아갈까
주머니에 들어찬 어둠만큼 손에 잡히는 곳
새벽이 온다
저녁이 온다고 적었으니까
나는 시간 한가운데 서 있고
누가 이곳을 숲속이라고 적어놓았나 이제는 오래된 일인데
사람들보다 그 사람이
네가 옆에서 오고 있다
박연준, 자오선(子午線)
그는 밤의 하인
발자국을 손으로 쓸며 달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펄럭이다
나뭇잎과 섞이는 줄도 모르고
냇물에 지문이 풀어져
물에 지도가 생기는 줄도 모르고
바다의 단단함이 무너져
파랑이 가루가 될 때까지
가루마저 쓸며 달리고 있었다
이상국, 어느 날 스타벅스에서
나에게는 이제 남아있는 내가 별로 없다
어느새 어둑한 헛간같이 되어서
산그늘 옛집에 살던 때 일이나
살이 패이도록 외롭지 않으면
어머니를 불러 본 지도 오래되었다
저녁내 외양간에 불을 켜놓고
송아지 나올 때를 기다리거나
새벽차를 타고
영을 넘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거의 새것이다
그동안 많은 것을 보고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내 것이 아닌
나는 저 산천의 아들 혹은
강가에 모래 부려 놓고
집으로 가는 물처럼
노래하는 사람
나에게는 지금 내가 아는 내가 별로 없다
바퀴처럼 멀리 와
무엇이 되긴 되었는데
나도 거의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그 사람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혜미, 혓바늘
혀끝에서 문장들이 박음질된다
침묵이 혀 밑에서 열매 맺을 때
나는 네가 심어준 씨앗이라고 생각했다
언어로 뭉쳐 터질 듯 부풀어오른 그 열매 때문에
모든 말들의 옷자락이 찢어졌어
그것의 이름이 씨앗이 아닌 바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게 간절했던 것은 소음이다
비명을 찢는 고막이다
둥둥 울리는 영혼이다
율격을 버린 바람이다
세상 모든 구석진 곳에서 콸콸 흐르는 비린 음악이다
혀를 버리고 상징을 버리면
날카로운 소리에 뿌리내려 자라던 바늘이
곧 통증을 거느린 씨앗이었으니
이제 너는 실 없이도
오래도록 나를 바느질한다
이기철, 기차
출발의 종류가 몇 가지인가를 기차는 가르친다
떠나면서 손 흔드는 법과 남으면서 생각하는 법이
인류의 양식임을 기차는 가르친다
잘 쓴 소설의 마지막 구절처럼
모든 출발과 이별이 이 한 칸에 배송되는 우편물임을
기차는 가르친다
흔들림은 아이에게 젖 물린 엄마의 잠을
제 흔들림의 방식으로 깨워준다
도시마다 편애의 역을 키운다는 것을 미구엔
저 젖먹이가 기차로부터 배울 것이다
머지않아 기차가 엄혹한 시간임을
배웅의 눈동자들이 사랑을 나눠먹는 빵임을
기차로부터 배울 것이다
흩뿌린 곡식처럼 출발은 활발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이곳
그러나 이별은 여운의 양식임을 못 가르치는 이곳
어떤 하루라도 음악적인 일몰을 가진다는 것을
누구든 한 번은 기차에서 배울 것이다